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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69화 (69/225)

너의 코드가 보여 (69)

레이튼에 돌아오고 일주일. 밀렸던 상회 일도 처리했고, 지루한 서류 작업도 끝났다. 덕분에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휭!

“거기서는 옆구리를 훨씬 더 꺾어도 괜찮을 거 같아요. 위력이 두 배는 올라갈걸요.”

“교본에는 이것보다 더 비틀면 다음 동작으로 전환할 수 없다고 나오던데.”

“그건 일반인 기준이고요. 형은 몸이 사실상 오우거잖아요. 맞춤형으로 가야죠.”

“…….”

카일의 재능이야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얼마 전에 처음 검 들어 본 녀석 말을 믿어야 하나? 이 검법도 명문가였던 라이언 가문에서 꽤 상급으로 분류되던 건데.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옆구리를 꺾어 봤다.

휘이잉!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바람 소리가 거세다. 다음 동작으로 전환하는 것도 원래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매끄럽다.

음. 앞으로는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하자.

같은 자세를 몇 번 반복해 보는데, 카일이 무심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키워 준다고 했던 거 같은데 왜 반대가 된 기분이죠.”

“서로 부족한 부분 채워 주는 거지. 난 딱 좋은 스승 소개시켜 줬잖아.”

라이놀과 다린을 말하는 거다. 한쪽은 심법, 검술 담당. 한쪽은 마법 담당.

사실 직접 가르쳐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얘한테 알려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심법은 혼원공을 사용해서 카일의 몸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마법은 내가 배운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검술은…… 그만 얘기하자.

아무튼, 그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영약을 지원해 주고 있긴 하다. 이제 내 몸이 그거 좀 챙겨 먹는다고 성장할 단계는 지났기도 하고. 재고 떨이라 하면 듣기 거북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자세에 집중하는데, 얌전히 지켜보던 카일이 툭 내뱉듯 물었다.

“안 가 봐도 돼요?”

“뭐가.”

“그 누나 오늘 나가려는 거 같던데.”

“…….”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사실상 내가 쫓아내는 꼴인데 왜.”

“그러니까 더 가 봐야죠. 그쪽이 정을 떼게 만들려는 건지, 형이 정을 떼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한집에서도 피하던 사인데 이렇게 나가면 앞으로 만날 일이 있겠어요?”

“너 오늘따라 말이 많다? 그리고 그런 얘긴 대체 누가 해 주는 거냐? 어디서 별 시답잖은 소리만 듣고 와서는.”

“엄마가 말해 줬어요.”

“얼핏 시답잖은 것 같지만 깊이 음미해 보면 한 줄기 연륜이 묻어나는 현명한 충고네. 곁에서 많이 배워 둬라.”

애써 대답을 회피하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카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진짜 안 가겠다고요?”

“어. 안가.”

“그럼 그러시든가요. 훈련 열심히 하세요. 저는 그만 가 볼 테니까.”

“가긴 어딜 가? 내 동작 잡아 줘야지.”

카일이 바닥에 있던 검을 챙기며 답했다.

“저라도 마중 나가야죠.”

“……네가? 왜? 그때 말곤 본 적도 없잖아.”

“형이 그 누나 쫓아냈다는 거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잖아요. 본인도 입 다문 거 같고. 혼자 떠나면 서러우니까 우리라도 마중 나가자고 엄마가 그랬어요.”

“…….”

분명 탓하는 어투가 아닌데 탓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럼 다녀오든가.”

“갔다가 안 돌아올 거예요. 라이놀 경이 심법 가르쳐 준다 했거든요. 그냥 같이 가시죠? 여기 혼자 남아 봐야 헛스윙이나 하고 있을 텐데.”

“그런 거 안 통한…….”

말을 멈추고 도시 입구 쪽을 바라봤다.

……어떻게 벌써 왔지? 설정대로면 레이튼 도착까지 아직 한 달은 남았을 텐데.

이마를 짚으며 허리춤에 검을 갈무리했다.

“나도 가긴 가야겠다.”

“결국 그럴 거면서 왜 튕긴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대답하며 다시 입구 쪽을 바라봤다.

[NPC-1-56-4]

[NPC-1-347-3]

[NPC-2-268-3]

수십 명의 기사들과 나란히 붙어 오는 세 개의 코드. 각각 제국 1기사단장 리카르도, 동방의 마지막 용 미르, 동방의 마지막 봉황 서율. 그 셋을 뜻하는 코드였다.

