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67)
“……지금 뭐라고 했나?”
“그, 그게. 마법사님이 패배하셨다고…….”
되물어도 똑같이 돌아오는 대답에 데이먼이 충격받은 얼굴로 멀뚱히 허공을 바라봤다.
이번에 갔던 자가 어떤 자던가. 바르나울 최강의 마법사였다. 수십 년 가까이 연구에 몰두하긴 했지만, 젊었을 적에는 전투 마법사로 활동한 적도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데 뭐? 패배?
“상대는?”
“예?”
“상대는 어떻게 됐느냔 말이다. 적어도 사지 멀쩡히 이기진 않았을 텐데?”
그 정체 모를 놈이 예상보다 더 강했을 수는 있다. 3급 이상은 국가의 관리를 받지만,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으니까.
하지만 6성급이나 되는 마법사가 맥없이 졌을 리도 없다.
시종은 그런 상식을 깨부숴 주겠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아, 아무 피해도 없습니다.”
“뭐?”
“승부가 한순간에 결정 나서…….”
데이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처 하나 없이 바르나울 최고 마법사를 이겼단다. 여기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렇다고 그가 시장 직위를 딱지치기로 얻은 것도 아니다. 속 좁게 움직인 건 그래도 돼서일 뿐, 이런 상황에서까지 멍청히 행동할 만큼 병신은 아니란 소리다.
데이먼이 재빨리 물었다.
“마법사는 살아 있는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뭔지 모를 상대의 정체보다 더.
하지만 시종은 꾸물거리기만 할 뿐,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답답해진 데이먼이 말을 재촉하려 한 순간. 대답은 생뚱맞게도 입구 쪽에서 들려왔다.
“안 죽였어. 아마 제일 듣기 싫었을 대답이겠지만.”
그곳에는 흑발의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누구인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저렇게 드문 머리칼에 경비 따윈 없다는 듯 시청 중앙부에 들어와 있을 인물은 하나뿐이니까.
데이먼의 판단은 빨랐다.
“……날 죽이면 칼페온과 척을 지겠다는 뜻이오. 아무리 당신 같은 실력자라도 달가운 일은 아닐 텐데.”
“글쎄. 나는 공격해 온 거 반격했을 뿐이야. 방문을 미리 알리지 않은 거랑 대뜸 공격당한 거. 어느 쪽이 더 죄가 클까? 게다가…….”
흑발의 남자, 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목 없는 놈은 말도 없어지는 법이지.”
데이먼이 이를 악물었다. 저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이 일에 대해 아는 건 그 본인과 시종, 그리고 나갔던 마법사와 용병뿐. 둘은 이미 잡혔고, 나머진 이 방에 있다. 증거 인멸을 위한 조건은 완성되었단 소리다.
리안은 그 굳은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표정 풀어. 그럴 생각 없으니까. 정확히는 누가 되게 반대하더라고. 동정심 때문인지 위험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릴리.”
데이먼의 얼굴에 한 줄기 그리움이 스쳤다. 그 모습에 기가 찬 리안이 쯧쯧 혀를 찼다.
“릴리가 그랬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굉장히 지 좋을 대로 생각하는 재주가 있네.”
“설마 클라우스 그 새끼의 새끼가 그랬을 리는 없으니까. 릴리의 배 속에서 태어났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냉혹한 놈이다. 그녀의 다정함은 조금도 물려받지 못한 자식이지.”
클라우스는 카일의 아버지. 즉 릴리의 남편 이름이다. 그 새끼의 새끼란 건 결국 카일을 뜻하는 건데…… 사람을 그렇게 칭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냉혹하고 다정하다라……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사실은 알겠네. 뭐, 그거야 알아서 생각하시고. 아무튼, 내가 온 이유는 경고야.”
“……경고?”
“흔히 하는 대사들 있잖아. 이 사실을 다른 놈에게 알리지 말라든지, 추격을 붙이면 죽이겠다든지.”
하는 말은 살벌하기 그지없는데 그 어투가 너무도 덤덤하다. 데이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거라면 굳이 올 필요 없었을 텐데. 애초에 지금 시점에서 내가 널 노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본인은 그렇겠지. 하지만 왕궁에 보고하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원하는 게 뭐지? 각서라도 써 달란 건가?”
