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65)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에요.”
멍한 눈으로 떠나는 용병을 보며 꼬마…… 아니. 2부의 주인공, 카일이 말했다.
그래픽으로 보다가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로운데. 어린 시절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의미가 없어?”
“예. 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지금이라도 가서 돌려받는 게 좋을거예요.”
“어째서?”
“돈 목적으로 저러는게 아니거든요.”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며 말했다.
“100골드를 발톱의 때처럼 여기는 게 아니라면 새 핑계 만들 시간 며칠 번 게 다라는 얘기죠.”
“그럼 다행이네. 발톱의 때 정도는 아니지만, 그게 내 며칠 시간보다는 덜 소중하거든.”
피식 웃으며 한 대답에 카일이 살피는듯한 눈으로 나를 마주 봤다.
“아버지 고향 친구분인가요?”
“흠, 왜 그렇게 생각했어?”
내 말에 카일이 제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머리요. 이 도시에 흑발은 저랑 아버지밖에 없거든요. 외부인이란 소리죠. 그런데 처음 보는 절 돕겠다고 100골드까지 내줬으니 아버지와 아는 사이라고 생각할 수밖에요.”
조금 놀랐다. 게임에선 길어야 세 마디 내뱉는 게 다였는데. 설정이 바뀐 건가? 아니면 제 나름의 고마움 표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근거는 좋았어. 결론은 틀렸지만. 나는 너희 아버지랑 일면식도 없는 사이야.”
“……그럼 어째서 도움을?”
“뭐, 그런 건 안에서 천천히 얘기하자고. 설마 100골드나 냈는데 물 한잔도 안 내주는 건 아니지?”
너스레 떨며 집으로 향하자 카일이 뒤에 따라붙는다. 무표정하던 얼굴에는 한 줄기 당혹감이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제야 좀 애 같은데. 피식 웃자, 내 걸음걸이를 살피던 카일이 불쑥 입을 열었다.
“……시장 목적이 뭔진 안 물으세요?”
“어머니 때문이지?”
카일이 눈썹을 찌푸렸다.
“근거는요?”
“그런 건 없어. 난 그냥 아는 거니까.”
“그게 무슨…….”
“앞으로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내 행동 하나하나 일일이 설명할 생각은 없거든.”
“익숙해지다니…….”
“흠…….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나는 카일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요컨대 스카우트 제의라, 이 말이지.”
* * *
“100골드를 그 자리에서?”
바르나울의 시장, 데이먼이 눈썹을 찡그린 채 물었다. 그에 그 앞에선 용병이 변명하듯 재빨리 답했다.
“예. 저도 믿기진 않습니다만…….”
“흠. 아르곤 동부에서 온 거 같다 했나?”
“확실할 겁니다. 그놈 자식이랑 똑같은 흑발에, 100골드까지 써 가며 도와주는 거 보면…… 아마 그놈 고향에서 알던 사이가 아닐지.”
“무력도 상당할 거라고?”
데이먼의 물음에 용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예상이긴 합니다만, 적어도 저보다 강한 건 확실합니다. 최소 B등급. 경우에 따라선 A등급도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5급이나 4급 수준이라는 거군.”
3급 이상의 기사나 6성급 이상의 마법사는 국가의 관리를 받는다. 본인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소리다. 왕국의 허가를 받은 후에야 움직일 수 있는데, 시장인 그가 알기로 현재 바르나울에 존재하는 실력자는 하나뿐이다.
데이먼이 피식 웃고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웃기지 않은가?”
“……무엇이 말입니까?”
“그놈은 용병 노릇이라도 해 보겠다고 나갔다 뒤져 버렸는데, 고향 사람은 꽤 잘나가는 용병이 돼서 나타났으니 말이야.”
그 말에 용병이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가를 우물거렸다. 그 용병짓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만든 것이 눈앞의 시장임을 아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내 꺼내 봤자 도움 될 일 없음을 깨닫고 그냥 꾸벅 고개를 숙였다.
“보고는 이게 끝입니다. 그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
곧이어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데이먼이 곧바로 시종을 호출해 뭔가를 지시했다. 그리고 얼마 뒤. 똑똑,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시장님, 연구 중에는 가능한 호출하지 말아 달라 분명 요청드렸을 텐데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들어온 마법사의 말에 데이먼이 허허 웃었다.
“‘가능한’이 절대는 아니지 않나. 필요한 일이 있어 불렀으니 너무 성내지 말게.”
“용건이 있으면 빨리 말씀하시죠. 연구가 막바지던 참이란 말입니다.”
