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72)
아침 공기가 쌀쌀하다. ‘초인’ 덕분에 추위를 탈 리 없는데도 그렇게 느꼈다.
환상통 같은 건가.
사지가 절단된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팔다리에서 통증을 느낀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것도 그것과 비슷한 현상일지 모른다. 머리가 추위를 기억하고 꾸며 내는 거지.
“일주일 동안 한 번도 집에 안 들어오더라.”
“바빴어. 상회 일이 많이 밀려서.”
어렵게 꺼낸 듯한 목소리에 덤덤히 대꾸했다.
추위 때문인지 살짝 달아오른 얼굴이 보인다. 무심코 외투를 벗어 주려 손이 움직였다가, 의식적으로 멈췄다.
그걸 놓치지 않았는지 타냐의 시선이 내 손에 머물렀다.
“……별로 추워서 그런 거 아닌데.”
“……그래.”
뻘쭘하게 손을 되돌렸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나는 타냐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고, 타냐는 본인이 불러 놓고도 무슨 얘길 꺼내야 할지 감을 못 잡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결국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는 사람 있어서. 게다가 1기사단장이면 아마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라 했던 거 같은데.”
“응…….”
“거기에 기사단원들도 있고. 그 사람들도 제국 최고 기사들로만 뽑은 거 아니야?”
“……아마 그럴 거야. 난 그때 어려서 잘 기억 안 나지만.”
“그럼 이제 안전은 걱정 없겠네. 한 삼 일 정돈 더 집에 있어도 돼. 갑자기 사람도 늘어났으니 내가 노블레스 쪽에 적당한 저택 없나 물어볼게.”
타냐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결국 나가란 소리네.”
“달라진 것도 없으니까.”
“달라진 게 왜 없어? 네 말대로 나한텐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 생겼는데.”
담담해 보이려 애쓰던 목소리에 초조함이 깃든다. 이번에는 무심코 위로의 말이 튀어나올 뻔해서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침묵이 어색해지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그게 뭐. 어차피 너 따르는 사람들이지 나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잖아. 괜히 숫자만 늘어나서 더 불편하기만 하지.”
“……말 돌리지 마. 다 알고 있으니까.”
“뭘.”
“갑자기 나가라고 한 이유. 내가 너 좋아한다 생각해서 떼어 놓으려는 거잖아. 아니야?”
“…….”
부정해야 하는데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저렇게 직설적으로 나올 줄 몰랐으니까.
타냐가 내 얼굴을 빤히 마주 봤다.
“맞아. 나 너 좋아해. 그게 뭐 잘못됐어? 오히려 너한테도 좋은 거 아니야?”
“……무슨 뜻이야?”
타냐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망설이는 건지 한참 뜸 들이더니, 마침내 결심한 것처럼 입을 연다. 나오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대충 좋아하는 척만 해 주면서 이용해 먹어도 되는 거잖아. 나 눈치 없는 편이니까 끝까지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르고…… 눈치채도 별로 신경 안 쓸지도 모르고…….”
“…….”
“……리카르도가 그랬어. 내가 원하면 뭐든 해 주겠다고. 제국 재건을 원하면 그리 해 주고 복수를 원하면 세 왕국도 공격해 주겠다 하더라.”
저 말이 허언처럼 들리지 않는다. 실제로 게임 내에선 복수에 미친 리카르도가 게릴라를 조직해 세 왕국을 거의 전복 직전까지 몰고 가니까.
이성을 반쯤 잃은 상황에서 그 정도다. 하물며 황녀라는 구심점이 있는 상태에서야…… 진짜 왕국 한두 개 정도 날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타냐는 넋두리처럼 말을 이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했어. 굳이 제국을 재건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복수도 이미 예전에 포기했으니까. 그래도, 혹시 네가 원하면…….”
“나도 필요 없어. 무슨 미친 소리야.”
“……너도 전쟁 때문에 부모님 잃은 거 아니었어?”
