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64)
“내일부턴 나오지 않아도 된다.”
마법사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릴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 제가 뭐 실수라도 했나요?”
“그런 건 아니다. 필요가 없어졌을 뿐이지.”
무생물이라도 보는 듯한 무감정한 눈.
하지만 저 정도면 마법사 중에선 매우 상냥한 편이다. 칼페온에는 설명도, 통보도 없이 해고하는 마법사가 널렸으니까. 릴리에게 이 일자리가 더 간절한 이유였다.
“필요가 없다니요?”
“30대 여성에게 뽑을 수 있는 데이터는 모두 확보했다는 얘기다. 부족한 건…….”
마법사가 사람들이 늘어앉아 있는 의자를 힐끗 바라봤다. 노인부터 아이까지 전부 있는데, 딱 하나. 남자아이만 없었다.
그가 다시 릴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자식이 있나?”
“네? 아, 아들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나이는?”
“올해 열다섯이 됩니다.”
그 말에 마법사가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마침 잘됐군. 그 아이를 데려오는 건 어떤가? 돈은 자네와 똑같이 쳐주지.”
릴리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예?”
“이해가 안 가나? 실험에 참여시키란 말이다.”
“……죽을 수도 있는 실험에 자식을 말입니까?”
“뭐가 문젠가? 죽을 확률이 5프로도 안 되는 안전한 실험인데. 게다가 위험수당까지 쳐주지 않나.”
마법사는 정말로 불만이 뭔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릴리는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분노의 말을 속으로 삼켰다. 마법사에게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나마 있던 일자리도 잘릴 게 뻔했으니까.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아쉽군. 그럼 심부름은 할 수 있나? 물론 보수는 쳐주지.”
“……심부름이요?”
“그래. 간단한 일이다.”
마법사가 품에서 동전 한 무더기를 꺼냈다. 릴리는 그 속에서 실버 하나를 발견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제,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그럼 밖에 나가서 남자아이 하나만 데려오게.”
동전을 향하던 릴리의 시선이 멈칫했다.
“……남자아이를요?”
“그래. 이왕이면 고아가 좋겠군. 그쪽이 더 쓰기 쉬울 테니 말이야.”
릴리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답답해진 마법사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설마 이것도 못 하겠나?”
“……혹시 다른 일거리는 없으신지.”
“없다. 버러지 같은 게. 더 이상 내 시간 낭비 말고 꺼져라.”
쾅!
릴리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대물림의 숲을 벗어나고 2주일. 나는 칼페온 변방에 박힌 한 도시의 입구에 도착했다.
바르나울.
레이튼이 아니라 여기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확인할 게 있었으니까.
내가 만든 ‘벨리아 대륙 전기’의 2부는 스타팅 지점을 플레이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3 왕국을 고를 수도, 심지어는 황폐화된 레이튼을 고를 수도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게 2부를 대표하는 주인공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게임의 2부는 바르나울에 살고 있던 주인공이 어떤 사정으로 인해 거처를 옮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요컨대 스타팅 지점을 고르는 건 플레이어가 아닌, 주인공의 선택이란 뜻이다.
……뭐, 설정이 그렇단 거고, 결국 결정은 플레이어가 내리는 거지만.
아무튼, 설정대로라면 바르나울은 현재 시점에서 2부 주인공이 살고 있을 도시. 들러 볼 가치는 충분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정보가 되니까.
도시를 감싸고 있는 돔 형태의 반투명한 마법 장막을 구경하다가 입구로 몸을 향했다.
“멈추시오.”
안에 들어가려는 순간, 입구의 경비가 창을 들어 입장을 제지했다. 그리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얼굴에 화색이 돈다.
“혹시 아르곤 남부에서 오셨소?”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검은색 머리카락은 거기 말곤 드무니까. 설마 제국인은 아닐 거 아니요.”
경비가 피식 웃었다.
“친구 중에 거기 출신이 하나 있었지. 아무튼, 멀리도 오셨군. 여행이오?”
“예. 마법에 관심이 있어서요. 아르곤에 마법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칼페온과는 차이가 크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경비는 도시 안을 흘끔거리더니 내 쪽으로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칼페온은 처음인 거 같아 노파심에 말하는 건데, 혹시라도 마법사 심기는 절대 건드리지 마시오. 여기선 놈들 말이 법이니까.”
“대충 듣기는 했습니다.”
“대충 들은 정도론 안 되는데…… 뭐, 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하시겠지.”
경비가 살짝 고개를 젓고는 내게 다가와 손등에 도장을 찍었다. 그 안에서 희미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1일 체류권이요. 그 이상 머물려면 시청에 가서 돈을 지불해야 하지. 혹시라도 몰래 떼먹을 생각은 마시오. 바로 장막과 연동된 마법에 공격당할 테니까. 그리고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에도 공격당할 수 있긴 한데…….”
경비가 내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하하하 웃었다.
“어지간히 간 큰놈이 아니고서야 칼페온에서 그러진 못하겠지. 됐으니 그만 들어가시오. 아, 장막은 그냥 통과하면 될 거요.”
나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도시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징, 하는 소리와 함께 장막이 일렁이고, 약간의 저항감이 몸을 감싼다 싶었을 때는 이미 도시에 들어온 후였다.
“…….”
나는 별다른 감회도 없이 곧바로 보이는 가게의 유리창에 다가갔다. 그 안에 흑발의 중년 남성이 모습을 비친다.