건방진 요술쟁이 새끼.
데이먼은 그 말을 속으로 눌러 삼켰다. 그도 그럴 게, 상대는 무려 도시에서 가장 강한 6성의 마법사였으니까. 아무리 시장이라 한들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데이먼은 감정이 새어나가지 않게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대해 줘야 할 사람이 하나 있네.”
“기사급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대를 불렀겠나?”
살짝 비아냥 섞인 어조였지만, 마법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입장에선 그런 감정싸움조차 단순한 시간 낭비일 뿐이었으니까. 이유도 묻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든 관심 밖이었으니까. 대신에 마법사는 조용히 물었다.
“언제 출발합니까?”
“편할 때 언제든 상관없네. 이왕이면 빠를수록 좋겠지만.”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지요.”
“……지금 바로 말인가?”
데이먼이 놀라 물었다. 보통 뭐 하나 지시하면 며칠이고 뭉그적거리는 게 일상인데.
마법사는 살짝 경멸 섞인 눈으로 데이먼을 바라봤다.
“연구에 돌아가려 해도 어차피 집중이 깨져 버린 데다, 그런 하찮은 일에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진 않으니까요.”
“……무슨 이유든 일만 빨리 끝내 준다면 나야 고마운 일이지.”
“목표는 어디에 있습니까?”
“용병을 하나 붙여 주겠네. 그자가 안내해 줄 거야.”
“그럼 용건은 더 없으신 거 같으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마법사가 허가 따윈 필요 없다는 듯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데이먼은 닫힌 문을 노려보며 근처의 종이를 구겨 버렸다.
“……건방진 요술쟁이 새끼 같으니.”
패배자 같은 모습임을 본인도 부정할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일반인, 상대는 6성급 마법사니까.
아무리 시장이라 해도 이 왕국에선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명목상 직위가 높을 뿐, 결국 그도 마법사의 종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그 앞에 고위가 붙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후…….”
어찌 되었건 이미 일은 해결된 것과 다를 게 없다.
6성급 마법사는 3급 기사와 동급.
아무리 마법사가 기사에 비해 대인전이 딸린다지만, 끽해야 4급일 상대에게 패배할 리가 없었으니까.
* * *
“……스카우트요?”
“예. 그냥 영입이라 알아들으시면 충분할 겁니다.”
집에 돌아온 카일의 어머니, 릴리의 말에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별로 좋지 않은 선택이었는지 그녀가 바로 고개를 아래로 깔았다.
“혹시 제가 불편하시면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예?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그냥 이런 게 습관이 돼서.”
릴리가 다시 고개를 들곤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카일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저희 아들을 고용하고 싶다는 소리인가요?”
“정확합니다.”
“……혹시 마법사신가요?”
“무슨 생각하시는지 아는데, 실험용으로 데려가겠다는 건 아닙니다. 마법사도 아니고요.”
“그럼 카일을 대체 어디에 쓰시겠다는 건지…….”
패배감 짙은 말투였지만, 그녀를 탓할 순 없었다. 애초에 칼페온이란 나라 자체가 마법사 외에는 모두 버러지 취급하는 곳이니까.
“저는 카일의 재능을 사고 싶습니다.”
“재능이요?”
그게 뭔지 짐작도 안 간다는 듯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카일은 이미 어릴 적에 마법 적성 검사를 받은 적 있는걸요.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요.”
“재능이 마법사 적성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뭐, 사실 그쪽도 어느 정도 기대를 걸고는 있습니다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카일에게 마검사의 재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릴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검사요?”
“예.”
이제 릴리는 나를 미친놈 보듯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검사든 마법사든 보통 한 사람의 인생을 몽땅 바쳐도 대성하기 힘든 일. 그런 상황에 마법도 쓰고 검도 쓰겠다는 말은, 어느 하나 제대로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으니까.
보통 온라인 게임에서 탱딜힐 다 되는 만능 캐릭터를 떠올려 보면 쉽다. 듣기만 하면 좋아 보이는데, 정작 해 보면 어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쓰레기 아니던가.
여기서 마검사의 인식이 딱 그랬다. 상식 수준으로 뿌리 박힌 생각이라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죄송하지만 카일은…….”
“계약금은 100골드로 괜찮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엔 설득이란 행위를 불필요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대표적으론, 돈이다.
“……예?”
“물론 시장에게 갚은 금액은 별개입니다. 그쪽은 그냥 제 호의로 봐주시죠.”
“시장님에게 갚은 돈이요? 그게 무슨…….”
