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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75화 (75/225)

너의 코드가 보여 (75)

조금 놀랐다. 항상 나 혼자 쓰는 훈련장에 익숙한 코드가 세 개나 있어서.

딱히 쓰지 말라고 제한해 둔 것도 아니건만, 상회 쪽 훈련장은 내 독점이 되다시피 했었다.

그야 상인들은 수련을 할 이유가 없고, 라이놀은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긴 한데.

아무튼, 저기에 나나 카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처음 본다.

뭐지?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오늘은 그냥 저택 훈련장에서 수련할까.”

“여기까지 와서요?”

카일이 어이없단 듯 나를 쳐다봤다.

“아니, 항상 여기만 쓰니까 뭔가 질리는 거 같기도 하고. 가끔은 기분전환도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

“수련하는데 기분전환이 왜 필요해요?”

“하기 싫은 거니까 더 기분전환이 필요한 법이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라 느꼈는지 카일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젓는다.

“지금은 저택 훈련장 쓰기 힘들걸요.”

“왜?”

“그 기사단 사람들로 꽉 차 있더라고요. 검 한 번 휘두르려 치면 사람 치겠던데요.”

“아.”

이제야 저 셋이 왜 여기까지 와 있는지 알겠다. 저택 훈련장에 안 가 본 지 오래라 잘 몰랐는데, 제 1기사단 인간들이 거길 사용하고 있던 모양이다.

아니. 쓰는 건 좋은데, 대체 언제까지 집에 붙어 있을 생각이지?

기사단이 레이튼에 온 것도 벌써 이 주 째다. 슬슬 본인 집 찾아갈 만도 하건만, 이놈들은 저택에 꿀이라도 발라 놨는지 도통 나갈 생각들을 안 한다.

명령권이라도 써야 하나?

아무리 그래도 처음 내리는 명령이 ‘제발 좀 나가’인 건 좀……. 일단은 생각만 해 두자.

어쨌든 괜히 불안해했네. 최근 심적으로 소모되는 일이 많아서 그런가, 자그마한 일에도 흠칫흠칫 놀라는 기분이다. 의심병이 도졌다 해야 하나. 마음 좀 편히 먹어야 하는데.

훈련장 안으로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다들 여기서 뭐 해요?”

“리안……경?”

서율이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근데 내가 왜 경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상단주님, 리안 씨, 이런 식으로 불렀었는데.

뭐, 호칭이야 아무래도 좋나.

나는 고개 숙이는 걸로 인사를 대체하고, 그 위로 올라갔다.

“합동 훈련이라도 하고 있었나 봐요? 서쪽이랑 동쪽은 기술 체계가 많이 다르니, 서로 의견 공유하면 많이 도움 되긴 하죠.”

“대련이야. 내가 미르 경한테 한 수 가르쳐 달라 청했거든.”

라이놀이 허리춤의 검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순간, 아까의 그 찜찜한 기분이 다시 엄습해 왔다. 사냥감 쫓는 사냥꾼의 눈빛이라 해야 하나. 라이놀의 시선이 딱 그 꼴이다.

나도 모르게 뒤돌아 나갈 뻔했다.

“……왜 그렇게 봐요?”

“오랜만에 나랑 대련 좀 하자.”

대련?

“갑자기 왜요?”

“그냥. 예전에는 자주 했었는데 최근 1년 동안 그런 적 없잖아. 마침 훈련장에서 만나기도 했고, 겸사겸사 같은 거지 뭐.”

……그런 것 치곤 너무 의욕 만만해 보이는데.

거절하면 대뜸 검 들고 달려들기라도 할 표정이다.

“겸사겸사 그러는 거면 그냥 나중에 하죠.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대충 몸만 풀 생각이었거든요.”

“아까는 오늘 상태 좋다고 밤늦게까지 훈련하자 그랬잖아요?”

이게 왜 갑자기 눈치 없이 굴지?