스쳐 지나가면 바로 잊을 것 같은 평범한 인상. 하지만 칼페온에서 드문 머리 색 덕분에 특정이 쉬운 용모. 딱 원하던 대로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머리 부분을 톡톡 쳤다. 그러자 아까까지는 보이지 않던 황동색 투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상으로 받은 ‘타른헬름’.
과연 유물이라고 해야 하나. 혹시나 도시 장막에 걸려 있는 ‘탐색’ 마법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눈치채는 낌새도 없다. 거기에 온오프 기능까지. 진짜 유용한데.
다시 투구를 툭툭 쳐서 모습을 감추고 바르나울 제4구역으로 향했다. 처음 오는 곳이었지만, 길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가야 할 방향은 코드가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PLAYER-2]
2부 주인공을 뜻하는 코드.
사실 있을 거라 반쯤 확신하긴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감회가 새롭다. 감동……은 좀 과하고. 신기한 기분이라 해야 하나. 누가 뭐래도 게임에 두 명뿐인 주인공 중 하나였으니까.
얼마 걷지 않아 오물이 굴러다니는 더러운 길거리가 나왔다. 예전 레이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기도 만만찮다.
하긴, 제4구역은 바르나울에서 제일 빈곤한 빈민촌. 거기다 3왕국 중 가장 평민 대우가 안 좋은 칼페온이다. 이 정도는 당연한가.
그런 태평한 감상을 하며 거니는데.
쾅!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머리의 소년이 튕겨져 나왔다.
……이건 또 뭐야.
내가 황당한 눈으로 보든 말든, 부서진 문에서 나온 사내는 쓰러져 있는 소년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내가 몇 번이고 말했잖냐. 시장님이 꿔 주신 돈이 우스워 보이냐고.”
남자의 말에 소년은 멱살이 잡힌 채 퉤, 바닥에 침을 뱉었다.
“……돈은 우습지 않아. 시장은 우습지만.”
“하, 이 맹랑한 꼬맹이가 아직도. 머리부터 다져 줄까?”
“얼굴은 안 치는 게 좋을 텐데. 엄마가 눈치챌 거야.”
중딩쯤 되는 꼬맹이가 엄마 타령하는 게 우스워 보일 만도 한데, 그런 느낌은 전혀 없다. 목소리가 너무 덤덤하고 단순히 사실을 읊는 듯한 어조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나이대답지 않은 음울한 눈빛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 내용이 남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는 거다.
“이 새끼가…… 오냐, 내 특별히 얼굴만 빼고 구석구석 다져 주마.”
남자의 주먹이 허공에 덜렁거리는 몸으로 향한다. 하지만 정작 그 폭력의 당사자가 될 소년은 감정 없는 눈으로 다가오는 주먹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주먹이 닿기 직전.
턱.
내 손바닥이 그 진로를 막았다.
“이건 또 뭔…….”
“대충 얘기 들으니 빚쟁이 같은데, 거기까지만 하지. 돈 빚졌지 주먹 빚진 건 아닐 텐데.”
“허, 나 어이가 없어서.”
남자가 소년을 놓고 날 노려봤다.
“딱 봐도 이 도시 사람 아닌 거 같은데, 참견 말고 그냥 가쇼. 괜한 오지랖 부리다 훅 가는 수가 있어.”
“뭐, 그 의견엔 동의하지. 그런데 어차피 부린 오지랖, 어설프게 부리면 그것만큼 쪽팔린 게 또 없더라고.”
“후회할 텐데.”
남자는 인상을 찡그리곤 주먹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녀석의 주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미동도 없자, 그제야 남자가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되었다.
“……일단 놓아주시오.”
“다시 주먹질 안 하겠다 맹세하면.”
“……맹세하지.”
휙. 남자가 잡혀 있던 손을 빼내곤 날 노려봤다.
“내가 여기 시장님에게 고용된 사람이란 건 아시오?”
“몰랐지. 그래서 용건이 뭔데?”
“……저놈 애비가 시장님께 진 빚을 돌려받는 거지. 그 책임감 없는 놈이 갚지도 않고 뒈져 버렸거든. 그러니 그 자식이 돈을 갚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소?”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피식 웃었다.
“알았으면 그만 가 보쇼. 아무래도 동종업계 사람 같은데, 도시에서 시장 눈 밖에 나서 좋은 일 없을 테니까.”
동종업계라…….
남자의 위에 떠오른 코드를 바라봤다.
[NPC-1-MC-C]
역시 용병이었나. 하긴, 이런 일 맡을 놈들이 또 누가 있겠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덤덤히 물었다.
“그 빚이 얼마야?”
“왜? 대신 갚아 주기라도 하시려고?”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관두쇼. 등급은 꽤 높은 것 같지만, 한낱 용병 벌이로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니.”
“대답이나 해.”
“허, 참. 어차피 갚지도 못할 거 괜한 오지랖은…… 머리 색 같다고 유세라도 부리는 건지 원…….”
남자가 다 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품에서 종이를 꺼내 보여 줬다.
“여기 차용증이요. 원금 10골드, 이자가 90골드. 총 100골드지. 알아들었으면 그만 가 보쇼.”
남자는 더 볼일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갚을 리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뭔 이자가 원금의 9배냐.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티 내지 않고 속에서 작은 자루 하나를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이건 또 뭔 수작이지 하는 눈으로 자루를 열어 본 남자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대체…….”
“정확히 100골드지. 시장한테 전해.”
그 손에서 차용증을 빼앗아 품에 넣었다. 남자는 이렇다 할 반항도 못 한 채 멍한 눈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놈을 한 번 흘겨보고 입을 열었다.
“뭐 해? 얼른 안 꺼지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