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63화 (63/225)

너의 코드가 보여 (63)

“저자, 음…… 저분……? 아무튼. 저쪽이 범죄자를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겁니까?”

“응.”

“3급을 잡는 데 말입니까?”

“……어?”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지 카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래 봤자 이미 늦었다.

“카시아 님 말대로라면 4급이 3급을 상대로 유효타를 먹였단 말이 됩니다. 맞습니까?”

“그, 그렇게 되나?”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줬을지 모르지만…… 그게 결정적이라면 저로선 무슨 방법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설마 곁에서 응원한 걸로 결정적이란 표현을 쓰지는 않을 테고.”

“……아, 하하.”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카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젠장, 아직 전력을 드러내고 싶진 않은데…… 그냥 밝혀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추궁하던 2급이 갑자기 피식 웃는다.

“그건 너무 현실성 없으니 곁에서 주의를 끌었다 정도로 가시죠.”

“……뭐?”

“카시아 님은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고, 그걸 회복하는 동안 리안 님이 지켰다. 이것도 현실성 없지만, 사람들은 납득할 겁니다. 원래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요.”

……그걸로 되는 건가? 같은 의문을 떠올렸는지 카시아가 물었다.

“너, 아까는 호송할 생각 아니었어? 뭐 왕국으로 데려가니 뭐니 하고 있었잖아.”

“……호송이라니, 증인 보호라 해 주시죠. 그리고 저 둘이 3급을 쓰러뜨렸다는 게 납득이 안 됐을 뿐이지, 카시아 님이 계시다면 말이 다르지요. 어차피 혼자서 금방 제압했을 거 아닙니까.”

“그, 그렇긴 하지?”

“……의문문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뭐 됐습니다. 너희들은 혹시 다른 말 들은 게 있나?”

2급이 도열해 있던 기사들에게 물었다. 그 즉시 대답이 튀어나온다.

“없습니다!”

“3급 정도면 저도 10분은 버틸 수…….”

“그건 아니지 새꺄. 넌 10초면 끝이야.”

옆에 있던 기사가 동료의 머리를 친다. 하지만 맞은 사람은 화내기는커녕 폭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이 주변까지 번져 숲을 가득 메운다. 2급이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렇답니다. 뒷말 나올 걱정은 마시지요. 전부 믿을 만한 놈들이니까.”

“그건 걱정 안 하는데, 거짓말까지 쳐 가면서 쟤 도우려는 이유가 뭐야? 너 옛날에 나한테 고백할 땐 되게 꽉 막힌…….”

“사인값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2급이 카시아의 말을 끊으며 재빨리 답했다.

……아까 표정이 떨떠름했던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은데.

카시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 쪽을 바라봤다.

“사인이라니…… 쟤 얘기야?”

“예. 동생 친구분이라면서 모르셨던 겁니까? 최근 아르곤 왕국에서는 제일 유명한 사람입니다.”

“엥? 쟤가?”

“……정말 모르셨나 보군요.”

그 뒤로는 내가 어째서 유명한지에 대한 일장 연설이 시작됐다.

곁에서 듣고 있자니 쪽팔려서 죽고 싶어졌다.

그 틈을 타 다가온 기사들 검에 사인을 해 주는 사이, 연설을 마친 2급이 헛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크흠. 미안하네. 어쩌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됐군.”

“괜찮습니다. 그보다 저흰 이제 왕국에 안 가도 괜찮은 겁니까?”

“카시아 님이 보증해 주었으니 가지 않아도 상관은 없네. 하지만 나는 아르곤에 오는 걸 권하고 싶군.”

“예?”

“뭘 그리 놀라나? 영입 제안일세.”

2급이 피식 웃는다.

“그 나이에 4급인 것도 믿기지 않는데, 거기에 더해 혼자 레이튼에서 상회까지 성공시켰지. 사실, 이런 능력자를 탐내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겠나? 10년만 지나도 온 대륙에 이름을 떨칠 게 확실한데 말일세.”

“…….”

“거기다 아르곤 역사상 자네만큼 인기를 끈 기사도 없네. 이번에 3급 상대로 버텼다는 소문이 돌면 더 그럴 거야. 대중은 영웅을 좋아하는 법이거든.”

별로 유명해지고 싶진 않은데.

하지만 아르곤에 가는 건 확실히 끌렸다. 안 그래도 레이튼 꼬라지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오던 차니까. 2년 전보단 확실히 나아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3왕국에 비할 바는 못 되지.

고민하는 기색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2급이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시민권은 뭐, 당연하지. 혹시 상회가 걸리는 거라면 걱정하지 말게. 내 권한으로 5년 정도는 세금도 면제해 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5년 내로 3급 수준에 오르면 국가 기사 지위도 약속하겠네.”

