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71)
“……차원 폭풍이 뭐예요?”
“용혈(龍穴)을 말하는 거겠지.”
대답은 미르가 했다. 나는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차원 폭풍 혹은 용혈. 서쪽과 동쪽 모두 말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뜻하는 바는 같았다. 대사막에 50년 주기로 생겨나는 이계의 틈새. 그걸 의미하는 것이다.
서율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용혈이 열렸던 건 겨우 30년 전이잖아요? 아직 20년은 남았을 텐데. 뭐 잘못 안 거 아니에요?”
“꽤 신뢰할 만한 정보예요. 아마 90프로 확률로 맞을걸요.”
“……그치만 저희 대사막 건너온 게 겨우 일주일 전인데.”
서율이 반신반의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아니, 반신도 아닌가. 그냥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 장단 맞춰 준다는 느낌이다.
이해는 간다. 50년 주기는 여태까지 한 번도 틀린 적 없는 데다, 서율 말대로 그들이 대사막 건너온 건 바로 얼마 전일 테니까. 그 사이에 대뜸 차원 폭풍이 열렸다고 해 봐야 믿어 줄 사람이 누가 있겠나.
하지만 나는 사실 90프로가 아니라 100프로 확신했다. 설정에 나오는 일이기도 하고, 여기 오기 직전 노블레스 정보망을 통해 확인도 끝냈기 때문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닷새 정도 전에 생겼을 거라 추측하고 있어요. 아르곤에선 이미 사막 출입을 제한하고 있고요.”
“……닷새 전이면 저희 넘어오고 겨우 이틀 뒨데…….”
“맞아요.”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 해야 할지 모르겠네.
리카르도가 포함된 일행이니 차원 폭풍 만났다고 죽지야 않겠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꼴로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다. 일행 중 일부는 팔다리 한 짝씩 헌납해야 했겠지. 그리고 그랬을 확률이 제일 높은 건 그중에서 가장 약한 저 둘이다.
“지금 당장 믿으라고는 안 할게요. 직접 가서 확인해 보셔도 되고.”
“……사형, 어쩔까요?”
미르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어쩌긴 뭘 어째. 여기서 살아야지.”
“그게 아니라요! 확인하러 안 가냐고요!”
“굳이? 쟤 말이 맞는 거 같은데.”
“……이 인간 진짜 말 쉽게 하는 것 봐.”
“그런 건 속으로만 말해 사매.”
“들으라고 한 거거든요.”
서율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일단 확인부터 해 보고요. 만약 진짜면…… 그때 생각해 보죠 뭐.”
“진짜 대강대강 산다니까.”
“사형은 좀 닥쳐요, 제발.”
서율이 기운을 다 쓴 듯 식탁에 엎드렸다.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 같아서 막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 머물 곳은 있어요?”
“……아뇨. 그동안 거의 노숙으로 때웠는데.”
서율이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대사막은 말할 것도 없고 아르곤도 적지나 마찬가지니 도시 안에서 지낸 적이 손에 꼽을 거다.
나는 짐짓 선심 쓰는 것처럼 말했다.
“그럼 당분간 여기 머무셔도 괜찮아요.”
“……진짜요?”
“방이 많이 남거든요. 싫으시면 괜찮은 숙소 소개시켜드리고.”
“아뇨! 완전 좋아요!”
서율이 식탁에 묻고 있던 머리를 재빨리 들어 올렸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혔다.
“사실 여기서 쓰는 돈도 없어서…… 기사님들도 동쪽에서 지낸 지 오래라 없다 하시고…….”
“그거 진짜 고생이었겠네요.”
“정말요. 서쪽 여행도 나름 기대했는데, 매일 노숙에 멧돼지 같은 거 잡아먹고…….”
“저런.”
“게다가 레이튼까진 어떻게 왔는지 알아요? 대체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불평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들어줬다. 쌓인 게 많았나 보다. 동방이 얼마나 개판인지부터 시작해서 레이튼에 도착한 이야기까지 끝났을 때쯤. 이번에도 막 생각난 것처럼 툭 내뱉었다.
“동쪽이든 서쪽이든 돈 없으면 고생하는 건 똑같죠. 괜찮은 일자리 있는데 혹시 관심 있어요?”
“일자리요?”