* * *

“……봐요. 저희 망한 거 같다 했잖아요.”

서율이 굳은 얼굴로 걸어가는 리카르도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아르곤이라는 나라에 도착하고 제국이 정말 멸망했다는 소식을 확인한 이후부터 계속 저런 표정이다.

“……호위, 붙여 달라고 하긴 해야겠죠? 지금은 좀 그렇고…… 나중에.”

“돌아가기 귀찮은데. 그냥 여기서 사는 건 어때?”

심드렁히 나온 대꾸에 서율이 기겁했다.

“진짜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 아니죠? 돌아가면 문주님한테 다 말할 거야.”

“혼자 돌아갈 자신 있으면 그래 보든가.”

“내가 뭐 고자질쟁이도 아니고 왜 그러겠어요? 서방에 올 수 있는 일이 흔한 것도 아닌데 좀 쉬었다 갈 수도 있는 거죠, 뭐.”

서율이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게으름뱅이.’

농담처럼 넘기려 했지만, 저게 사형의 진심이라는 건 누구보다 서율이 제일 잘 알았다. 진짜 귀찮다는 이유로 여기 남을 수도 있는 인간이다 저건.

문파의 장로들도 끝내 고치지 못한 천성.

그런 걸 이제 와 그녀가 바꿀 수 있을 리 없다.

‘차라리 대사형이랑 올걸…….’

고지식하긴 해도 성실했던 그 모습이 오늘따라 그리웠다. 정작 문파에 있을 땐 만날 재미없다고 놀렸는데.

하지만 사실 누구랑 같이 오는지는 애초에 선택의 문제조차 아니었다. 서쪽에 온 건 문주님의 일방적인 통보일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진짜 여기 박히지는 않을 거야.’

한없이 게으른 인간이지만, 책임감까지 부재해 버린 건 아니다. 일단 통솔 담당인 이상 어떻게든 돌려보내 주긴 하겠지.

‘혼자 왔으면 진짜 안 돌아갔을 거 같은데.’

설마 그거 때문에 날 붙인 건 아니겠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서율이 몸을 떨었다.

“저긴가 본데.”

웬일로 먼저 입을 연 사형 목소리에 서율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레이튼. 제국 수도였다는 곳.”

그제야 서율이 정면을 바라봤다. 높고 광활한 성벽. 확실히 그렇게 제국, 제국 거리던 게 이해 갈 정도로 웅장해 보이긴 한다.

문제는 군데군데 폭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는 거지만.

‘진짜 개같이 멸망했네.’

서율이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굳이 이렇게 서둘러 올 필요가 있었을까요?”

“무슨 뜻이야?”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어차피 제국은 이미 무너진 상태잖아요. 수도가 중요하다고는 해도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일단 정보 수집이 먼저 아닌가 해서요. 지금까지 본 리카르도 경 성격이면 그랬을 거 같은데.”

실제로 제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리카르도의 이성은 비교적 멀쩡했다. 당장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려 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갑자기 정신을 놓은 것 마냥 레이튼으로 향하는 것 아니겠나.

거기에는 그녀의 사형, 미르가 심드렁히 답했다.

“아르곤 기사 갑옷에서 뭔가 본 거 같던데.”

“갑옷이요?”

“무기일 수도 있고. 시커멓던 거 있잖아.”

“아.”

서방은 뭐 저리 거추장스러운 걸 입고 싸우나 속으로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조금 멋있긴 했지만.

“근데 그게 왜요?”

“그건 나도 모르지. 적어도 그거 본 이후에 리카르도 경 안색이 바뀌긴 했어.”

조금 놀랐다. 세상만사 관심이라곤 일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건 또 언제 그리 세심히 살폈어요?”

“대충 봐도 보여. 사매가 너무 대강대강 사는 거지.”

“…….”

서율이 속으로 분노를 삼켰다.

저 인간에게 대강대강 산다는 말을 듣는 건 억울했지만, 그녀가 못 본 걸 봤다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문제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기도 했다.

“전원.”

도시에 들어선 리카르도가 조용히 읊조렸다.

“5분 주겠다. 리안 상회란 곳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건 모조리 알아 와라. 본부가 어딘지부터 그 주인이 사는 곳이 어딘지 까지 전부.”

“예!”

