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61)
테오도르가 끌려온 건 그로부터 10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제 발로 왔음에도 끌려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는, 바로 그 표정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대체 무슨 종족이지?”
“무슨 시련이었어?”
리안은 테오도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 콘시는 그 위에 날아가 앉았다. 그게 그리 자연스러운 이유는 본인도 몰랐다. 그냥 손을 보는 순간 날개가 절로 움직였다.
―악몽의 시련. 본인이 가장 겪고 싶지 않은 일을 꿈꾸게 하는 시련이야.
“알 만하네.”
리안이 피식 웃었다.
“추격대에 잡히는 꿈이었겠지.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죽기보다 싫을 테니까.”
테오도르가 속한 아르곤은 세 왕국 중 법이 가장 엄격한 곳이다. 마법사 중심인 칼페온, 사실상 부족 집합체인 겔리안 연합. 그 둘과는 기조부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칼페온에서 인간은 소모품이다. 마법사 입장에서 평민은 먹고 싸기만 하는 버러지일 뿐이니까.
마나를 감지 못하니 마법 재료도 채집할 수 없고, 기껏 만든 식량은 본인들이 죄다 처먹어 버린다. 굳이 가치를 따지자면…… 생체 실험용 모르모트 정도일까. 밥버러지들을 위한 법체계 같은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칼페온은 사실상 국가라는 이름의 거대한 실험장에 불과했다.
겔리안은 수많은 이종족들이 모여 만든 연합체다. 공통점이라곤 인간이 아니라는 것 하나뿐인 그들은, 도저히 단합이 불가능했다.
엘프가 살기 위해선 수풀 우거진 울창한 숲이 필요한데, 거인이 살기 위해선 나무 한 그루 없는 드넓은 평야가 필요하다.
자연체인 정령들에겐 서로 죽이는 게 놀이의 일종인데, 물질체인 다른 종족들에게 살인은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는 문제다.
이런 자들을 하나로 묶을 법체계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연합의 선택은 간단했다. 그냥 각 종족이 알아서 하도록 맡겨 버린 거다.
겔리안은 사실상 연합이라는 포장지에 가려진 초등학교 학급 잔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 둘에 비하면 아르곤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타이탄이라는 병기는 인력을 엄청나게 잡아먹는다. 칼페온처럼 평민이 쓸모없어지는 일이 없다는 소리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같은 특성,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한다. 겔리안처럼 제각기 놀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배경 아래 아르곤에서는 자연스레 법체계가 발달했다. 멸망 전 제국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철의 아르곤. 그 이름에는 다른 왕국과 비교되지 않는 단호한 심판의 의미가 새겨져 있었다.
“전멸시킨 마을만 최소 5개. 죽인 사람은 1,000명이 넘지. 아무리 국가 주요 전력인 3급 기사라도 사형은 피할 수 없을 거야.”
“…….”
“곱게 죽여 주면 다행이지. 겨우 단두대에 매달기엔 죄가 너무 커. 아마 존재하는 고문 방법은 전부 시도해 보지 않을까? 끓는 기름에 집어넣는다든가, 사지 절맥을 잘라 버리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야. 아니면 이단심문관을 부를 수도 있겠네. 그쪽이 전문가들이니까.”
“……너, 이 새끼.”
테오도르가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내뱉는 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하다.
“전부 네 놈 때문 아니냐……!”
“그게 왜 내 탓이야? 이거 웃기는 새끼네.”
“네 놈이랑 그년이 그런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저지른 건 댁이지. 우린 밝힌 것뿐이고.”
리안은 어이없는 눈으로 테오도르를 바라봤다.
범죄자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더니, 저런 식으로 생각도 가능한 건가. 직접 겪으니 좀 색다른 기분이다.
“솔직히 내가 그쪽 입장이면 당장 칼 거꾸로 쥐고 뒤져 버렸을걸? 쟤가 거는 시련 겪어 봤잖아. 그 상태로 포장해서 추격대에 넘기면 게임 끝. 포상금도 두둑이 챙겨 주겠지. 무려 국가의 역적을 잡아 바친 셈이니까.”
“개새끼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리안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대하와 같이 넓지. 그러니까 기회를 줄게.”
“……기회?”
테오도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눈에 한 줄기 희망이 비친다.
“그래, 기회. 마음 여린 게 진짜 큰 단점이긴 해. 특히나 당신 같은 씹새끼 상대론 말이야.”
