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68)
“……어?”
타냐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내, 내가 나가라고?”
“응. 돈은 걱정 말고. 부적값으로 넉넉히 쳐 줄 테니까.”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긴. 약속 기간 지났으니까 이러지. 너도 따라오는 거 별로 안 좋아했었잖아.”
커다란 눈동자가 둘 곳을 잃은 듯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이윽고 나를 한 번 쳐다봤다가, 이내 내리깔았다.
“……이젠 아니야. 나 여기 있는 거 좋아해.”
“사실 내가 불편해서 그래.”
“여, 여기가 네 집도 아니잖아.”
“내 집 맞아. 대물림의 숲 가기 전에 라이놀한테 인도받았어. 금액도 지불했고.”
“……내가 뭐 잘못했어?”
타냐는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었다.
“……잘못한 거 있으면 말해 줘. 나 눈치 없으니까…… 말 안 해 주면 몰라.”
“그런 거 없어. 그냥 불편해서 그렇다니까.”
“까, 까칠하게 군 거 때문에 그러는 거지? 사과하면 되잖아.”
타냐가 고개를 들고 문 앞에 뻘쭘히 선 모자를 바라봤다.
“……아깐 좀 심하게 말했던 거 같아. 기분이 별로 안 좋았거든. 용서해 줄래?”
“아, 아뇨. 저흰 괜찮은…….”
“봤지? 괜찮대.”
밝게 변한 눈동자가 내 얼굴에 닿더니 금세 먹구름이 낀다. 다시 시선을 내리깐 타냐가 미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그러는데. 사과도 했잖아.”
“……일주일 줄게. 그 안엔 나가 줬음 좋겠다.”
끼이익. 문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그 앞에 서서 잠깐 망설이다, 이내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머뭇거리던 릴리와 카일이 따라붙는 기색이 느껴진다.
“방은 아무 데나 쓰셔도 괜찮아요. 2층은 여자 방, 1층은 남자 방처럼 돼 있긴 한데, 둘이 같이 쓴다고 따질 사람은 없을 거예요.”
“…….”
“물론 방을 따로 쓰셔도 괜찮고요. 그땐 이왕이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층을 나누는 편이 좋겠지만.”
“…….”
“……할 말 있으면 하시죠.”
내 말에 릴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 아뇨 저는 할 말 없어요. 두 분 일인 걸요 뭐. 방금 와서 상황도 모르고…….”
“너는?”
카일에게 고개 돌리며 묻자 녀석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저도 별로 할 말 없어요.”
“그럼 됐어. 청소는 아까 말씀드렸듯 필요 없고, 식사는…….”
“그냥 제국인들은 밀당을 이런 식으로 하는구나, 느끼긴 했어요.”
……뭔 당?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냐.”
“엄마요.”
“혹시 나중에 여우 같은 애한테 당하기라도 할까 봐…… 저는 빠져 있을게요.”
릴리가 어색하게 웃더니 뒤로 물러났다. 나는 시선을 다시 카일에게 되돌렸다.
“네 눈엔 그게 밀당으로 보이디?”
“아니에요?”
“어. 아니야.”
“그럼 그런가 보죠.”
이번에도 카일은 역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문제는 내가 개운찮은 기분이라는 거다. 얼른 변명하듯 덧붙였다.
“쓸데없는 오해하지 마. 내가 쟤랑? 나이 차이가 얼만데.”
“형이랑 나이 비슷해 보이는데요. 그것도 변장한 모습이에요?”
“……아무튼 아니야. 아니, 뭐 어떻게 보면 아닌 건 아니긴 한데.”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어요.”
“…….”
잠깐 망설이다 툭 던지듯 물었다.
“네가 봐도 쟤가 나 좋아하는 거 같아?”
“네.”
너무 시원스러워서 오히려 상쾌해지기까지 하는 답변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고. 적어도 내가 도끼병은 아니란 거니까.
1년쯤 전부터 조금씩 의심이 들긴 했다. 얘가 나랑 다른 사람 대하는 태도가 너무 차이 나서. 거리 두고 있으면 알아서 해결될 거라 생각했는데…… 적어도 한집에 사는 상황에서는 아닌가 보다.
카일이 나를 슬쩍 보곤 말을 이었다.