“난 원래 고아였어. 전쟁 때문에 잃은 게 아니라.”
살짝 한숨 쉬면서 저택 쪽을 가리켰다.
“일단 좀 쉬는 게 좋겠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것뿐이야.”
타냐가 망부석처럼 멈춘 채 중얼거렸다.
끝끝내 눈물이 흘러 바닥에 번진다.
나는 애써 거기서 시선을 돌렸다.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신분인 거 알잖아.”
“……그렇게 살 수도 있어. 우리끼리 아무도 없는 곳에 가면…….”
“내가 그렇게 살 생각이 없어. 그럴 이유도 없고.”
일부러 끊어 내듯 말했다. 고개 숙인 타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뭐 때문에 그러는데? 돈? 나도 충분히 벌 수 있어.”
“문.”
추상적인 말이지만 황녀라면 알아들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타냐가 놀란 듯 홱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아는 거야? 그건 황족들밖에 모르는 얘긴데…….”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어. 어딘가에는 구멍이 세지.”
“……문에 대해 알면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알 거 아니야. 어차피 뭘 하든 멸망을 피할 수 없다면, 그냥 나랑 같이…….”
“막을 수 있어.”
저택으로 몸을 돌렸다. 여기서 계속 이래 봤자 서로 힘만 들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리고 그러려면 세 왕국 힘이 필요하고. 내가 혹시 널 좋아하게 되더라도 맺어질 일은 없다는 뜻이야.”
“…….”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 찾아봐. 네가 또래 남자를 나밖에 본 적이 없어서 단순한 설렘을 사랑과 착각하는 거야. 몇 달만 떨어져 있어도 나 같은 건 금방 잊힐걸.”
대답은 없었다. 뒤돌아보고 싶은 걸 꾹 참고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아직 식당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일 없는 듯 다시 들어갈까 하다가 그냥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기에는 지금 너무 심란한 기분이라서.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처신한 것 같기도 하고, 인간 말종 쓰레기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이성보다는 감성 문제라 해야 하나.
다른 한편으론 오히려 잘된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한 번 정리하고 갈 문제기는 했으니까. 그냥 거리 두는 것보다는 이렇게 확실히 말해 두는 게 정 떼기 더 수월하겠지.
만약 내가 반대 입장이었다면 저주 부적이라도 써서 상대 방 안에 숨겨 놨을 거다. 어지간히 확실히 차였어야지. 이 정도면 호감이 원한으로 바뀌어도 이상할 거 없다.
……설마 진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일단 당분간은 조심하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도 있고.
내심 생각하면서 방문을 잡은 순간이었다.
―잠시 대화 좀 나눌 수 있겠나?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콘시가 쓰던 것과는 또 다르다. 그건 머리에 직접 때려 박는 감각이었다면, 이건 채널 틀린 라디오처럼 지지직거리는 느낌이다.
설정에 나오는 것 중에 비슷한 기술이 있다. 동방에서도 극히 일부만 사용할 수 있는 전음.
레이튼에서 이런 거 쓰는 인간이야 뻔하다.
코드를 둘러보고 응접실로 향했다.
“……설마 진짜로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직접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리카르도가 별종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화를 나누자 했지 위치는 가르쳐 주지 않았네. 기운도 숨겼고, 2급 기사라 해도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망설임도 없이 바로 오는군.”
“보잘것없는 재주가 하나 있다 해 두죠.”
리카르도가 피식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 보잘것없는 재주에 위치가 들통 난 나는 하찮은 인간인가?”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황녀님 말씀으론 그 보잘것없는 재주가 한두 개가 아니라던데.”
“보잘것없는 재주가 몇 개씩 돼 봐야 어디에 쓰겠습니까.”
“겸양이 과하군. 그 나이에 4급 기사 수준까지 오른 자가 말이야. 일단 앉겠나?”
리카르도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순순히 앉았다. 동시에 졸졸졸, 테이블에 놓여 있던 술잔이 채워진다.
