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74)
리카르도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니다.
불치병이니 뭐니. 솔직히 조금 오그라든다고 해야 하나. 과장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하지만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납득이 간 것도 사실이다. 아까 타냐의 모습은 조금 위태롭게 보이긴 했으니까.
설마 겨우 집에서 쫓아냈다고 혼자 피폐물 찍고 그럴 거 같진 않은데, 어쨌든 세상일은 모르잖는가.
적어도 지금 당장 거리를 벌릴 필요가 없다는 말에는 동의를 했다는 이야기다.
“일단 당분간은 집에 머물러도 돼.”
“……안 나가도 된다고?”
“싫으면 나가고.”
“아냐!”
엄청나게 큰 목소리였다.
타냐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나는 당연히 좋은데…… 갑자기 왜?”
“그 기사단장이랑 거래를 했어. 너 집에 두면 날 네 다음 명령권자로 여기겠다더라.”
“아…….”
밝아지던 표정에 바로 실망감이 스친다.
하지만 이내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타냐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고마워. 앞으론 거슬리지 않게 잘할게.”
“잘하긴 뭘 잘해? 네가 뭐 죄졌냐? 나도 잘못한 거 없는데, 너도 잘못한 거 없어. 그냥 평소대로 해라, 평소대로.”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타냐가 살짝 웃었다.
“응. 그럴게, 그럼.”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공간을 지배했다.
결국 내가 한숨을 쉬며 툭 내뱉듯 말했다.
“아침은 먹었어?”
“……아니.”
“그럼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밖에 춥다. 아직 남은 게 있으려나 모르겠네.”
저택으로 걸음을 옮기자 머뭇머뭇 따라붙는 기색이 느껴진다. 입구에 도달했을 무렵.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아, 응. 뭐든 물어봐.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면 전부 말할게.”
“너한테 나가라고 얘기할 때, 그동안 내가 너 피해 다닌 이유 짐작 간다고 했잖아. 그게 뭐야?”
아무 말이 없다. 뒤돌아보니 제자리에 굳어 있다.
“뭔데.”
잠시 말이 없던 타냐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만 나 피한 게 아니라 나도 너 피했잖아.”
“그치.”
같은 집에 사는 상황에서 한쪽만 상대를 피한다고 그게 피해질 리가 없다. 막말로 쟤가 내 방 앞에 죽치고만 있었어도 마주칠 수밖에 없었겠지. 그냥 삐져서 그랬겠거니 했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나?
타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난 너 보는 게 부끄러워서 그런 거니까, 너도 같은 건가 하고…….”
“……아, 그래.”
내가 자길 좋아한다고 착각했다는 소리다. 2년 전처럼.
고개도 못 들고 있는 애 꼽 주기는 좀 그래서, 그냥 말없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 * *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놀이 머리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에 미르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서율이 내심 감탄을 터뜨렸다.
‘생각보다 훨씬 수준이 높네.’
라이놀이 식당에서 죽치고 있던 미르에게 대련을 청했을 때, 서율은 솔직히 그가 사형의 삼초지적도 못 될 거라 생각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추론이었다. 미르는 동방에서 제일가는 유망주였고, 애초에 두 사람은 경지부터 차이가 났으니까.
초절정과 절정. 여기선 3급 4급이라 하던가. 아무튼, 그 둘은 겨우 한 계단이라 표현하기에는 너무 압도적인 격차가 있었다.
사실 대련이라는 말보다는 교육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수준 차이란 소리다.
그런데 정작 나온 결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설마 삼십 초나 버틸 줄이야.’
물론 서로 마력 사용을 제한했기에 나온 결과다. 전력으로 싸웠다면 금세 결판이 났겠지. 하지만 ‘용’의 칭호까지 받은 사형을 상대로 저만큼이라도 했다는 게 대단한 거다.
‘……나는 십 초 겨우 버티는데.’
서율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훈련장으로 올라갔다.
“대단하시네요. 저는 비슷한 또래 중에 사형 상대로 그렇게 버티는 사람은 처음 봐요.”
라이놀이 어색하게 웃었다.
“미르 경이 봐주면서 해 주신 덕입니다.”
“사형은 대련할 때 절대 봐주는 법이 없어요. 7살 난 아이 상대로도 전력을 다하죠.”
“대련에 진심인 편이신가 보군요.”
“아뇨. 그냥 얼른 끝내고 쉬고 싶어서 그래요.”
서율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자부심 가지셔도 좋아요. 30살 넘은 저희 대사형도 이십 초 겨우 버티는 게 고작이거든요. 검술은 언제부터 배우신 거예요?”
“처음 검을 잡은 건 6살입니다만……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입니다.”
라이놀이 검을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서율은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정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용병 일을 했습니다. 딱히 뭘 가르쳐 준 스승이 있는 것도 아니라 2년 전에나 겨우 가문의 심법이랑 검법을 얻었죠.”
“……2년 만에 그 수준이라고요?”
“예.”
라이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실제로도 별로 대단찮은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년 만에 4급. 얼핏 굉장해 보이지만, 그전에도 그는 심법 없이 5급에 올라 있는 상태 아니었던가.
‘그 기간까지 따지면 10년이 넘겠네.’
물론, 2년 만에 경지가 한 단계 상승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기사 백 명에게 물으면 백 명 모두 입을 떡 벌리겠지.
그러나.
그것으로 좋아하기에는 곁에 있는 녀석의 재능이 너무 압도적이다. 리안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2년 만에 4급에 오르지 않았나. 그것도 압도적인 신체 능력까지 가진 채로 말이다.
열등감이야 오래전에 벗어 던졌다지만, 라이놀은 겨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는 이유로 기뻐할 수도 없었다.