순식간에 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울 수 있는 명령인데, 미리 언질이라도 받았던 양 신속하기 그지없다.

서율이 힐끔 사형을 바라봤다.

“리안 상회가 뭐 하는 곳이길래 갑자기 저러는 걸까요?”

“아까 말했던 갑옷 파는 곳.”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아르곤 사방에서 거기 얘기뿐이었으니까.”

“……근데 난 왜 못 들었죠?”

“대강대강 사니까.”

“잘났어, 정말.”

심통이 난 서율이 바닥을 발로 찼다. 마침 근처에 있던 쓰레기가 그 풍압에 공중으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그것도 잠시. 골목에서 원통형의 무언가 날아와 그걸 집어삼켜 버렸다.

서율은 황당한 얼굴로 그 요상하게 생긴 물건을 바라봤다.

“……저건 또 뭐야.”

뭔지 모를 그것은 쓰레기를 집어삼키는 순간 착지하더니 띠리링 소리를 냈다. 하얀색 몸체 중앙에는 방긋 웃는 눈과 입이 그려져 있다. 조금 귀엽다.

“……사형. 저게 뭔지도 알아요?”

“몰라. 쓰레기 치우는 도군가 보지.”

“아니, 대충 넘기지 말고요! 저거 지금 사람도 없이 혼자 움직이잖아요!”

그제야 서율의 눈에 거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밖의 성벽만 보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들렀던 어떤 곳보다 깔끔했다. 동방과 서방의 도시 모두 포함해서.

미르도 내심 흥미가 생겨서 그 물체를 빤히 바라봤다.

“저것도 리안 상회 건가 보네.”

“왜요?”

“그때 본 갑옷들이랑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어.”

그 말에 서율도 물체를 빤히 바라봤다.

확실히. 구석에 작기는 하지만 뜻 모를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대체 뭐 하는 상단일까요? 표국 일은 안 하려나. 동방까지 데려다주면 좋을 텐데.”

“어차피 곧 만날 테니 그때 물어보든가.”

“지금 리카르도 경 상태 보면 상단에 검강이라도 뿌려댈 거 같으니 문제죠.”

서율이 힐끗 정면을 바라봤다.

어느새 돌아온 기사들이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보고하는 중이었다. 그와 동시에 리카르도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지금부터 빠르게 움직인다.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같은 제국민이라 할지라도 베어 버려라. 책임은 내가 지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신형들이 흩어진다.

서율은 당황한 얼굴로 옆을 쳐다봤다.

“……저흰 어떡하죠? 완전히 잊어버린 거 같은데. 사형은 어디로 가는지 보였어요?”

“대충.”

“저는 대강대강 살아서 안 보였나 봐요. 사형이 안내 좀 해 줘요.”

“그냥 여기서 기다리면 되잖아.”

“얼른요.”

미르는 귀찮다는 기색을 풀풀 풍기면서도 순순히 앞장서기 시작했다.

‘사형도 내심 궁금하긴 했나 본데.’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말을 잘 들을 리 없다. 아무튼, 잘된 일이다. 서율도 리안 상회란 곳이 궁금해진 참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르가 한 담장 앞에서 멈췄다. 큼지막한 2층 저택. 그 마당의 분수 옆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녀라 하기도, 여자라 하기도 애매한 경계에 선 모습.

그러나 한 가진 확실했다. 서율은 태어나서 저렇게 예쁜 인간은 처음 보았다.

‘심지어 어색하지도 않네.’

아무래도 서방과 동방은 생김새가 다르다 보니 얼굴을 보면 하나같이 이질감이 느껴지기 마련인데, 저건 그런 수준을 넘어섰다.

‘근데 표정은 왜 저리 죽상이래.’

나라라도 잃은 얼굴이라 해야 하나. 주변에는 짐처럼 보이는 물건들이 몇 개 늘어져 있고 시선은 초점이라도 잃은 것처럼 붕 떠 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문제는 또 따로 있었다.

‘……대체 누구길래 리카르도 경이 저리 공손하게 서 있지?’

그뿐만이 아니다. 1기사단 전원이 그를 둘러싸고 방어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마치 저 소녀가 최중요 인물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그런 서율의 궁금증이 풀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감격한 얼굴로 서 있던 리카르도가 검을 거두며 그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황녀님.”

매우 절절한, 그래서 더욱 아린 목소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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