“필요 없어. 사실 보고하고 싶어도 못 할 거란 걸 알려 주러 온 거거든.”
“그게 대체……. 설마.”
데이먼이 얼굴을 구겼다.
“마법사를 숨겨 뒀나?”
“시장 자리를 제비뽑기로 딴 건 아닌가 보네.”
리안이 싱긋 웃었다.
무려 6성급 마법사를 사적인 일에 사용한 데다, 심지어는 그 정보가 잘못돼 죽일 뻔까지 한 거다. 그런 사실이 왕궁에 전달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을 터. 그 누구보다 마법사의 입을 막고 싶을 건 데이먼이란 소리다.
“기절한 거 도시 안에 꼭꼭 숨겨 뒀으니 알아서 찾아보라 전하러 왔어. 괜히 병사 풀어서 우리 쫓아오지 말라고.”
“…….”
“뭐 그래도 딱히 방해되는 건 아니지만, 귀찮은 건 사실이니까. 아, 입구도 좀 열어 줘. 내가 난동 피우는 건 너도 싫을 거 아니야.”
이젠 거의 사색이 된 데이먼의 얼굴을 바라보며 리안이 툭 내뱉듯 말했다.
“뭐 해? 꾸물거릴 시간 있으면 마법사 깨기 전에 달려.”
* * *
레이튼에 돌아온 건 떠난 지 두 달이 다 돼 가는 시점이었다.
정 붙이면 고향이라던가. 그렇게 싫었던 도신데, 이젠 보는 순간 마음이 편해진다. 입구부터 마중 나와 주는 사람…… 뱀파이어도 있고.
나는 그림자에서 빠져나오는 형체를 향해 준비해 온 선물을 던졌다.
턱.
“이게 뭐야?”
“사과.”
“……아니, 그건 보면 아는데. 왜?”
“그런 게 있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카트발이 사과를 베어 물며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비교적 밝은 얼굴을 한 릴리와 아닌 척하면서 주위를 힐끔거리는 카일이 있었다. 촌놈 같으니.
“근데 저 둘은 누구야?”
“이번에 고용했어. 앞으로 자주 만날 테니 인사해 둬.”
“또 노예를 산 거야?”
그 말에 릴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혹시 속았나? 같은 심정일 거다. 의심 들 만큼 좋은 조건이긴 했지. 그렇다고 그런 혐의 받고 싶던 건 아니었지만.
나는 카트발을 한심스런 얼굴로 쳐다봤다.
“그건 너고. 이게 진짜 노예 대우를 받아 보고 싶은가. 왜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하지?”
“아니면 아닌 거지 신경질은…….”
투덜거리는 카트발을 노려보자, 녀석이 그제야 순순히 모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거 언제 서열 정리 한 번 하기는 해야 하는데. 누가 저 모습을 보고 노예라 생각하겠냔 말이다.
살짝 한숨을 내쉬곤 걸음을 옮겼다.
대물림의 숲부터 칼페온 일까지.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제대로 쉬어 본 기억이 손에 꼽는다. 육체야 회복한 지 오래지만, 정신적으로 지쳤다 해야 하나. 당장 침대에 들어가 처박히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택까지 반 정도 남았을까. 집이 가까워질수록 안절부절 못 하는 기색으로 따라오던 카트발이 뭔가 결심한 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보다, 누난 만났어?”
“어. 네가 자기랑 만나기 싫어서 안 온 것까지 바로 눈치채더라.”
“지, 진짜? 그래서 뭐래?”
“다음에 만나면 네 피로 선짓국 해 먹겠다던데.”
“……농담이지?”
“글쎄. 그보다 용건이나 말해.”
걸음을 멈추고 카트발을 바라봤다.
사실 아까부터 이상하긴 했다. 내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카트발이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건 당연하다. 서로 노예 각인으로 엮인 상태니까. 멀어지면 멀어지는 대로, 가까워지면 가까워지는 대로 느낌이 왔다.
하지만 그게 카트발이 제일 먼저 마중 나올 이유는 되지 못한다. 지금은 햇빛 쨍쨍한 대낮. 이런 날씨에 나 하나 환영해 주겠다고 뛰쳐나올 정도로 기특한 녀석이 절대 아니니까.