“사실 정확히는 10년이 넘을 겁니다.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게 2년 전부터지, 그전에도 심법 없이 5급에 오른 상태였거든요.”
“……심법도 없이 마력을 어떻게 모아요?”
“평상시에도 호흡은 하지 않습니까. 그걸 약간만 신경 쓰면 됩니다.”
서율은 기가 차서 생각했다.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심법 없이 마력을 모으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 실제로 동방에도 그런 식으로 경지에 오르는 이들이 있고.
문제는 그 효율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처참한 수준이라는 거다. 여기서 말하는 5급 수준을 심법 없이 달성하려면 30년은 걸리겠지.
그걸 평상시 호흡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10년으로 단축했다는 건,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면, 미르 사형이라든가.
‘……저런 인간이 하나 더 있다고?’
어쩐지 서로 쿵짝이 맞는다 했다.
“……재수 없어.”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율이 시치미 떼고 말했다. 라이놀은 멋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명색이 4급 기사나 돼서 코앞에서 하는 말을 놓칠 리 없다.
“재수 없어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저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절정, 4급까지 2년 만에 도달해 놓고요? 저도 나름 재능 있다 자부하는데, 5급에서 4급까지 5년은 걸렸어요.”
“……리안을 탐지하지 않으셨나 보군요.”
“그 상회 주인분 말이에요?”
서율은 그 이름이 갑자기 왜 나오나 했다.
물론,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 어린 나이에 직접 상회를 일구고, 성공까지 시켰다는데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그걸 그냥 운영하는 것도 아니다. 임금도 착취하는 일 없이 넉넉히 쳐준다나. 여기 사람들에게는 자선사업과 다름없어 보일 정도라 ‘레이튼의 성자’라는 칭호도 붙였단다.
저 시절 서율은 뭘 했나 생각해 보면, 끽해야 사형들 따라다니며 술이나 먹던 게 다였다.
‘……아니, 그게 정상이잖아.’
서율은 본인의 인생이 부끄럽진 않았다.
무공도 열심히 배웠고, 가끔 술 먹으러 갔다 만난 불량배들을 교육시켜 주기도 했다.
하지만 리안이 한 일들에 비하면 빛이 바래 보이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런 와중에 무공까지 배웠을 리가.’
서율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물어보았다.
“호신 수준으로 익힌 게 꽤 재능을 보였나 보죠?”
“호신 수준은 아닙니다만.”
“아, 꽤 본격적으로 했나 봐요? 탐지 얘기하신 거 보면 마력은 있다는 소린데…… 설마 5급 수준은 아닐 테고.”
“예. 5급은 아니죠.”
“하긴, 그 나이에 상회까지 운영하면서 마력 느낀 것만으로도 대단하긴 하네요. 그래도 사형이나 라이놀 경 재능에 빗대기엔…….”
“4급입니다.”
툭, 튀어나온 소리에 서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이놀 경 경지야 당연히 알고요.”
“제가 아니라 리안 말입니다. 얼마 전 저와 비슷한 시기에 4급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네? 농담하시는 거죠?”
“게다가 그쪽은 진짜 의미로 4급까지 2년 만에 도달했죠. 저랑 달리 정말 아무것도 없던 상태였으니까요.”
“…….”
서율은 저 거짓말을 믿어야 하나 고민했다. 수긍하자니 말이 안 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자니 헛소리나 뱉고 다닐 인간으론 보이지 않는다.
라이놀은 그런 서율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해는 합니다. 저도 옆에서 봐 왔는데 아직도 잘 믿기지 않으니까요.”
“……정말이란 말이에요?”
“제가 이런 거짓말을 해서 뭐 하겠습니까?”
“그렇긴 한데요…….”
서율이 구석에 앉은 채 하품을 쩍쩍 하고 있는 미르를 쳐다봤다.
“사형은 그 사람 기운 느껴 봤어요?”
“당연한 거 아닌가.”
“……왜요? 그게 왜 당연해요?”
“다른 사람 경지를 탐지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니까. 사매는 못 해?”
한심하단 듯 쳐다보는 눈에, 서율이 속으로 분노를 삭이고 말했다.
“누가 그걸 만나는 사람마다 해요?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인데.”
“나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상대로도 다 하는데.”
“……잘났어, 정말.”
서율이 심통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진짜 맞아요? 4급이라는 거.”
“응.”
담백한 대답에 서율이 어이없어했다.
“근데 왜 안 놀라요? 저 말대로면 사형보다 천재인 건데?”
“나보다 천재인 사람 있다고 내가 천재란 사실이 바뀌진 않지.”
“……아, 네.”
서율이 다시 라이놀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짜 2년 만에 4급 된 게 맞아요? 아무리 그래도 안 믿기는데…….”
“확실합니다. 그때부터 쭉 같이 살았으니까요. 게다가 그냥 4급도 아닐 겁니다.”
“……그냥 4급이 아닌 건 또 뭐예요?”
서율의 얼굴이 의아한 빛을 띤다. 라이놀은 굳이 그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지 않고 훈련장 입구를 바라봤다. 두 개의 기척이 느껴진다.
분명 리안과 카일일 거다. 둘은 최근 훈련장에서 살다시피 했으니까. 특히 이런 오후 시간에는 무조건.
그걸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지금 시간에 대련을 청했다. 리안을 상대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대련…….’
원래는 실전 경험 쌓겠다며 리안이 뻔질나게 요구해 왔는데, 그게 1년 전부터는 뚝 끊겼다. 다린은 리안이 계속 지다 보니 자존심 상해서일 거라 했지만……, 라이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누구 자존심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지.’
라이놀이 허리춤의 검을 매만지며 쓰게 웃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두 개의 인영이 바닥을 비춘다. 그중 더 큰 쪽이 들어오면서 입을 열었다.
“다들 여기서 뭐 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