“……네?”

뭘 약속해?

5년의 세금 면제보다 뒤에 붙은 조건에 더 놀랐다.

국가 기사.

급수 높다고 무조건 달 수 있는 게 아니라, 같은 등급에서도 월등한 실력을 증명한 엘리트에게만 주어지는 직위다. 어찌 보면 신전의 이단 심문관과 비슷한데, 가지는 권한은 비교도 안 됐다. 3급 이상은 피할 수 없는 국가의 통제도 거부할 수 있을 정도니까.

같이 듣던 카시아도 황당했는지 한마디 한다.

“너네 국가 기사 이름이 언제부터 그렇게 마구 뿌리는 싸구려가 됐냐?”

“싸구려 된 적 없습니다. 받을 만한 사람한테만 뿌리는 거지요. 저 같은 늙은이야 상관없지만, 저런 젊은 나이부터 기사단에 얽매이긴 싫을 거 아닙니까.”

“애초에 국가 기사 약속할 깜냥은 되고? 그거, 1급은 돼야 줄 자격 생기는 걸로 아는데.”

“단장님께 말씀드릴 겁니다. 그분도 제 보증이면 허락하실 테고요.”

카시아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야, 그런 건 약속이라 하면 안 되지!”

“허락 안 하시면 부단장 그만둔다고 협박이라도 하면 그만입니다.”

“……네가 정말 막 나가는구나.”

……뭔가 내 의견은 상관없이 얘기가 진행되는 느낌인데.

아직 아르곤에 가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한 적 없건만, 하는 짓 보면 이미 내가 결정이라도 내린 모양새다.

일단 말이라도 꺼내 보자 싶어서 입을 열려는데, 카시아가 폭탄 발언을 쏟아 냈다.

“그럴 거면 그냥 겔리안으로 와라. 잘해 줄게.”

“겔리안은 이종족 연합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인간을…….”

2급이 황당한 기색으로 반박하자 카시아가 발끈했다.

“정확히는 ‘다종족’연합이야. 인간도 몇 있어.”

“있어 봐야 수백은 됩니까? 저희 기사단원만 합해도 그 숫자는 넘을 겁니다. 게다가 기사단도 없는 나라에서 잘해 주긴 뭘 잘해 준단 건지…….”

“야, 아무리 못해도 수천은 되거든? 네가 이종족에 환장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구나? 본인부터 이종족한테 고백한 입장이면서. 카시아 누나, 제가 크면 부디 저와 결혼…….”

“……어릴 적 얘기는 꺼내지 마시죠.”

카시아가 헹 웃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무슨 종족이 좋아? 엘프? 수인? 거인? 페어리나 정령이면 조금 곤란하긴 한데……. 뭐, 취향은 자유니까. 아무튼, 최대한 맞춰서 주선해 볼게. 어차피 관심 있을 거 아니야.”

“관심 없는데요.”

더 듣기 뭐해서 딱 잘라 말했다.

“……관심 없다고?”

“네.”

“혹시 그쪽이야?”

어째서 데자뷰가.

“그쪽 아니에요. 그냥 연애에 별로 관심 없을 뿐이지.”

“……스물도 안 된 게 연애에 관심이 없어? 너 혹시 고…….”

“역시 사내라면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2급이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 더 마음에 드는군. 혹시 원하는 다른 조건이 있으면 최대한 맞춰 주겠네. 일단 아르곤에 도착하고 이야기하지. 너희들, 저놈 좀 제대로 묶…….”

“죄송하지만 아르곤도 사양하겠습니다.”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2급이 멍청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저렇게 보면 좀 미안한데.

“사양한다고? 거절한다는 뜻인가?”

“예.”

“……아무래도 국가 기사가 뭔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지금까지 아르곤 출신이 아닌 사람 중엔 받은 자가 없을 정도로 고귀한 직윌세. 혹시 5년 내로 3급에 도달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거라면, 기간을 더 늘려 줄 수도 있네.”

“잘 알고 있습니다. 5년 내로 3급에 도달할 자신도 있고요.”

“……겔리안으로 마음을 굳힌 겐가?”

거기도 안 간다니까.

그쪽으로 갈 거 같았으면 차라리 아르곤을 택했을 거다. 좋은 제안이라고 내놓는 게 이종족 소개팅이라니.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나는 당황한 얼굴로 서 있는 카시아와 2급의 눈을 마주 보고 똑똑히 말했다.

“저는 레이튼에 남겠습니다.”

* * *

“미친 거지 진짜.”

“그 말 한 번 더 들으면 백 번째예요.”

“돌아 버린 거지 진짜.”

“…….”

모르겠다. 떠들려면 떠들라지.

