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70)
“……리카르도?”
타냐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카르도는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 접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살아 있었어?”
“그 누가 제 목숨을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폐하의 비밀 명령이라지만 말도 없이 떠났던 점, 다시 한 번 사죄드리겠습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쿵!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든 기사들이 타냐를 향해 무릎 꿇었다. 리카르도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 번 황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찌 저리 수척해지셨을까…….’
제대로 잠들지 못한 듯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하고 뺨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훌쭉하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처음 봤을 때만 해도 황녀는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지. 이런 허름한 곳에서 십 년 가까이 사셨을 테니.’
서민의 거주지치곤 호화롭지만, 황녀의 거주지라기엔 지나치게 초라하다. 리카르도는 감히 이런 곳에 황족을 모신 신하에게도 책임을 물으리라 다짐했다.
“이제 제가 돌아왔으니 앞으론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 왕국 지도자의 목을 따 오라 명하시면 일 년 내로 대령할 것이고, 제국의 재건을 명하시면 십 년 내로 그리 만들 것입니다.”
“……나는…….”
열리던 입이 황급히 닫히고 시선이 한쪽으로 향한다. 그 눈동자에는 당황과 두려움의 기색이 역력하다. 리카르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방향을 바라봤다.
‘……누구지?’
황녀님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대의 소년…… 아니,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황궁에 있을 때는 본 적 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한 가진 확실했다.
황녀가 저 남자를 보고 한순간이지만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
그것만으로 배제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스르륵. 그의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황녀님?”
하지만 그 팔은 중간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옷소매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손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냐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아는 사람이야.”
“……알겠습니다.”
검을 집어넣으면서도 리카르도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아는 자이기에 그런 감정이 흘러나온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어느덧 금발의 남자가 지척까지 도달했다.
“몇 번 얘기 들었습니다. 1기사단장 리카르도 경이 맞으신지요?”
“맞네. 자네는 누군가?”
“리안이라고 합니다. 잠시지만 타냐…… 황녀님을 보필하고 있던 입장이지요.”
리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리카르도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흘겨봤다.
“하급 귀족의 자식인가? 아무리 그래도 이런 허름한 저택은 황녀님 심신에 좋지 않다는 걸 모르겠나?”
“거기에는 정정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일단 저는 귀족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현재 거처는 2년 전 얻은 것으로, 황녀님이 거주하시기 충분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게 2년 전 구입한 저택이라면 그전에는 대체 어디서 거주하셨을지 상상도 안 가는군.”
리안이 타냐를 한 번 힐끗거렸다.
“황녀님께서는 불과 2년 전까지 길바닥에서 생활하셨습니다.”
“……농담이 과하구나. 어디 황족을 상대로…….”
“저 말대로야.”
“……황녀님?”
리카르도의 시선이 닿자 타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2년 전까지 길바닥에서 산 거 맞다고. 보필하는 신하도 없었어.”
“……대체 어쩌다 그런 일이. 제국이 그렇게까지 무력하게 당했단 말입니까?”
“그건 나도 잘 몰라. 아무튼, 나를 구한 건 적군 중 하나였고, 그 사람도 얼마 안 지나서 말없이 떠났어.”
“…….”
리카르도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사태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설마 황족 하나 보살필 여력조차 없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제국의 저력은 누구보다 그가 제일 잘 안다. 아무리 제 1기사단이 빠졌다고는 하나 세 왕국에게 무참히 짓밟힐 나라가 아니란 말이다.
‘……폐하의 뜻인가.’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 연유는 모르겠지만, 역대 제국의 황제들은 보통 인간들이 이해하지 못할 기행들을 자주 벌이곤 했다.
이번에는 그 스케일이 너무 크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갑자기 1기사단 전원을 동방으로 보낸 것도 이상했다.
‘……제국을 내주고, 목숨을 내주고, 자식을 내줘야 하는 일이 대체 뭐가 있단 말입니까?’
그로서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리카르도가 침통한 심정을 억누르며 리안을 노려봤다.
“그럼 네놈은 대체 누구란 말이냐. 방계 중에 너 같은 녀석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다.”
“리카르도.”
힘없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리카르도가 타냐에게 고개를 숙였다.
“예, 황녀님.”
“내 은인이야. 예의를 갖춰.”
“……예?”
타냐는 옷소매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리카르도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길바닥에 있던 날 건져 준 은인이란 말이야. 적어도 최소한의 예의는 보여 줘. 리안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진작 죽었을 거야.”
“……죄송합니다.”
리카르도가 타냐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허락을 청한 뒤 일어난 그가 리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경황없는 일이 쌓여 자제력을 잃은 모양이야.”
“이해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황녀님과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 양해를 구해도 괜찮겠는가?”
리안이 주위를 둘러봤다.
마당에 무릎 꿇은 채인 기사들. 담장 너머에서 엿보고 있는 동방인들. 대체 무슨 일인지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식구들.
확실히 이야기 나누기 좋은 환경은 아니다.
리안은 작게 한숨 쉬고 입을 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응접실이라면 대화 나누기 적당할 겁니다.”
* * *
기사들을 안내하고 복도로 나왔다. 어느덧 달빛이 슬쩍 몸을 내민 초저녁. 가까이 붙어 있는 식당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라이언이 사자라는 뜻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서율의 물음에 라이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하는 심법 이름은 사자 심법이고요.”
“네.”
“……사용하는 검법 이름은 사자 검법이고요.”
“맞습니다.”
서율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사자 가문의 사자 심법에 사자 검법을 쓴다는 거네요?”
“그렇죠.”
