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62)
―……진짜 이겼잖아?
육성이 아님에도 그 속에 담긴 경악의 감정이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나는 개운찮은 심정이었다.
“이긴 거 아니야.”
―뭐? 저 모습 안 보여?
콘시가 치지직 전기와 함께 바들바들 떨고 있는 테오도르의 몸을 가리켰다.
―단번에 저 꼴로 만들어 놓고 뭔 소릴 하는 거야?
“날 안 봤어.”
콘시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날아올랐다.
―저 남자가 봐주길 원했던 거야? 그쪽 취향이었구나.
“아니야.”
―내 앞에선 숨기지 않아도 괜찮아. 난 요정이니까, 인간의 관념엔 얽매이지 않아.
“아니라고.”
기절한 테오도르의 몸에서 타는 고기 냄새가 풍겨 나온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코를 쥐었다.
“마지막에 날 노린 게 아니었어. 공격을 나한테 날렸을 뿐, 시선은 계속 너만 보고 있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검의 능력을 썼다지만, 3급 기사가 그렇게 완전히 멈추는 건 말이 안 된다. 살짝 멍해지는 정도면 모를까.
아마 오랜 도주 생활과 시련에 입은 정신적 타격이 상당했단 거겠지. 가만히 선 허수아비 해치우는 건, 7살 꼬맹이도 가능한 일이다.
콘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쪽도 말없이 기습했잖아. 그럼 쌤쌤 아니야?
“싸움에 기습이 어딨어? 무슨 준비 땅 하고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본 기사들은 전부 준비 땅 하고 싸우던데.
“그건 결투고. 이거랑은 달라.”
―음…… 인간들 싸움은 너무 하찮아서 이해하기 힘드네.
전기 맛 한 번 더 보여 줄까 하다가 꾹 참았다. 부탁 안 들어줬으면 쐈을 텐데. 나는 그 대신 테오도르의 몸을 구속해 내팽개쳐 뒀다.
이걸로는 10분도 못 버티겠지만…….
힐끗. 테오도르가 걸어왔던 방향을 흘겨봤다. 거기서는 수십 개의 코드가 다가오고 있었다. 10분이면 충분하겠네.
대충 손을 터는데, 머리 위를 날던 콘시가 살며시 내려왔다.
―사실 나는 다른 종족 싸움은 잘 몰라. 별로 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거든.
“이런데 처박혀 사니까 그렇지.”
―누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 나도 이런데 100년 넘게 처박혀 지낼 줄 몰랐단 말이야.
콘시는 새침한 목소리로 쏘아대더니 다시 손위에 안착했다. 이젠 그냥 의자 취급인가.
―아무튼, 보통 본인보다 기운이 몇 배는 강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건 알아. 어떤 조건에서든 말이야. 그럼 대단한 거 아닌가?
“대단하지.”
―근데 왜 똥 씹은 표정이야?
“더 대단할 수 있었으니까.”
승리를 100프로 확신한 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 한 단계는 위의 상대니까. 하지만 자신은 있었다. 적어도 지지는 않을 자신이.
콘시가 고개 들어 내 얼굴을 보더니 표정을 구긴다.
―둬 돼돤활 수 이쒀쑤니꽈. 그거 알아? 너 방금 되게 재수 없…… 엑.
치지직. 나도 모르게 전기부터 나갔다. 콘시의 몸이 잠깐 떨리더니 삐졌는지 등을 돌리고 앉는다. 그래 봤자 내 손바닥 안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는데, 이젠 대놓고 가까워진 기운들이 느껴졌다.
숨길 생각도 없는 건가.
하긴 굳이 그럴 필요 없을 실력이긴 하다. 추격대로서는 어떤가 싶지만.
“너희들은 누구지?”
말을 걸어온 건 수십 명의 기사 중 선두에 선 남자였다. 모두 4급 이상뿐인데, 그 기운을 모두 합쳐도 저 사내 하나만 못하다.
[KN-2-75]
기사 2급, 서열 75위. 고유 코드 없는 거 보니 게임 내 등장인물은 아니다.
그보다 75위라……. 저 정도면 유명한 기사단 부단장쯤은 될 텐데, 저런 인물이 왕국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보통 없다. 아르곤에서도 사태를 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겠지.
나는 검을 집어넣어 적의가 없음을 나타냈다.
“레이튼에서 왔어요. 얜 여기 살던 정령이고.”