“나도 딱 자네 나이쯤 4급 기사가 되긴 했지. 하지만 나는 걸음마 뗄 때부터 수련을 시작한 데다 가문의 지원도 넘치도록 받았네. 한데 자네는 2년 전에 처음 수련을 시작한 데다 이렇다 할 지원도 받은 적이 없다더군. 맞나?”
“수련한 지 2년이 된 것은 맞지만, 라이놀과 다린이 많이 도와줬습니다.”
“라이언 가문의 아이들 말이군. 동방에 가기 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네.”
리카르도가 잔에 담긴 양주를 들이켰다.
“이번 대 라이언가 가주는 주화입마라도 들었는지 영 제정신이 아니었지. 라이언 가문에 마법사가 태어날 리 없다며 지 자식더러 마녀라 하질 않나……. 그 오라비와 함께 집을 나갔다 들었을 때는 가엽게 여겼는데, 오히려 그 덕에 전쟁에서 살아남을 줄 누가 알았을까.”
나도 앞에 놓인 양주를 들이켰다.
알고 있던 일이지만, 설정이랍시고 세 줄 덜렁 쓰인 걸 읽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직접 듣는 건 그 느낌이 달랐다.
“아무튼, 그것 말고도 벌인 미친 짓이 워낙 많아 나열하기 힘들 정도야. 사실 전쟁이 아니었어도 이번 대에 망했을 가문이지. 그런 지원 좀 받았다고 큰 도움이 됐을 것 같지는 않네.”
“…….”
“굉장한 재능이군. 나조차 믿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2년 만에 4급 기사에 도달하는 건 단순히 소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힘에 대한 갈망도 상당하지 않나?”
“본론이 뭡니까?”
들고 있던 잔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내려놨다.
게임에서 리카르도와 1기사단원들은 NPC보다는 몬스터에 가까운 존재였다.
일명 복수귀(復讐鬼)들.
제국 멸망의 책임을 묻겠다며 수만 명을 죽인 녀석들이란 말이다.
여긴 타냐가 살아 있으니 거기까지 가진 않겠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혹시 제대로 지원해 줄 테니 재건에 한 발 보태라, 이런 거라면 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자네와 황녀님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네.”
리카르도가 다시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서요? 타냐한테 제국 재건하자고 꼬드기기라도 하라는 겁니까?”
“반댈세. 나는 황녀님이 모두 잊고 평화로이 지내셨으면 좋겠어.”
이번에는 예상 못 했던 말이라 순간 대꾸하지 못했다.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분일세. 행복해져야만 하는 분이고.”
“그런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들은 내 손에 닿는 자들이 아니지. 나는 황녀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야. 그러니 내가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황녀님밖에 없네.”
리카르도가 태연히 양주를 들이켰다.
“‘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게 맡기고 황녀님과 떠날 생각 없나?”
“……저는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 말하는 거군. 그런 건 붙어 있으면 절로 생기는 법이야. 그럼에도 이유가 필요하다면 내가 더해 주지.”
리카르도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안에 엄청난 양의 마력이 모인다.
……아니, 저건 엄청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저걸 방출하는 것만으로 레이튼의 절반이 날아갈 것이다. 그 정도의 에너지였다.
“내가 가진 마력의 절반일세. 황녀님과 떠나겠다 하면 바로 자네에게 넘겨주지. 대부분은 허공에 흩어지겠지만, 그중 극히 일부만 흡수해도 2급 기사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야.”
리카르도의 손에 담긴 마력이 그 앞에 놓인 빈 잔으로 옮겨 갔다. 작은 글라스 안에 푸른빛 파도가 넘실거린다.
레이튼 절반을 파괴할 수 있는 유리컵의 탄생이다.
내게 그 핵폭탄을 건넨 리카르도가 다른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그는 양주가 든 글라스를 들어 올리곤,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뭐 하나? 얼른 마시지 않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