서율이 망설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있으면 좋긴 한데, 저희가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입장이라…….”
“차원 폭풍 확인하고 나서 정해도 괜찮아요.”
“……무슨 일인데요?”
걸렸다.
“별건 아니고 제가 조만간 사업 확장할 생각이거든요. 거기 두 분도 들어오면 좋을 거 같아서.”
“……혹시 국가 분쟁 관련된 거면 저흰 못 도와줘요.”
무슨 생각인지 알겠다. 제국 복원, 대륙 전쟁 뭐 이런 거 상상하고 있겠지.
“그런 거 아니에요. 혹시나 다른 왕국이랑 분쟁 생겨도 둘이 연관될 일은 없을 거고.”
“음…….”
“그냥 고려만 해 두세요. 지금 당장 정하라는 거 아니니까.”
서율이 옆을 슬쩍 흘겨봤다. 그곳엔 미르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 기지개를 켜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사형이랑 상의 좀 해 보고요.”
“그러세요. 절대 부담 갖지 마시고. 오랫동안 노숙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제가 방 안내해 드릴게요.”
자본주의 미소를 지으며 저택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방으로 안내했다. 굉장히 부담 가진 얼굴의 서율을 배웅하고 돌아오자, 식당엔 라이놀만 남아 있는 채였다.
“……너는 가끔 보면 뱀 같아.”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찬장에서 육포를 꺼내 씹어 먹었다. 라이놀이 종이 한 장을 건네 왔다. 나가기 전 식탁에 올려 둔 계약서다.
“미르 경한테는 얘기도 안 꺼냈으면서 싸인할 거라곤 어떻게 안 거야?”
“그 사람은 직감이 좋거든요. 계약 안 하면 더 귀찮아질 거란 걸 눈치챌 거라 생각했죠.”
“……누구 직감이 좋다는 건지 모르겠다.”
라이놀이 기가 차다는 듯 한숨 쉬었다. 나는 찬장을 닫고 그 맞은편에 가 앉았다.
“저 계약서 두 장 놓고 갔는데.”
“……두 개만 묻자. 너 타냐가 황녀란 거 이미 알고 있었어?”
“네.”
조금 뜸 들일까 하다가 그냥 즉답했다. 이제 와 서로 체면 차릴 사이도 아니고.
“언제부터?”
“2년 전이요. 걔 저희 집 오고 얼마 안 됐을 때 직접 얘기해 줬어요. 숨겨서 죄송해요.”
“그건 됐어. 네가 밝힐 만한 일도 아니고. 그보다 하나만 더 묻자.”
라이놀이 살짝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네가 차린다는 거, 혹시 제국 재건과 관련 있어?”
서율이 했던 것과 같은 걱정이다.
“아까 말했던 건 알지만, 확실히 하고 싶어서 그래. 중요한 문제니까.”
“대답은 같아요. 저는 제국 재건이나 왕국이랑 싸우는 데 관심 없어요.”
라이놀은 한동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안심한 듯 의자에 축 늘어졌다.
“다행이다. 솔직히 나도 제국 재건 반대라.”
“…….”
“제국을 싫어한 건 아니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태어난 조국이기도 하고. 남들이 악의 제국이니 뭐니 해도 솔직히 내가 보기엔 나쁜 점만 있는 것 같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왜요?”
이번엔 내가 답을 알면서 물었다. 나도 내가 맞는지 확신이 안 서서.
라이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뻔하잖아. 제국 재건한다고 하면 다시 전쟁이야. 또 수십만 명이 의미 없이 죽겠지.”
“…….”
“그런데 방에 박혀서 부적만 쓰던 애가 갑자기 제국의 황녀라지 않나, 실종된 줄 알았던 1기사단이 뜬금없이 나타나지 않나, 그런 와중에 너는 뭐 만들 거라며 대뜸 계약서에 싸인하라고 하잖아. 이러니 아무리 나라도 의심이 안 생길 수가 있나.”
“……그러면서 싸인은 미리 해 뒀네요.”
아까 건네받은 종이를 흔들었다. 당연히 미르 거라 생각했는데, 계약서에 적혀 있는 건 다른 이름이었다.
라이놀이 피식 웃으며 종이를 한 장 더 건네 왔다.
“착각하고 잘못 줬나 봐. 미르 경 건 줄 알았는데.”