내가 무슨 정령이냐며 발버둥 치는 콘시의 입을 막았다. 굳이 요정이 뭔지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기사는 의아하단 표정을 했다.
“레이튼? 거기서 대물림의 숲까진 무슨 일이지?”
“관광이요. 수풀 하나 없는데 숲이라니,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기사가 얼굴을 굳히고 구속된 테오도르를 가리켰다.
“대물림의 숲에 관광이라니. 백 분의 하나라도 그럴 순 있지. 하지만 저놈은 이곳을 정확히 노리고 왔네. 왕국의 범죄자가 추격당하는 와중에 굳이 여기까지 와서 관광 중인 일반인과 만난다? 이건 우연으로 보기 힘들군.”
콰앙.
기사의 몸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온다. 하지만 그게 테오도르 것보다 약하다. 2급이 3급보다 못할 리는 없으니 저쪽에서 적당히 조절하고 있단 소리겠지.
여기 세계관에서 저 정도면 거의 천사다. 덕분에 나도 별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우연이 아니니까요. 제가 여기 온 건 그냥 관광이지만, 놈은 저를 노리고 온 게 맞습니다.”
“자네를? 어째서지?”
“제가 그 딸과 같이 테오도르의 범죄를 폭로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뭐?”
뿜어져 나오던 마력이 한순간에 멈춘다.
나는 테오도르의 딸을 풀어줬을 뿐, 직접적으로 관여한 적은 없으니 모를까 걱정했는데…….
저렇게 놀라는 거 보면 알려지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반응이 내 생각보다 훨씬 격했다.
“저자가 지금 그 괴물의 악행을 폭로했다고 했나?”
“레이튼 출신에 저 금발…… 확실히 페트라 님 말대로긴 한데.”
“아니, 그럼 저자가 진짜 그 ‘망국의 초신성’이란 말인가?”
조용히 나열해 있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웅성대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군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마치 티비 속 아이돌이라도 직접 본 것 같은 모습.
……그보다 망국의 초신성은 또 뭐야. 여기 애들은 뭘 저리 붙이는 걸 좋아하지?
“조용!”
척! 웅성대던 기사들의 말소리가 순식간에 멈춘다. 그 와중에도 슬쩍슬쩍 내 모습을 힐끗거리고 있다. 선두의 2급이 그걸 보고 혀를 쯧쯧 찼다.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 들린다. 너희들은 지금 상황이 웃긴가?”
“아닙니다!”
“그럼 내가 조또 만만해서 그런가 보군.”
“아, 아닙니다!”
뭔가 PTSD 오는 기분인데.
순식간에 기사들을 제압한 2급이 내 쪽을 바라봤다.
“일단 묻겠네만, 자네 이름이 리안 맞나?”
“동명이인이야 있겠지만…… 일단 맞아요.”
“혹시 리안 상회의 주인이란 것도 사실인가?”
“그것도 맞긴 한데…….”
떨떠름하게 말을 늘어뜨리자 2급이 순간 얼굴을 굳힌다. 그리고는 검집에서 칼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치이잉.
이렇게 갑자기 공격을 한다고?
과연 2급. 3급보다 기습 능력까지 월등하다는 건가. 테오도르 건 금방 눈치챘는데, 이쪽은 기미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나도 황급히 검을 뽑아 들려는 순간. 날아든 건 공격이 아니라, 작은 목소리였다.
“여기 사인 좀 부탁하네.”
“…….”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내밀어진 흑철검을 바라봤다.
* * *
“설마 여기서 왕국 최고 인기인을 만날 줄은 몰랐군. 자네도 본인이 그리 유명하다는 사실, 알고 있었나?”
“몰랐습니다.”
“자네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네. 나도 그중 하나고. 혹시 괜찮다면 얘기해 줄 수 있겠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아, 거기는 사랑하는 릴리에게로 부탁하네. 내 딸아이 이름일세.”
“……참고로 나이가?”
“올해 8살이 되지.”
“그건 좀.”
친애하는 릴리에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사인 같은 건 현실에서도 해 본 적 없다 보니 어떻게 써야 할지 난감했다. 대충 리안 올림이라 덧붙였는데…… 이건 편지에 쓰는 거던가?
아무튼, 2급은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고맙네. 딸아이가 밤마다 연락해서는 이왕 나간 김에 레이튼에 들렀다 오면 안 되냐 성화였거든. 내가 뭐 놀러 온 줄 아는지 원…….”
뭐라 반응하기 난감해 그냥 웃어넘겼다.
