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73)
테이블에 놓인 핵폭탄을 빤히 바라봤다. 맞은편에서는 리카르도가 어서 잔을 들지 않고 뭐 하냐는 듯 고개를 까딱인다. 나는 기대에 보답해 주기 위해 그 독이 든 성배(聖杯)를 들어 올리고, 곧바로 벽으로 던져 버렸다.
쨍그랑!
유리잔에 담겨 있던 마력이 순식간에 리카르도의 몸으로 회수된다.
“시험은 적당히 해 두시죠.”
태연한 얼굴의 리카르도를 마주 보며 말했다.
마력을 넘겨? 그것도 유리잔에 담아서?
세상에 그리 형편 좋은 기술이 있을 리 없다. 그런 게 있었다면 이 세계엔 진작 마력 돼지들이 난무했겠지.
게다가 애초에 고려할 만한 문제도 아니었다. ‘문’을 막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리카르도가 깨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건 자네 집 물건이네만.”
“말 돌리지 마시고.”
“……황녀님이 행복하길 원한다는 말에는 거짓이 없네.”
리카르도가 들고 있던 양주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하지만 그 방법이 사랑하는 척해 주는 남자와 멀리 도망치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굳은살 배긴 손이 툭. 잔을 내려놓는다.
“잠깐은 행복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것도 일 년을 넘기지 못할 거야. 게다가 붙어 지낸다고 애정이 생긴다고 믿지도 않네.”
“그리 잘 아시는 분이 이런 쓸데없는 일은 왜 벌인 겁니까?”
“자네 말대로 시험이지. 황녀님이 좋아한다는 상대 아닌가. 한번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네. 뭐, 적어도 멍청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게 됐군.”
리카르도가 다시 태연히 잔을 채웠다.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 속에서 혼원력을 내보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한곳에 모인다.
그걸 본 리카르도가 눈을 빛냈다,
“……마력만 많은 병신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됐고 말이야.”
“할 말은 전부 끝나셨습니까?”
“아직 남았네.”
리카르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마당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나도 의자에 앉은 채 그곳을 바라봤다.
[DT-2-32-2]
나와 대화 나누던 장소에 그대로 서 있는 타냐의 코드가 보인다.
“벌써 30분째일세. 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신 게.”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리카르도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 가지 묻지. 황녀님이 자길 이용해도 좋다 하셨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
“……생각이랄 것도 없습니다. 흥분 때문에 잠깐 헛소리를 내뱉었을 뿐,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닐 겁니다.”
“그런가? 나는 꽤 진심으로 들렸는데 말이야.”
리카르도가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거기다 자네가 원하면 전쟁도 감수하겠다 하셨지. 생전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던 분이 말이야. 그대는 이게 정상으로 보이나?”
“그때 타냐는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맞네. 제정신이 아니시지. 황녀님께서는 병에 걸린 상태일세. 사랑이라는 병 말이야.”
“…….”
“그런 식으로 보지 말게. 자넬 오그라들게 만들려고 한 말이 아니니까. 내가 보기에 사랑이라는 건 중독 증상과 비슷한 면이 있어.”
리카르도가 품속에서 연초를 꺼내 물며 말했다.
“사랑이든 중독이든 갖고 싶은 게 멀어지면 오히려 더 원하게 되는 법이지. 자네는 단순히 거리를 두면 해결될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을 거란 얘길세.”
“그래서 대체 뭐 어쩌란 겁니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마치 나를 탓하는 것처럼 들려서.
“중독자를 예로 드셨는데, 그 사람들 치료도 기본적으론 그 대상에서 멀어지게 하는 걸로 시작합니다. 제 나름대로 생각한 최선의 방법이란 말입니다.”
“원래라면 그게 맞겠지. 문제는 자네가 한 가지 크게 착각하고 있다는 거야.”
“뭐 말입니까?”
“황녀님의 병은 이미 치료가 가능한 단계를 넘어섰네.”
리카르도가 후, 하곤 담배 연기를 뱉었다.
“대상에서 격리시키는 건…… 효과는 좋겠지만, 극약처방이지. 굳이 고칠 수도 없는 불치병에 그런 시도를 할 필요가 있나?”
“……불치병이라는 근거가 뭔지 설명부터 좀 해 주시죠.”
“근거는 없네. 그런 게 필요하다면 내 경험이라 해 두지.”