“아, 죄송합니다. 아직 설명을 안 드렸었군요. 시장에게 진 빚은 제가 전부 갚았습니다. 앞으론 신경 안 써도 될 겁니다.”
“……네?”
“혹시나 시장의 보복이 걱정이시라면 문제없습니다. 거처도 책임지고 옮겨드릴 거니까요. 적어도 이곳보다는 살 만할 겁니다.”
“자, 잠시만요.”
릴리는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제, 제가 잘 정리가 안 돼서 그러는데…… 시장님께 진 빚을 전부 갚아 주셨다고요?”
“예.”
“……거기에 계약금까지 주신다고요?”
“맞습니다.”
“……어째서죠?”
“카일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품속에서 골드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릴리의 시선이 그 안으로 향했다가,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확히 100골드입니다. 승낙하신다면 지금 바로 받을 수 있는 금액이죠.”
릴리는 그 주머니를 한참 응시하다 힘겹게 눈을 뗐다.
“……정말 죄송하지만, 제안은 거절할게요.”
“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 이상은 힘들 정도로 좋은 조건이라 생각하는데요.”
“조건이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죠.”
릴리가 아까처럼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천리안이라도 달린 건 아니었으니까. 릴리는 옆에 앉은 카일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마법사의 실험실에 있었어요.”
“실험실 말입니까?”
“네. 다른 곳은 시장님 눈치 보느라 저한테 일거리를 전혀 주지 않거든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애초에 카일이 바르나울을 떠나는 이유는 실험 실패로 인해 어머니가 죽었기 때문이니까.
“아무튼, 그 마법사가 오늘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너한테 뽑을 데이터는 다 뽑았으니 아들을 데려오라고. 죽을 확률이 5프로밖에 안 되는데 뭐가 문제냐고…….”
“…….”
“당연히 거절했죠. 제가 돈 몇 푼에 자식 팔 만큼 썩은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마법사가 그다음에 뭐라 했는지 아세요?”
릴리는 내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럼 밖에서 아무 남자아이나 데려오라 하더라고요. 보수로 2실버 정도 꺼내면서요.”
나는 벙어리처럼 듣기만 했다. 어설프게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 릴리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제가 뭐라 대답했을 거 같으세요?”
“거절하셨겠죠.”
“네. 결과적으로는요. 대답하기도 전에 마법사님이 문을 닫아 버렸거든요. 솔직히 저는 반쯤 알겠다고 하기 직전이었어요.”
릴리는 피식 웃었다. 본인에 대한 조롱 섞인 웃음이었다.
“2실버. 그게 제 양심 가격이에요. 100골드…… 정말 큰돈이죠. 제 양심 같은 건 수백 번 살 수 있을 정도로요.”
“…….”
“그런 돈을 아무 이유 없이 제시할 거란 생각은 안 해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 아들에게 그만한 쓰임새를 발견하신 거겠죠.”
힘없이 주눅 들어 있던 눈빛에 생기가 돈다. 굳은 결의가 담긴 어머니의 눈이다.
“100골드라면, 저는 뭐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거기에 제 아들을 이용할 수는 없어요.”
“그렇습니까.”
“네. 갚아 주신 빚은 제가 어떻게든 돌려드릴게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선생님?”
릴리가 말하던 와중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가 했는데, 입꼬리를 만져 보니 끝이 올라가 있다. 나도 모르는 새 웃고 있던 모양이다.
사실, 대뜸 승낙했으면 오히려 실망했을 거다. 머리가 안 좋든 성격이 안 좋든, 아무튼 좋은 쪽은 아니란 소리니까.
나는 웃음기를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님의 판단이 맞습니다. 솔직히 제가 그리 좋은 고용주는 아니라, 준 거 이상으로 뽑아 먹을 생각이긴 했거든요.”
“……죄송해요.”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는 걸 설명드릴 수밖에 없네요.”
“그게 무슨……?”
경계심 가득한 얼굴을 마주 보면서, 나는 허리춤에 있는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힘없으면 당하는 시대 아닙니까.”
치리링. 흑철검이 미세한 소음을 내며 뽑혀 나온다. 릴리가 창백해진 얼굴로 카일의 몸을 감쌌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카일은 현재 100골드의 가치가 없습니다. 요컨대, 제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선 그 녀석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뜻이죠.”
곧이어 흑철검이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릴리는 눈을 질끈 감았고, 카일은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제가 카일에게 힘을 주겠습니다.”
나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저는 손해 보는 일을 정말 싫어하거든요.”
그리고 검을 내려침과 동시에…….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집이 폭발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