나도 실감 안 나지만, 최근 아르곤에서 가장 유명한 게 나란다. 왕국 역사상 손에 꼽는 범죄자를 고발한 것도 모자라, 다 망해 버린 레이튼에서 자수성가한 능력자로 보인다나?
안 그래도 흑철석 시리즈 입소문 퍼지는 게 빨라도 너무 빠르다 싶었는데, 이런 비하인드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괜찮은 겁니까?”
“뭐가 말인가?”
“왕국민들은 레이튼 출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요.”
게임에서도 비슷하다. 스타팅 지점을 레이튼으로 설정하면 온갖 무시와 비아냥 듣고 다니는 게 일상이니까. 그야 본인들과 싸운 제국의 사람인데 좋아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2급은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지. 지금도 왕국 중추에는 자네를 아니꼽게 보는 이들도 많네. 뭐, 제국에 대한 반감도 있을 테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있겠지.”
“…….”
“하지만 기사들이나 백성들 사이에선 아니야. 숫제 영웅 취급하는 자들도 있을 정도지. 애초에 전쟁 터졌던 9년 전이면 자네는 걸음마나 겨우 하던 시절 아닌가.”
그 정돈 아닌데. 9년 전이면 여기 있지도 않을 시기긴 하지만.
“아무튼, 싫어하는 사람보단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거지. 나도 그중 하나고, 저놈들도 비슷할걸세.”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확실히 해야 할 게 하나 있군.”
2급은 살짝 얼굴을 굳히더니 구속된 테오도르를 가리켰다. 이제 몸에서 연기는 안 나지만, 여전히 정신은 잃은 채다.
“저자를 제압한 건 누군가? 자네 나이에 4급…… 믿기 힘든 재능이네만, 그렇다고 3급과 싸우진 않았겠지.”
“음…… 그게.”
“혹시 저 정령인지 페어린지 모를 종족의 소행이라면, 일단 왕국까지 같이 가 줘야겠네. 사안이 사안인지라 조사가 필요하거든.”
……그건 곤란한데.
사실 콘시는 이 숲을 벗어나지 않는 게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거다. 대물림의 시련이라는 ‘관념’에 묶여 있는 상태니까.
하지만 요정이 뭔지도 모르는 인간이 관념체의 사정을 이해할 순 없겠지.
그렇다고 내가 제압했다 밝히고 싶지도 않았다. 믿지도 않을 게 뻔하지만, 믿는다 해도 문제다.
이 세계에서 급의 차이는 절대적.
그런 상황에 나라는 존재는 이레귤러에 가깝다. 아무리 이런저런 조건이 붙었다 한들 1대1로 한 단계 위 상대를 쓰러뜨렸다는 사실은 보통 받아들이기 힘들 거다. 대놓고 배척할 가능성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 뒤쪽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거 내가 잡았어.”
“누구…….”
바로 싸움 전에 옮겨 둔 카시아였다. 2급이 고갤 돌리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시아 님?”
“응, 응. 오랜만이네.”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아무래도 서로 안면 있는 사인가 보다. 기사 쪽 얼굴이 떨떠름한 것이 걸리긴 했지만.
카시아는 기지개를 켜며 허리를 두드렸다.
“어우, 죽겠네. 아, 왜 여기 있냐고? 나는 쟤 만나려고 왔어.”
“카시아 님도 말입니까?”
“응? 나도? 음…… 그렇지 뭐. 내 동생이랑 아는 사이라.”
……말하는 거 보니 방금 일어나서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도 못 한 것 같다. 눈치껏 나서 준 건 고맙지만, 이거 구원이 아니라 파멸이 될 수도 있겠는데.
내가 대화에 끼어들려는 순간, 더 빠르게 치고 들어온 목소리가 있었다. 떨떠름한 얼굴의 2급 기사였다.
“그런 우연이…… 하지만 다행이군요. 마침 카시아 님이 계신 덕분에 저 범죄자를 잡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혹시 원하는 보상이 있으신지?”
“……범죄자? 보상? 아…… 괜찮아, 괜찮아. 사실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 한 건 따로 있거든.”
……뭔가 예감이 안 좋은데.
서둘러 카시아의 말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내가 입을 막는 것 보다, 그 손가락이 날 가리키는 게 더 빨랐다.
“잡은 건 대부분 쟤 덕분이야. 그러니까 보상도 쟤한테 줘야지.”
……젠장.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