“와, 이름 진짜 대충 짓…….”
“마음에 드네.”
미르가 대화 중간에 끼어들었다.
“내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동방인은 오늘 처음 봐서.”
“미르. 용이라는 뜻이야. 서쪽의 드래곤이라는 것과 비슷한 생물이지. 용 쪽이 훨씬 멋있긴 하지만.”
미르가 허리춤에 있던 검을 풀러 식탁 위에 올렸다. 별자리와 용의 형상이 새겨진 아름다운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사진참사검(四辰斬邪劍)이라고 해. 용의 해, 용의 월, 용의 날, 용의 시간에 최고의 장인이 평생 단 한 번만 만들 수 있는 최강의 검이지. 어때, 끝내주지 않아?”
라이놀이 눈을 빛냈다.
“정말이군요. 생김새는 물론이고 의미까지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이런 서쪽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네. 그쪽이야말로 대단한걸. 설마 가문 이름까지 통일시켜 버릴 줄이야. 아무리 나라도 상상 못 한 방식이야.”
“선조가 정해 둔 이름일 뿐입니다. 제 능력으로 이룬 것도 아니죠. 오히려 미르 경이 대단하지요. 이름이든 검이든 본인이 직접 얻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너무 겸양 떠는 것도 미덕이 아니야. 더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미르가 검을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나도 그 정신을 본받아서 성을 미르로 정해야겠어. 합쳐서 미르미르, 즉 용용이 되는 거지. 어때?”
영영 죽여 버리고 싶네.
서율이 양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쩌다 사형 같은 인간이 둘씩이나…… 여기 정상적인 사람은 없는 건가?”
“여기요.”
말하면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놀과 서율이 움찔거리고, 미르는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히 자리에 앉았다.
“동방에서 오신 분들이죠? 처음 뵙겠습니다. 리안이라고 해요.”
“리안이라……. 리안 상회 주인 맞지? 그쪽도 이름 직관적으로 짓는 데 일가견이 있네. 어때? 개명해서 리안 상회의 리안리안이 되는 건.”
……이렇게 같은 취급을 받을 줄이야.
귀찮다고 대충 작명했던 과거의 나를 줘패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는 거기서 빼 주시죠. 낄 생각 없으니까.”
“안타깝네. 언제든 생각 바뀌면 얘기해. 이름 멋진 걸로 지어 줄 테니까. ……잠깐.”
미르가 턱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고민하는 자세를 취했다.
“미리내…… 그래. 미리내 미르는 어때? 용천이란 뜻인데, 합치면 용천용이 되는 거지.”
“……사형 제발 입 좀 다물어요.”
서율의 손은 이제 이마뿐 아니라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뭐가 어때서? 멋진 이름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사형 혼자뿐이라고요. 제발 자중하세요…….”
“용천용. 저도 나쁘지 않다 생각합니다.”
“댁도 좀 빠져…….”
서율은 거의 식탁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헛기침을 해 주의를 집중시켰다.
“방금 말했지만, 리안이라고 해요. 저는 아직 소개 못 들은 거 같은데.”
“……미안해요. 서율이에요. 앞에 성 없이 그냥 서율.”
힘겹게 고개를 든 서율이 내 쪽을 바라봤다.
“아, 여기 사람들은 성 없는 게 보통이랬죠? 동방에선 드문 경우다 보니 소개할 때 습관이 배서……. 아무튼, 그냥 서유리라고 불러도 돼요. 여기 말론 발음하기 힘든 거 같더라고요.”
“서쪽에 잘 오셨습니다, 서율 경.”
서율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 여기서 제 이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동방에 10년 가까이 머문 기사들도 잘 못 하던데.”
“동방의 문화에 꽤 관심이 있는 편이라서요. 집에 부적술 쓰는 애가 하나 있기도 하고.”
“……부적술이요? 그거 동방에서도 쓰는 사람 드문 건데.”
어깨를 으쓱였다. 실제로 자료가 워낙 적어서 찾느라 고생 꽤나 하긴 했다. 설정 외워 둔 걸로 커버치는 것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덕분에 동쪽 발음에 능숙해졌으니 잘된 일이죠.”
“진짜 눈 감고 들으면 동방인인 줄 알겠네. 내 소개는 안 해도 되지? 이미 들었을 거 아니야.”
“예, 미르 경. 서쪽에 온 걸 환영합니다.”
대충 소개가 끝나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때웠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슬쩍 본론을 꺼냈다.
“두 분은 동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죠?”
“음…… 뭐, 바로는 아니지만요. 제국이랑 친교 맺으러 온 건데 망해 버렸으니 할 일도 없고……. 사형, 저희 언제 돌아가요?”
서율이 불쑥 물었다. 심드렁히 앉아 있던 미르가 하품하며 답했다.
“글쎄. 10년?”
“농담하지 말고요. 진짜 문주님한테 이를 거예요.”
“나도 몰라. 근데 왠지 10년 내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냥 움직이기 싫어서 그러는 거면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며 내심 감탄을 터뜨렸다. 직감이 뛰어나다는 설정은 있었지만, 저건 거의 예언 수준 아닌가? 어떻게 ‘그 일’ 터진 것도 모르면서 기간까지 때려 맞추지?
놀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대화가 정리되길 기다렸다. 둘이 한 달 후 돌아가자고 합의할 때쯤. 내가 슬쩍 끼어들었다.
“어쩌면 미르 경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그쪽까지 왜 그래요?”
서율이 믿고 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기대에 보답해 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이건 이미 벌어진 일이고 내가 어찌해 줄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대사막엔 차원 폭풍이 몰아치는 중이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