카일의 정강이를 살짝 차 주고 말을 이었다.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아침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몸 움직이기가 힘드네.”

“그럼 조건은 비슷하네. 나도 방금 전까지 미르 경과 대련해서 컨디션 별로거든.”

“대련을 했으면 몸이 풀렸겠죠. 저는 몸이 안 움직여진다니까요?”

“피차일반이야. 나도 맞은 곳이 쑤셔서 잘 안 움직여지거든.”

“…….”

어떻게든 나와 대련을 해 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형식은 마력, 신체 제한하고 검술 쪽으로 가면 되죠? 제일 많이 한 방식이잖아요.”

“아니. 아무 제한 없이, 전력으로.”

라이놀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잠깐 멈칫했다가,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 * *

‘……진짜 4급이네?’

서율이 라이놀과 대치하고 있는 리안을 보며 생각했다.

사형의 보증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는 심정이었는데, 직접 확인해 보니 정말 그 말대로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전부 잘하지?’

보통 장사면 장사. 무공이면 무공. 어느 쪽이든 한 분야만 파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이래서야 라이놀의 본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지껄이는 소리가 이해가 갔다.

상단을 운영하면서도 2년 만에 4급에 오른 사람이 옆에 있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주 나중엔 정치까지 하시겠어.’

내심 비꼬던 서율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레이튼 시민들이 ‘성자’니 뭐니 하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짜 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가 옆에 앉아 있는 사형을 콕콕 찔렀다.

“사형, 사형.”

“왜, 왜.”

“용혈 일어났는지 좀 알아봤어요? 그, 여기서 차원 폭풍이라 한다는 거요.”

“아니.”

예상하고 있던 답변이었기에 서율은 화가 나지 않았다. 애초에 저 인간에게 바랄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럴 줄 알았어요. 제가 리카르도 경한테 얘길 좀 해 봤거든요. 그분도 미안하지만 용혈, 차원 폭풍 일어났으면 호위 해 줄 수 없다고 하셨어요. 본인이 직접 나서도 동방까지 무사히 데리고 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고.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죠. 저도 목숨 걸고 모험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그래.”

“대신 용혈, 차원 폭풍 일어난 게 맞는지 확인은 해 주신다 하셨어요. 아마 이번 주 내로 결과 나올걸요?”

“그렇구나.”

“만약 진짜 동방으로 건너갈 수 없는 상황이면…… 어떻게 할까요? 저 상단주님, 아니…… 리안 경 말대로 계약서에 싸인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난 벌써 싸인했는데.”

“……네?”

서율이 황당한 눈으로 옆을 쳐다봤다.

“사형, 진짜 미친 새끼세요?”

“대사형한테 이른다.”

“이르든가.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도대체 누가 확정도 안 난 일에 싸인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동행한테 상의도 없이. 서율이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예요?”

“직감. 뭔가 돌아갈 수도 없을 거 같았고, 싸인하는 게 더 이득일 거 같았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서율이 중간에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사형의 ‘직감’은 대부분 맞고는 했던 것이다.

대사형이 말하길, 직감은 추상적인 감각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신경 정보의 총체라 했던가.

눈으로 보고, 코로 맡고, 피부로 느끼고. 그 전부가 머리를 거쳐 직관적으로 나오는 것이 직감이라 했다.

서율이 조심스레 물었다.

“사형, 혹시 사막 건너올 때 뭔가 이상한 점 느낀 거 있어요?”

“응.”

“……뭔데요?”

“마물 숫자.”

미르가 훈련장 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분명 서쪽에 가까워질수록 마물이 줄어야 하는데, 오히려 숫자가 늘어났지. 어디서 새로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

“그러니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차원 폭풍은 생각도 못 했지만.”

서율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같은 길을 왔는데, 그녀는 저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지옥도는 숫자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마물들의 천국이었으니 말이다. 100번 습격받으나 99번 습격받으나 비슷한 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당장 몸을 쉬는 것도 벅찬 상황에 사형은 저런 것까지 보고 있던 것이다.