“잠깐 봐도 알 정도로 티 나던데요.”
“…….”
“형은 저쪽이 싫어서 밀어내는 거예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싫은 건 아니고. 그렇다고 그쪽 방면으로 좋아하냐면 그런 건 또 아니고. ……아무튼 한 가진 확실해.”
타냐 방을 바라봤다. 내가 나올 때 있던 그 자리 그대로 서 있는 코드가 보인다. 짧게 한숨 쉬었다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난 쟤 마음 못 받아 줘.”
* * *
“……사형 저희 진짜 큰일 난 거 아니에요?”
서율이 모래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머리칼을 대충 잡아 묶으며 말했다. 짐짓 진지한 목소리였지만, 정작 그 대화 상대는 심드렁한 얼굴로 답했다.
“또 뭐가.”
“아, 진짜. 그렇게 대충대충 넘기지 좀 말고요. 제국 망했다잖아요! 저희도 망한 거 아니냐고요!”
“목소리가 크다.”
서율이 흠칫해서 입을 앙 다물었다. 그리곤 슬쩍 앞서가는 기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하나하나가 장로급 이상 가는 초고수들. 그런 사람들이 목소리를 놓쳤을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표정들이 하나 같이 안 좋다. 특히 맨 앞의 남자 표정이.
‘……클났다.’
카디안 제국 제 1기사단장 리카르도.
무려 문주님과 무승부를 낸 무인. 여기선 기사라 한다던가. 아무튼, 서율은 살면서 그 문주님과 대등히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거라곤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그리고 본인이 그런 상대 심기를 거스를 거라는 사실도.
서율이 일자로 묶인 머리를 괜스레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이 정도 목소리면 안 들릴까요?”
“잘만 들릴걸.”
“……이 정도는요?”
“거의 장구 치는 소리 같아.”
“……이래도요?”
“차라리 전음을 써 보지 그래?”
너무도 성의 없는 대답에 서율이 발끈했다.
“진짜 진지하게 대답 안 할래요? 소설에나 나오는 편의 무공이잖아요 그거.”
“문주님은 쓰던데.”
“말도 안 돼. 나는 뭐, 문주님 뵌 적도 없는 줄 아나? 아주 사형 혼자 유망주 같죠? 저도 나름 기대받는 후기지수거든요!”
서율의 말에 남자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못 믿겠으면 시험해 보든가.”
“어떻게요?”
“이렇게.”
남자가 순식간에 목소릴 낮췄다. 개미조차 내기 힘들 정도의 크기였다.
“리카르도 경.”
―그렇게 부를 거 없네.
“꺅!”
갑자기 머릿속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에 서율이 기겁해 소리쳤다.
“뭐, 뭐야?”
“그쪽 문주에게 배운 기술이지. 생각보다 힘들어서 즐겨 쓰진 않네. 정작 본인도 별로 사용하지 않는 거 같더군.”
어느새 옆까지 다가온 리카르도의 모습에 서율이 어색하게 웃었다. 분명 정면을 보고 있었는데, 움직이는 기척조차 포착하지 못했다.
“아, 안녕하세요. 오, 오늘 날씨가 좋네요.”
“여긴 사막이네만.”
“그러니까요! 동방에선 보지 못한 모습이라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지 뭐예요?”
“그리 호들갑 떨 필요 없네. 추궁하러 온 것이 아니니.”
찔리는 게 있던 서율이 입을 다물었다. 리카르도가 그 모습을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황녀님이 지금 저 나이대쯤 되었겠군.’
어디에도 재능이 없지만, 그에 반해 이상할 정도로 성실하고 머리가 좋던 황녀다. 리카르도는 도저히 그녀가 죽었을 거란 상상도, 제국이 패배했을 거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여행자가 헛소문을 들은 걸세. 놈들은 되도 않는 소리를 몇 배씩 부풀리곤 하지.”
“……그, 진짜 말씀드리고 싶지 않은데, 같은 얘길 한 여행자가 벌써 셋이나 되거든요…….”
“동방엔 삼인성호란 사자성어가 있더군. 없는 호랑이도 세 명이 지어내면 진실처럼 둔갑한다는 뜻일세.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말이라 할 수 있지.”
“……혹시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도 들어 보셨는지.”
“…….”