“개소린 거기까지 해라. 무슨 기회를 말하는 건지나 설명해.”
“여기서 제일 개 같은 새끼가 누구한테 개소리래.”
리안은 투덜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규칙은 간단해. 나랑 싸우는 거지. 내가 이기면 댁은 추격대 가는 거고, 그쪽이 이기면 내 목숨…….”
―안 돼.
“……은 안 된다네. 뭐, 댁이 알아서 해. 밖에 데리고 나가서 족치든, 여기서 팔다리를 잘라 버리든.”
리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테오도르 쪽을 흘겨봤다.
“어때? 이 정도면 공정한 거 같은데.”
“……저 날벌레 같은 것도 네 쪽에 붙나?”
―저, 저거 나한테 한 소리지? 저게 진짜! 벌레처럼 만들어 줄까?
“쟨 상관없어. 댁이랑 나, 둘이서 붙는 거지.”
리안이 콘시를 달래며 대답했다. 달랜다고 해 봤자 대단한 건 아니다. 아기 비행기 태우듯 손을 흔들자 금세 풀려 재잘재잘 떠들어댄다.
테오도르는 그 꼴을 보며 인상 찌푸렸다. 좋은 조건이다. 이상할 정도로. 그는 여기 오기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야, 쟤가 너 좀 와 보래.’
‘그 꼬맹이 옆에 붙어 있던 날벌레군. 죽고 싶은 건가?’
‘뭐, 뭔 벌레? 이…… 이…….’
‘……이상하군. 마력을 가한 공격이 왜 통하지 않는 거지? 이거라면 정령이나 페어리도…….’
‘……안 되겠다. 넌 좀 맞고 시작하자. 내가 너에게 내리는 시련은…….’
……그 후의 기억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악몽에서 깰 때마다 시도한 공격은 무의미하게 허공을 강타했고, 그 이후에는 다시 현실과 차이 없는 지옥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28번.
죽일 방법도, 도망칠 방법도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는 자의 같은 타의로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다.
“저 개벌레 새끼가…….”
테오도르가 리안의 손 위에 태평히 앉아 있는 이름 모를 종족을 바라봤다. 둘이 뭔 얘기를 그리 재잘거리는지, 사이가 퍽 좋아 보인다.
저런 악마의 종자와 친하게 지낼 수 있다니. 바이론이 그토록 경계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널 돕지 않을 거라는 걸 내가 어떻게 믿지?”
“못 믿으면 마는 거지 뭐. 이쁘게 포장해서 배달해드릴게.”
“이 씹벌레 새끼가…….”
―야! 아까부터 왜 자꾸 벌레, 벌레 거리는 건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지금. 맞지?
테오도르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심호흡했다. 분하지만, 저 말이 맞다. 선택권은 그가 아니라, 저 꼬맹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아까 네 놈이 했던 말 그대로 만들어 주마.”
“마음대로. 근데 애초에 약속 안 지키면 시도도 못 할 텐데?”
“네놈 하나 길동무로 데려가긴 충분하다.”
테오도르가 검을 뽑아 들었다. 키기기깅. 2년간 정비 못 한 검이 비명을 지른다.
“현실과 같은 악몽도 결국 꿈일 뿐이지. 눈치챈 순간 자살하면 깨어나더군. 그리고 다시 걸리기 전까지 나는 네 놈을 수백 번은 죽일 수 있다.”
“흠…….”
마냥 당하기만 한 건 아니란 건가. 썩어도 준치라고, 그 와중에 저런 사실까지 파악한 것은 좀 놀라웠다. 과연 3급 기사답달까.
“어차피 약속 어길 생각은 없었으니 상관없어. 그래도 일단 좀 쉬지 그래?”
“쉬어? 어째서?”
“도주하느라 몸도 엉망인 상태에서 콘시 시련까지 받았을 거 아니야. 나중에 상태 안 좋아서 졌다, 이런 소린 듣고 싶지 않은데.”
“웃기는 소릴 지껄이는군.”
테오도르가 피식 웃었다.
“겨우 네놈 따윌 상대하는데 몸 상태가 중요할 거 같나?”
“그렇게 생각하면 할 수 없고.”
리안이 검을 뽑아 든다. 스르릉 같은 소리는 없다.
극도로 관리된 검은 빠져나올 때 마찰이 없다던가. 테오도르는 그 모습을 비웃는 얼굴로 지켜봤다.