‘앞으로 웬만한 건 사형 말 믿어야겠다.’

대충대충 사는 줄 알았는데, 관찰력도 좋고.

혹시 진짜 대강대강 살고 있는 건 본인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아니. 그건 좀.’

아무리 그래도 서율은 사형을 그렇게까지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저 직감이란 것도 아직 확인 안 된 상태고. 일단 용혈, 차원 폭풍이 사실이란 것부터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일단 두고 보는 걸로.’

생각을 마친 서율이 다시 훈련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리안과 라이놀, 그 두 사람이 검을 뽑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사형은 저 둘 중 누가 이길 거 같으세요? 한 명은 이미 싸워 본 상대잖아요.”

“아마 라이놀 경이 이길 거예요.”

대답은 미르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나왔다. 카일이 훈련장에서 내려와 그들에게 다가갔다.

“리안 형은 신체 능력이 좋지만, 검술이 영 꽝이죠. 그에 반해 라이놀 경은 움직임이 거의 흠 잡을 데가 없어요. 둘이 마력은 비슷하니 힘과 기술의 대결인데, 보통 기술이 이겨요.”

“확실히. 겨우 2년 전 입문해 놓고 검술까지 잘하는 건 진짜 너무하지.”

“형한테 맞는 검법도 없었고요. 일반인이랑 신체 능력 차이가 너무 나서.”

카일이 최근 좀 교정해 주긴 했지만, 결국 그도 검 들어 본 지 얼마 안 된 꼬맹이일 뿐. 타고난 재능 덕에 어색한 움직임을 잡아 줄 순 있어도, 그게 검법이나 검술은 아니란 소리다.

“사실 저 정도 움직이는 것도 신기할 정도예요. 보통 사람이면 힘을 주체하지도 못했을걸요.”

“……아까 라이놀 경도 같은 소리 하던데, 대체 힘이 어느 정도길래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거야?”

서율의 물음에 카일이 어깨를 으쓱였다.

“직접 본 적은 없어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라이놀 경 말대로면 웬만한 거인족 수준은 넘을 거라 했어요.”

“음…….”

서율은 거인족이 무엇인지 모른다. 동방엔 그런 종족이 없으니까. 하지만 어감만으로도 굉장히 힘이 센 녀석들이라는 느낌은 왔다.

“사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저 말대로 라이놀 경이 이길 거 같아요?”

서율의 물음에 미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답했다.

“아니. 리안이 이기지.”

“아, 여기서 의견이 갈리네요. 그럼 저는……. 음. 얘기 좀 더 들어 보고 결정할게요. 카일, 라이놀 경이 이기는 데 얼마나 걸릴 거 같아?”

“30분이요.”

카일이 그들의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

“기술 차이는 심하지만, 그만큼 신체 능력이 받쳐 주니까요. 아마 라이놀 경도 공격 흘리면서 힘을 빼는 방향으로 갈 거예요.”

“정석이네. 동방에서도 보통 그렇게 해.”

서율이 훈련장 위를 힐끗거렸다. 둘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더니, 검을 들어 서로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이제 곧 시작하겠네. 그녀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사형은요? 사형은 리안 경이 이기는 데 얼마나 걸릴 거 같아요?”

그 말에 미르도 하품을 멈추고 훈련장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대치 중이던 둘이 걸음을 떼는 중이었다. 탁, 하는 발소리와 함께 서율의 시선도 위를 향했다.

미르는 그 둘이 검을 맞부딪히기 직전까지 지켜보다가 툭 내뱉듯 말했다.

“1초.”

“네?”

어처구니없는 말에 서율의 시선이 옆으로 향하고.

퍼어엉!

북 터지는 듯한 소리에 다시 훈련장을 바라봤을 때는, 이미 라이놀의 모습이 위에서 사라진 뒤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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