아까부터 의문문만 반복하며 시간 끄는 것도 그렇고.
아니나 다를까, 카트발은 햇볕에 노출된 금붕어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누나가 선짓국으로 만들어 버린다 했을 때보다 반응이 격한데.
“무슨 일 있었어?”
“이, 일은 무슨. 아무것도…… 아, 잠깐!”
어차피 가 보면 알겠거니 싶어 걸어가자 카트발이 온몸으로 매달려 왔다. 이렇게 필사적인 건 2년 전 경매장에 나온 뒤로 처음 본다.
진짜 뭐가 터지긴 터진 모양인데.
“얘기 안 하면 그냥 간다. 3, 2.”
“지, 지금 타냐 기분이 엄청 안 좋아!”
……뭐?
“타냐 기분이 안 좋아?”
“응.”
“내 기분은 좋아 보여?”
“아니…….”
혹시나 싶어서 긴장했던 게 모두 허무하게 느껴진다.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은. 헛웃음 흘리고 걸어가는데, 카트발이 다시 곁에 따라붙었다.
“그, 그래도 진짜 기분 안 좋다니까?”
“나도 너 때문에 기분 안 좋아. 귀찮게 그만하고 좀 가라.”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너 거의 1년 동안 타냐 피해 다녔잖아. 이런 상황에 만나면 진짜 싸울지도 몰라.”
조금 놀랐다. 얘는 진짜 눈치가 없는 거지 없는 척하는 게 아닌데. 카트발이 알아챘다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다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라이놀이나 다린도 알아?”
“라이놀은 모르겠어. 그쪽이랑은 대화도 별로 안 하니까. 적어도 다린은 알지.”
“근데 왜 여태 얘길 안 했대?”
“네가 알아서 하겠거니 하는 거 같던데.”
“…….”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지만, 그동안 분위기가 상당히 어색했을 거다. 겨우 다섯 명 사는 저택에 네 명이 서로를 피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라이놀은 카트발을, 나는 타냐를.
그 사이에 낀 다린의 입장이 어땠을지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떠나기 전 말한 게 그냥 평상시 칭얼거림의 연장이라 생각했는데…… 오랜 고민 끝에 슬쩍 흘린 진심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살짝 이마를 짚었다.
“미안. 그동안 수련에 열중하느라 별로 신경 못 썼나 봐. 너나 다린이나 많이 불편했어?”
“어? 아, 아니. 그 정돈 아니고…….”
“안 그래도 돌아오는 대로 해결하려 했으니 너무 걱정 말고. 타냐 저택에 있는 거 맞지?”
카트발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역시 넌 계획이 다 있구나! 솔직히 집에 있으면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
“나중에 다린이랑 같이 맛있는 거 사 줄게. 그리고 라이놀 문제는…… 조금 기다려야겠는데.”
“괜찮아. 뭐 그쪽 입장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 인간들에게 이종족은 침략자같이 보일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제국민들이 유독 더 심하긴 하지만.”
새삼스레 카트발을 다시 봤다. 라이놀 같이 사람 좋은 상대한테 혼자 차별받는다는 사실이 썩 기분 좋진 않을 텐데.
“차차 해결되겠지. 아무튼, 네가 저 두 사람 남는 방에 안내 좀 해 줘. 난 타냐한테 가 볼 테니까.”
“저흰 괜찮아요. 혹시 방해되는 게 아니라면 따라갈게요.”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릴리가 앞으로 끼어들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같이 사는 분들 모두 인사드릴 생각이었으니 지금 찾아뵙는 게 맞을 거 같아서요.”
조금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지금 아니면 기회 없을 수도 있으니까.”
“네? 그게 무슨…….”
“아, 타냐랑 다린이랑 모두 방에 처박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따로 만나기 힘들어서 한 말일 거야.”
카트발이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지만…… 뭐 됐나.
그보다 초딩 같아 보이는 애가 성인 상대로 반말을 찍찍 싸대니 내 안의 유교 본능이 꿈틀대는 기분이다. 실제 나이야 카트발이 위이긴 한데.
“아무튼, 드디어 화해한다니 다행이네. 나는 그만 갈게. 다린이 실험 좀 도와 달라 해서.”