리카르도의 시선에 서율이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진짜로 제가 초 치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요…….”
“무슨 뜻인지 알겠네. 자네들 입장에선 걱정이 될 만도 하겠지.”
리카르도가 뒤를 돌아 광활한 사막을 바라봤다. 지금은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건 여기가 외곽이라 그래 보일 뿐이다.
동쪽과 서쪽을 가로막은 대사막.
저 중심부에는 2급은 물론 1급의 기사마저 긴장하게 만드는 마물들이 가득했다.
친교 목적으로 따라붙은 저 둘은 리카르도가 감탄할 정도로 재능이 넘치긴 했지만, 아직 완벽히 꽃피우지 못한 봉우리일 뿐. 그들만으로 동방에 돌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목숨이 열 개쯤 된다면 모를까.
“너무 걱정 말게. 무슨 일이 생기기야 했겠지. 아니면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말을 뱉을 리 없을 테니. 하지만 제국은 그리 만만한 나라가 아니야. 나를 보면 모르겠나?”
뽐내는 말인데 그게 당연한 것처럼 자연스레 들린다. 그럴 만도 하다. 실제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그 정도 자격은 있는 사내다.
‘알긴 아는데…….’
서율이 들리지 않게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형이란 인간은 제 일 아니라는 양 태평스럽기 그지없지만, 사실 사태는 꽤 심각했다. 자칫하면 연고 하나 없는 서방에 평생 처박힐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 기색을 읽은 리카르도가 피식 웃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제국이 멸망했다 쳐도 걱정할 필요 없네. 자네들 돌아갈 호위는 붙여 줄 테니까.”
“……죄송해요. 안 그래도 심란하실 텐데 너무 저희 입장만 따지는 거 같아서.”
“그쪽이 당연하지.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겠군. 문주에게 직접 안전을 보장했는데 그런 헛소문 탓에 걱정부터 끼쳤으니 말일세.”
곧 죽어도 제국이 멸망했을 거라곤 안 믿는 분위기다. 서율은 내심 그런 자신감이 신기했다. 그녀도 절대 대적하는 자가 없을 거라 믿었던 문주가 비기는 걸 보지 않았던가. 한데 정작 그런 믿음을 깨 버린 당사자가 제국에는 신앙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니.
‘……그렇게 대단한 나란가?’
듣자니 국력이 강한 거 같기는 했다. 하지만 서율은 그리 거대한 집단을 쉽사리 떠올리기 힘들었다. 동방에선 작은 국가 수십 개가 서로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듣기로는 거의 태평성대에 가깝던데.’
압도적인 제국과 서로 견제하는 세 왕국.
마지막으로 인간끼리 전쟁을 벌인 게 50년이 넘었단다. 그게 대체 어디 붙어 있는 선계(仙界)란 말이냐.
떠올리지도 못할 걸 붙들고 있는 건 성미에 안 맞았다. 고개를 내저은 서율이 옆을 툭툭 쳤다.
“……사형, 사형도 얼른 감사하다고 해요.”
“또 왜.”
“……저희 편의 봐주신다는 거잖아요. 얼른요.”
“원래 그게 정상이야. 사매만 오두방정 떤 거지. 그리고 어차피 다 들리는데 목소린 왜 줄이는 거야?”
“……아무튼요! 사형도 눈치껏 소리 좀 줄여요!”
“도통 이해가 안 가네.”
남자가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곤 리카르도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방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내일부터 해가 서쪽에서 뜬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을 거 같군요.”
“그게 무슨 감사야! 그리고 직접 얘기하는데 목소린 왜 줄여요?”
“이젠 하라는 대로 해도 뭐라네.”
“안 하니까 문제죠!”
리카르도가 말다툼하는 둘을 바라봤다. 저리 보면 평범한 젊은이들 같은데, 정말 그랬다면 친선 대표로 따라붙었을 리가 없다.
‘용이라…….’
동방에서 붙인 별명이라든가. 그가 보기에도 퍽 어울리는 칭호였다. 재능이든 행동이든.
리카르도는 시선을 돌려 서쪽을 바라봤다.
‘무사할 거라 믿지만…….’
리카르도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만에 하나라도 황녀님 몸에 변고가 생겼다면, 그와 관련된 자는 그 누구라 할지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