“….”
뭐라 한마디 더 하려 했는데, 순간 그의 아내와 딸에 관한 과거 설정이 떠올랐다. 내가 입을 다물자 리카르도가 피식 웃었다.
“뭔가 들은 게 있나 보군. 뭐, 유명한 이야기였으니 이상할 것도 없네만.”
“……그래서 결국 뭐 어쩌란 말입니까?”
리카르도가 다시 한 번 후,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불치병을 고칠 순 없지만, 완화는 가능하지. 황녀님은 지금 자네에게 너무 의존적이야. 목숨이라도 내 달라면 내주겠더군. 의지하는 것과 의존하는 건 다르지 않나. 그대는 황녀님이 본인 말이라면 무조건 네네 거리는 병신 같은 마법 인형이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지금 황녀님을 내쫓는 건 오히려 그렇게 만드는 꼴일세.”
치지직. 리카르도가 들고 있던 연초가 불타 허공으로 흩어진다. 속성 같은 게 아니라, 순수한 마력만으로 낸 결과다.
“그냥 곁에 놔두게. 사랑하는 척도, 사랑해 줄 필요도 없어. 그건 애초에 내가 협박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니 말이야. 어차피 자네 생각은 이미 밝히지 않았나.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황녀님 몫이지.”
“…….”
리카르도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말해도 썩 내키진 않을 걸세. 본인이 찬 상대와 가까이 지내는 게 마음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 내가 이유를 더해 주지.”
“……이유요?”
“그래. 아까의 시험과는 다른 진짜 이유.”
리카르도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녀님을 곁에 두기만 한다면, 나와 1기사단원들은 자네 말을 그분의 명령 다음으로 여길 걸세.”
* * *
응접실 안을 연기가 가득 채운다. 리카르도는 멍하니 연초를 태우다, 그만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때쯤 되면 항상 따라오던 잔소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죽고 싶으면 혼자 죽으라든가, 창문이라도 열라든가 하는 잔소리.
금연 이후 다시 피우기 시작한 게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매번 담배를 태울 때마다 그때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그가 마력으로 연초를 날려 버리곤 창가로 다가갔다.
“그만 들어오게.”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자 한 명이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리카르도가 그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도 상당히 어색했겠군. 그 녀석이 중간중간 그쪽 방 힐끗거리던데.”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놈이더군요. 분명 가진 마력은 겨우 4급 수준인데, 어떻게 단원들도 눈치 못 채는 저희 위치를 아는 건지.”
“글쎄, 단순한 4급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
부단장, 클라우스의 물음에 리카르도가 창문을 열며 대답했다.
“황녀님 말씀대로라면 신체도 엄청난 수준으로 단련했다더군. 어쩌면 3급 기사까지 이길지도 모르는 일이지.”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격차라는 게 있는데.”
“딱히 불가능하다고 누가 정해 놓은 것도 아니지 않나.”
“보통 수백 년간 아무도 못 해낸 일은 불가능하다고들 얘기합니다.”
“보통 수백 년간 아무도 못 했던 걸 해내는 자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법일세.”
“……저 녀석이 그런 자란 말입니까?”
“이미 남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무려 제국 마지막 황녀님의 마음을 뺏은 자 아닌가.”
리카르도가 피식 웃으며 마당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겨우 집을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 한마디에 표정이 밝게 변한 황녀가 있었다.
“……솔직히 전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새 창가에 다가온 클라우스가 그 모습을 보고는 한숨 쉬듯 말했다.
“그냥 죽이는 편이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황녀님도 꽤 오랫동안 괴로워하시겠지만…… 결국 이겨 내실 겁니다.”
“자넨 사별한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잘도 내뱉는군.”
“죄송합니다. 할 말은 해야 할 거 같아서.”
클라우스가 전혀 미안하지 않은 기색으로 말했다. 리카르도가 어깨를 으쓱이며 품속에서 새 연초를 꺼내 물었다.
“내가 아까 말했던 극약처방 생각나나?”
“황녀님 내보내는 걸 비유할 때 말입니까?”
“맞네.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내리는 차악의 선택이지. 그 녀석을 죽이는 게 그와 같네. 만약 놈이 거기서 정말 황녀님을 이용하려 했다면 내가 먼저 나섰을 거야.”