어차피 기사급의 전투는 무기에 덧씌워진 마력에서 판가름 난다. 검이 날카롭든, 이가 다 빠졌든 상관이 없단 말이다.
그래서 보통 기사들은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손질만 한다. 저렇게 자기 분신이라도 되는 양 여기는 게 아니라.
저런 경우는 보통 두 가지다.
하나는 무기가 어마어마하게 귀한 것일 때. 역사적 가치가 있거나, 최고위급 마법이 각인 된 마법 무구든가.
칠흑색 빛깔이 멋있긴 했으나, 테오도르는 저런 외형의 검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다. 요컨대 뭔가 역사를 가진 검은 아니란 소리다.
각인도 마찬가지. 마법무구는 사용자가 마력을 불어넣지 않더라도 희미하게 마나의 향을 풍긴다. 테오도르는 저 검에서 일말의 마나 흔적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럼 남은 경우의 수는 한 가지. 습관이 빠지지 않은 거다. 마력 운용 못 할 시기의 버릇 말이다.
실력과 상관없이 그 속은 햇병아리란 뜻. 굳이 시비를 걸어온 건…… 실전 경험 때문인가?
그렇다면 제대로 찾았다. 그는 진짜 싸움이 뭔지 확실히 보여 줄 자신이 있었으니까. 피식 웃은 테오도르가 검을 슬쩍 늘어뜨렸다.
“꼬맹이, 2년 전엔 어느 경지였지?”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
“2년 전. 바이론은 네가 기사급도 되지 못한 꼬맹이라 했지.”
테오도르가 자세마저 풀었다. 그 무방비한 모습에 맥이 빠진 리안도 검을 어깨에 걸쳤다.
“그래서?”
“아까 마력을 탐지해 봤다. 대충 4급 기사 수준은 되는 거 같더군.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2년 만에 두 단계를 뛰어넘는 건 불가능해.”
테오도르는 말하는 동시에 속으로 마력을 끌어 올렸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하지만 나는 바이론이 사람을 잘못 봤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아. 말도 안 되지만…… 진짜 2년 만에 4급 기사가 됐단 거겠지. 그런 괴물 같은 재능이면 그리 오만해질 만도 해.”
리안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를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역시 미숙하군. 테오도르가 피식 웃었다. 머릿속으로는 아까 전 느꼈던 위화감을 떠올리면서.
“하지만 대신 그만큼 어리석군.”
“어리석어?”
“그래. 나는 3급. 너는 4급.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아나?”
“별로 알 필요 없을 거 같은데.”
퉁명스러운 대답이었지만, 테오도르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대화가 목적이 아니니까.
“3급 하나가 4급 스물을 상대할 수 있지. 하물며 4급 하나쯤이야.”
슥. 살짝 발을 내디딘다. 꼬맹이의 눈이 아래를 향한다. 이제 와 눈치채 봐야 소용없다.
“10초면 충분하다.”
콰앙. 바닥이 굉음을 울리며 부서진다. 테오도르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목표는 리안. 하지만 목적은 놈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4급 따위와 싸우는 것엔 관심이 없었다. 이기는 게 당연했으니까. 그렇다고 약속을 믿지도 않았다. 농락하려는 의도가 뻔했으니까.
살아 나갈 방법을 고심하던 중, 한 가지 특이한 광경이 보였다. 그 벌레 새끼가 꼬맹이의 손 위에 앉아 있는 모습. 분명 검도 신체도 닿지 않던 녀석을, 놈은 태연하게 만지고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 알아볼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닿는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
“죽어라 벌레 새끼야.”
검이 리안의 옆구리를 향한다. 특이한 점은 날이 아닌 면이라는 것. 테오도르는 놈을 날려 보내 저 이름 모를 종족과 함께 해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쉬익.
죽음이 지척까지 다가왔는데도 리안은 그저 멀뚱히 서 있었다.
대화 도중 가해진 기습, 마력을 담은 압도적인 속도. 반응도 못 하는 거다. 테오도르는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검이 리안의 몸에 닿기 직전.
“시시하게.”
순간이지만 의식이 날아간다. 깨어났을 땐 이미 검이 멈춘 뒤였다. 리안은 멍청한 표정의 테오도르를 흘겨봤다.
“다 보인다고 했잖아.”
대체 언제……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쿵!
테오도르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