대답하기도 전에 카트발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일단 한마디 해 둘까 했는데…… 관두자. 릴리도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고, 자칫하면 꼰대 같아 보일라. 아직 내가 이 세계에 완전 적응하지 못했단 소리겠지. 수백 살 먹은 이종족이 득실거리는 세계 아니던가.
잡생각과 함께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저택에 도착했다. 다른 곳은 보지도 않고 바로 2층의 타냐 방으로 직행했다. 그 앞에 서서 잠깐 망설이다, 조심스레 노크를 했다.
똑똑.
“누구야?”
“나야. 리안.”
한참 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차분히 기다리는데, 안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곧이어 문이 열렸다.
“드, 들어와.”
“굳이 청소할 필요까진 없는데.”
“……그런 거 아니야.”
살짝 열린 문을 활짝 젖히자 새하얀 얼굴이 보인다. 이제는 소녀라 하기도 여자라 하기도 애매한 모습. 이렇게 맞대면하는 건 오랜만이라 조금 낯설기도 했다.
나를 빤히 보던 시선이 뒤쪽으로 향한다. 고개가 두 모자를 번갈아 가더니, 릴리에게 가서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변했다.
“저 둘은 누구야?”
“아, 인사해. 이번에 같이 온 사람들이야. 앞으로 저택에서 지낼지 따로 나가서 살지는 모르겠지만.”
안으로 발을 들이밀며 말하자 근처에 서 있던 타냐가 당황한 얼굴로 엉거주춤 뒷걸음질 쳤다. 릴리는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 선 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리안 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저는 릴리고 이쪽은 제 아들, 카일이라고 해요.”
“……아들?”
“네. 뭐 하니? 어서 인사드려.”
릴리의 재촉에 카일이 마지못한 듯 대충 고개만 까딱거렸다. 건방진 모습이었지만, 애초에 타냐는 그쪽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저만한 아들 있을 나이론 안 보이는데.”
“네? 아…… 감사해요.”
“감사할 건 없고. 인사 끝났으면 가 보지?”
……그러고 보니 내 안의 유교 본능을 들쑤시는 게 카트발 말고 하나 더 있었지. 얘는 걔처럼 나이가 많다던가 하는 설정도 없는데.
“그냥 계세요. 어차피 금방 끝날 거니까.”
“……네. 그리고 혹시 당분간은 저택에서 신세 좀 져도 괜찮을까요? 있는 동안 청소는 제가 담당할게요.”
“편한 대로 하세요. 어차피 남는 게 방이기도 하고. 청소는 굳이 안 하셔도 되지만.”
“아, 역시 시종이 있나 보군요. 하긴 이렇게 큰 저택이니.”
“그건 아닌데…… 아무튼 청소는 신경 안 쓰셔도 될 거예요.”
릴리는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나중에 알게 될 거라는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가 그 모습을 살짝 흘겨봤다.
“나는 저 둘 들어오는 거 반대야. 어차피 요즘 레이튼에 남는 게 집이잖아.”
“그 얘긴 나중에 하고. 일단 사과부터 할게.”
“……사과?”
“응. 그동안 내가 너 이유 없이 피한 거. 너도 눈치챘을 거 아니야.”
타냐는 크게 당황한 얼굴로 어버버 댔다.
아마 이렇게 직설적으로, 갑작스레 꺼낼 줄 몰랐을 거다. 한참 말을 고르는 기색이던 타냐가 곧이어 작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이유가 짐작 안 가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 그럼 다음 얘기 꺼내기도 쉽겠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한 약속 기억해?”
“약속?”
“너 17살 될 때까지 같이 다니기로 한 거.”
“……그런 약속을 했었나?”
타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반쯤 잊고 있던 일이었으니 놀랄 것도 없다. 바이론이 날 푸른 혈맥으로 착각해서 그럴 필요도 없어진 데다, 얘는 그 얘기 할 때 거의 정신을 놓은 상태였으니까.
“했어. 근데 네가 지금 몇 살이지?”
“……18살.”
“맞아. 약속한 기간 하고도 1년이 지났지.”
타냐의 얼굴에 불안의 기색이 깃든다. 나는 거기에 쐐기를 박아 넣듯 덤덤히 말했다.
“그만 이 집에서 나가 줬음 좋겠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