“…….”
“다린한테는 나중에 얘기해. 지금 황녀한테 반말했던 죄로 사형당하는 거 아니냐고 난리더라. 당분간 박혀 있을 생각 같던데.”
“……그럴게요.”
라이놀이 떠나고 혼자 남은 식당에서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에서 숫자들이 떠오른다.
네임드를 뜻하는 고유 코드도 보이고, 이름 없이 단순한 직업만 나타내는 범용 코드도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진 명확했다. 바로 어느 코드든 선명히 자기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따라 저 숫자들이 별자리처럼 보인다. 땅 위에 내려앉은 별자리.
“…….”
오늘 밤은 왠지 잠들기 힘들 것 같다. 응접실 입구를 한 번 슬쩍 보고 검을 챙겨 훈련장으로 향했다.
* * *
밤샘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곳은 다시 식당이었다. 오늘은 다 같이 식사하기로 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새로 온 사람이 많아서 그런 거 같은데, 누구 아이디어인지는 몰라도 배려심이 깊다. 나는 이런 거 생각도 못 해 봤으니까.
“부족하면 말씀해 주세요. 얼마든지 더 있으니까.”
식탁에 놓인 접시를 내려다봤다.
……뭐지? 개밥인가?
마침 들어오던 미르가 음식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 버러지는.”
“저희 엄마가 한 건데요.”
“이 입이 절로 벌어지는 음식 뭐냐고. 서쪽의 요리도 무시할 게 못 되는걸.”
미르가 태연하게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릴리가 그 모습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있는 재료로 할 수 있는 게 몇 가지 없더라고요. 보기엔 좀 그래도 맛은 보장할 수 있어요.”
그 말에 반신반의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시작부터 문제가 생겼다.
……이건 찍어 먹어야 하는 건가 떠먹어야 하는 건가?
찍어 먹자니 국물이 너무 많고 떠먹자니 건더기가 너무 많다.
아무리 찾아도 젓가락이나 포크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떠먹으란 소리겠지.
사약 먹는 죄인의 심정으로 한 숟갈 퍼 입에 넣었다.
“……맛있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저 멀리 미르가 숟가락을 들고 충격 먹은 얼굴로 굳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맛있지?”
“맛은 보장한다고 했잖아요.”
릴리가 쑥스러운 듯 살짝 웃었다.
“제 고향에서 먹을 거 없을 때 자주 해 먹는 음식이에요. 원래는 엄청나게 맛없는 건데, 제가 재료 몇 개 좀 추가해 봤죠.”
“……솔직히 대단한데. 궁에 있는 숙수(熟手)들도 이런 생김새에 이런 맛은 못 낼 거야.”
“숙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해요.”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려는 찰나. 서율이 다크서클 짙게 내려온 눈을 하고 들어왔다.
“사매. 어째 노숙할 때보다 심각해 보이네.”
“……천장엔 무슨 보석 박힌 등이 붙어 있고 벽에는 뭔지 모를 그림이 그려져 있고…… 아무튼 부담스러워서 별로 못 잤어요. ……근데 저건 뭐예요?”
서율이 식탁을 가리켰다.
“서쪽에선 개랑 겸상도 해요?”
“일단 먹어 봐.”
미르의 재촉에 서율이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사약 먹는 죄인의 얼굴로 한 숟가락 푸더니, 눈을 딱 감고 꿀꺽 삼킨다.
“……뭐야. 이거 왜 맛있어.”
“거봐. 일단 먹어 보라니까.”
서율은 대꾸도 없이 숟가락을 들고 음식을 퍼먹기 시작했다. 릴리가 그걸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요리사 누구로 할지 정해진 거 같은데.
청소는 다린이 만든 그 요상한 마도구가 하지만, 요리해 주는 물건은 없어서 각자 알아서 해 먹던 실정이었다. 그런데 이 정도 솜씨면 음식점을 차려도 손색이 없겠다.
어느새 비어 버린 접시를 보며 입술을 핥았다. 나도 더 먹어야지. 손을 들어 리필하려는 순간.
“리안.”
부르는 소리에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타냐가 똑바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얘기 좀 해.”
여태까지의 주눅 든 목소리가 아니라, 확실한 힘이 들어간 뚜렷한 목소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