클라우스가 리카르도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곳에는 숨기지 못한 미소가 떠 있었다. 그게 항상 입에 달고 사는 연초 때문은 아닐 거다.
“녀석이 꽤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황녀님 같은 분이 고백을 했는데 그걸 거절한다는 게 어디 쉬워 보이나? 심지어 본인이 직접 예물까지 들고 온다는데. 설사 마음이 없었더라도 동하는 게 사람일세. 진짜 황녀님을 위한 선택이라 생각하고 거절한 거야. 얼핏 단호해 보이지만, 그게 절대 냉정해서는 아니네. 저 나이에 볼 수 없는 성정이지.”
“그래도 결국 단장님이 한 제안에는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1기사단 2순위 명령권.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긴 하지요.”
“그건 그냥 내가 덧붙인 거야. 딱히 기뻐하는 거 같지도 않더군. 자네가 그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리카르도가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연기가 방 안에 차는 일 없이 창밖으로 날아간다.
“내 말에 설득돼서 황녀님을 곁에 두기로 한 거지, 명령권 때문이 아니란 거네. 그리고 사실 그건 기사단을 위해 내린 결정이기도 해.”
“……그게 어째서입니까?”
“자네, 집에는 가 봤나?”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클라우스는 처음으로 표정을 굳혔다.
“예. 부랑자 몇 놈이 자리 트고 있더군요. 대충 내쫓아 버리고 돌아왔습니다.”
“단원들은?”
“…….”
클라우스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1기사단원 가족의 대부분은 레이튼에 거주 중이었고, 레이튼은 전쟁의 직격탄을 가장 심하게 받은 도시다.
리카르도는 창가에 몸을 기댄 채 말을 이었다.
“우리야 딸린 식솔이 없어 그냥 집 잃는 정도로 끝났지, 단원 대다수는 이번에 가족을 잃었을 거야. 아마 세 왕국이라면 이를 갈고 있을 걸세.”
창밖엔 이제야 몸을 움직인 황녀가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그녀가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뒤돌아섰다.
“솔직히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 세 왕국 버러지 새끼들을 쳐 죽이고 싶은 마음이 지금도 굴뚝같거든. 하지만 나는 황녀님을 위해 참을 수 있네. 그런데 단원들은?”
“단원들도 참을 수 있을 겁니다. 제국을 위해 충성을 바친 자들 아닙니까.”
“자넨 사람 마음을 너무 쉽게 보는군.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그 충성을 바친 나라를 잃고, 평생을 함께한 가족을 빼앗긴 녀석들이야. 이런 와중에 기사의 맹세를 운운하며 남아 있길 바라는 건 멍청한 짓이지.”
“……설사 그렇다 쳐도, 그게 저 녀석에게 명령권을 준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리카르도는 말없이 의자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자리에 앉으며 툭 뱉었다.
“나는 그 녀석이 단원들을 묶어 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 주길 원하네.”
그 말에 클라우스가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 막 꼬마를 벗어난 녀석이 말입니까? 그냥 단장님이 하시지요.”
“나는 가족의 복수를 하겠다는 자들을 막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
리카르도가 피식 웃으며 연초를 태웠다.
클라우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한숨 쉬듯 얘기를 돌렸다.
“……그래도 굳이 그 녀석이어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여기 라이언 가문 생존자도 살고 있는 모양이던데.”
“오히려 저 녀석 말고 누가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겠나? 나이가 어려 흠이라 하였는데, 그 꼬마 갓 벗어난 놈이 이룬 성과를 보게.”
화르륵. 연초가 불타 사라진다.
“겨우 2년 만에 4급 기사가 되고, 그 와중에 상당히 큰 상회까지 일궜지. 아르곤과 여기 레이튼에서는 하루 종일 저 리안에 관한 이야기뿐이더군.”
“……대단한 녀석이라는 건 저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단원들 마음까지 붙들어 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리카르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라고 딱히 저 녀석이 무조건 성공할 거라 여기는 건 아니야. 그냥 여러 대책 중 하나라 생각하게.”
“……만약의 얘깁니다만, 혹시 그 대책들이 전부 실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세 왕국은 감당할 수 없는 복수귀들을 맞닥뜨리게 될 테고, 우리 단원들은 결국 덧없이 죽어 가게 되겠지.”
리카르도가 의자에 기대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니 적어도 한 가진 성공하길 바라자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