카시아의 중얼거림은 무시하고 전리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2급이 떠나기 전에 보상이라며 주고 간 것들이다.

일단 사용자의 모습을 바꿔 주는 ‘타른헬름’.

……진짜 이걸 줬다고? 전투 쪽으로 도움 되는 물건은 아니지만, 그 활용성이 어마 무시한 유물이다.

보상으론 너무 과한 거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언젠간 아르곤에 올 거라 생각하고 건넨 모양이다. 그럴 생각 없는데.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일단 챙겨 두자.

그리고 피를 먹일 때마다 그걸 마력으로 전환해 주인에게 돌려주는 ‘살생석’……. 시X, 이건 테오도르 물건이잖아. 이딴 건 왜 줬대?

부정 탈 거 같아서 얼른 가방 구석에 처박아 뒀다.

그밖에도 이것저것 있었는데, 전부 최소 수백 골드는 호가할 유물들이다.

아무리 3급의 범죄자라지만, 보상을 이렇게나 지급할 줄이야. 아르곤에서 진짜 사태를 심각하게 보긴 했나 보다.

떨거지들까지 가방에 탈탈 털어 넣고 아직도 중얼거리고 있는 카시아를 바라봤다.

“진짜 하나도 필요 없어요?”

“국가 기사 자리랑 이종족 여친 두고 똥통으로 돌아가겠다니, 미친…….”

“할머니?”

“죽는다 진짜.”

카시아는 잠깐 나를 흘겨보더니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필요 없어. 애초에 진짜 내가 잡은 것도 아니고. 요정의 존재는 겔리안에서 극비 취급이니까 알려지기 전에 나섰을 뿐이야. ……그러고 보니 너 요정이 뭔지 안다 하지 않았나?”

“카트발이 알려 줬어요.”

“그 병신…….”

카시아가 이를 갈며 한쪽을 노려봤다. 레이튼이 있는 방향이다.

정작 당사자는 요정의 요 자도 꺼낸 적 없지만…… 나중에 사과하면 되겠지.

그보다, 역시 테오도르를 쓰러뜨린 건 콘시라 생각하고 있었나. 하긴, 4급따리가 3급 해치웠단 사실보다는 그쪽이 이치에 맞긴 하지.

뭐, 내 입장에선 변명거리 생각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고마운 일이다.

나는 유물로 가득 찬 가방을 메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갈 건데, 어쩔래요?”

“진짜 레이튼으로 간다고?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봐. 엘프, 만나고 싶지 않아?”

“별로요.”

그 세계수탕스 새끼들이 뭐 좋다고. 게다가 엘프는 레이튼에도 있다. 반쪽짜리긴 하지만.

카시아는 희귀생물이라도 보는 눈으로 날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레이튼에 꿀이라도 발라 둔 건지 원. 나도 모르겠다. 두고 봐. 나중에 이종족이랑 사귀고 있으면 확 훼방 놓아 버릴 거니까.”

그렇게 저주 같은 말을 남기곤 카시아가 겔리안 방향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내심 한숨 쉬었다.

국가 기사.

그 자리가 탐나지 않은 건 아니다. 권한은 많고 책임은 적은 지위니까.

하지만 얻고자 한다면 언제든 얻을 자신이 있는 자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 레이튼을 포기하긴 아깝지. 설정대로라면 슬슬 이벤트 발생할 시기기도 하고.

한 줌 남은 미련마저 털어 버리고, 대물림의 숲 입구 쪽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소외돼서 삐진 건지 콘시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들어가지 않고 굳이 남아 있는 건, 다시 혼자 남는 것에 대한 두려움 탓일까.

“콘시.”

―……왜 불러? 너도 그냥 가면 되잖아.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우리 사이 좋았잖아.”

―좋기는. 전기나 쏘아댔으면서.

콘시는 퉁명스레 답하면서도 파닥파닥 날아와 손 위에 안착했다. 튕기기는. 나는 피식 웃고 말을 이었다.

“아마 당분간은 못 올 거야. 자주 들르기엔 좀 멀어서.”

―……누가 와 달라고나 했나?

“하지만 다음에 왔을 땐, 저 숲을 통과할 생각이야.”

콘시는 멍청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뭐?

“저기, 통과할 거라고.”

대물림의 숲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오늘 통과해 볼 생각이었는데, 아직은 무리더라. 그래도 거의 끝자락까지 가긴 했어.”

―…….

“숲 통과하는 사람 나오면 너도 저기서 나올 수 있는 거 맞지?”

설정이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 확인차 물었다. 콘시가 멍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콘시와 눈을 맞췄다.

“그러니까,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땐 같이 나가는 거야. 괜찮지? 레이튼도 여기보단 낫겠다.”

―……응.

콘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웅얼거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