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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59화 (59/225)

너의 코드가 보여 (59)

‘미친 거지.’

카시아가 허리를 두드리며 쭉 폈다. 온몸에 느껴지는 압력. 모든 생물체가 느꼈던 고통을 가하는 시련, ‘고통의 대물림’이라는 칭호에 걸맞는 힘이었다. 보통사람은 발을 들여 넣자마자 꼼짝도 못 하겠지.

‘그런데…….’

고개 돌려 옆을 바라봤다. 모자란 동생의 주인. 뱀파이어 일족의 구원자. 어느 쪽이든 범상치 않은 칭호를 가진 금발의 남자가 보인다. 겉이든 속이든 2년 전과는 몰라보게 달라진 리안이었다.

‘생각보다 잘 버틴단 말이지.’

아무리 만류해도 고집을 꺾지 않아 같이 들어온 참이다. 금세 퍼질 거란 생각과 다르게, 리안은 아직까지 힘든 기색 한 번 내보이지 않았다.

‘……신체 단련이라도 했나?’

떠오른 생각에 카시아가 피식 웃었다. 인간처럼 마력패스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정의에 대해선 안다.

육체가 단련될수록 그 효과가 떨어지는 비효율적인 기관.

결국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셈인데, 병신이 아니고서야 신체를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마력이 주는 힘은 그와 비교도 못 할 만큼 굉장하니까.

‘인간의 몸으로 저만큼 버티는 건 대단하지만…….’

끽해야 열 걸음. 그때쯤이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가자 사정을 할 거다. 인간의 한계는 거기까지니까. 그럼 그 구겨진 얼굴을 살짝 놀려 주고 왕국으로 귀환, 역혈병 수습하고 거인족과 협상 후 뇌정석 회수하면 끝이다.

그 뇌세포가 근육으로 이루어진 머저리들이야 뇌정석의 가치도 제대로 모를 테니 교섭도 쉬운 일이다. 그 대신 협상이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말이다.

‘돌아가면 마사지부터 받아야지.’

요 2년. 대물림의 숲 탐방 다니느라 온몸에 멀쩡한 곳이 없다. 가만히 있어도 삭신이 쑤시는 나인데, 신체에 극도의 부담을 주는 곳만 쏘다녔으니…….

‘너도 고생 좀 해 봐라.’

카시아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원망하는 건 아니었지만, 수년간 겪은 고통을 떠올리면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오래가지 않았다.

한 걸음, 열 걸음, 백 걸음.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온몸은 삐걱대며 비명을 내지른다. 최고위급 뱀파이어 신체로도 버티기 힘든 압력.

하지만 그 와중에도 리안은 멀쩡했다. 피부는 땀 한 방울 없이 뽀송했으며, 안색 역시 억지로 참는다기엔 너무도 태연하다.

결국 참다 못한 카시아가 소리쳤다.

“야! 너 나 몰래 뭐 꺼냈지!”

거침없이 나아가던 발걸음이 멈춘다. 그제야 한숨 돌린 카시아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헉, 헉. 너 이씨, 편법은 없다더니.”

“꺼내긴 뭘 꺼내요. 힘들면 돌아가요. 애초에 따라올 필요 없다니까.”

“걱정돼서 따라온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되지! 그리고, 뭐 쓴 게 아니고서야 인간이 이런 압력을 어떻게 버텨? 이 정도면 웬만한 거인족도 뻗을 수준이란 말이야!”

“웬만한 거인보다 센가 보죠.”

쭈그려 앉은 채 허리를 두드리던 카시아가 황당한 얼굴로 리안을 올려다봤다.

“거인보다 강해? 인간이? 야, 마력 포함하면 몰라도 그건 아니지.”

“인간이 한둘도 아니고. 이런 인간 있고, 저런 인간 있는 거죠.”

“말이 되는 소릴 해.”

개개인 편차야 존재한다지만, 종의 한계를 뛰어넘을 순 없지 않은가.

거인보다 강한 인간은 있다. 오히려 꽤 많을 거다. 하지만 그게 신체 영역은 아니다. 단순한 힘으로만 따졌을 때 거인을 능가할 수 있는 종족은 없으니까.

지성 없는 몬스터, 오우거 정도나 견줄 만할까? 뭐, 거인이 오우거에 비해 더 똑똑한가는 의문이 들지만.

“마법 무구야? 아니지, 여기선 각인 힘도 약화될 텐데……. 도핑인가? ……아니야. 인간을 거인만큼 강하게 만들어 주는 약이 있었으면 연합을 왜 인정해 줬겠어? 침략하고 노예로 부려먹으면 끝인데.”

“혼자 뭐 해요?”

어처구니없어 하는 리안을 향해 카시아가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비밀로 할 테니까 가르쳐 주면 안 돼?”

“가르쳐 주고 자시고 할 게 없다니까.”

살짝 어깨를 푼 리안이 카시아를 내려다봤다.

“돌아가는 것도 힘들면 여기서 기다려요. 금방 갔다 올게요.”

“야!”

누굴 늙은이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자존심 상한 카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인간?

작은 몸집에 두 쌍의 반투명한 날개.

“……요정?”

연합에서도 극소수밖에 없는 희귀종족이 나타났다.

* * *

―……인간?

목소리가 귀가 아닌 머리에 직접적으로 울려 퍼진다. 카시아에게서 시선을 돌려 뒤를 향했다.

[NPC-2-384-3]

나올 수도 있겠다 생각은 했지만, 설마 진짜 나올 줄은 몰랐는데.

시련 담당 요정, 콘시.

대물림의 숲에 입장했을 때 특정 자격을 갖추고 있으면 드문 확률로 출현하는 npc다.

“……요정?”

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로 카시아가 중얼거렸다. 얼굴에는 경악이 가득하다.

“연합에도 셋밖에 없는 희귀종족이 여기 왜…….”

―여긴 내 땅이야. 내 땅에 내가 있는 게 무슨 문제가 돼?

콘시가 새침하게 대꾸하자 카시아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곤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손사래 친다.

“무, 문제는 무슨. 전혀, 아무 문제 없어.”

―흥. 싱겁기는.

꽤 건방진 투다. 적어도 2급 기사에 준하는 강자이자, 고귀한 뱀파이어 왕족에게 하는 소리라고 보기엔 말이다.

하지만 그 당사자, 카시아는 그런 사실에 신경 쓸 겨를도 없는지 주변을 훑어보기 바빴다. 마치 궁지에 몰린 쥐라도 보는 것 같다.

여기 오고 본 사람 중 가장 강한 카시아가 저런 반응이라니. 이 세계에서 요정이 가지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대강 감이 온다.

―그런데.

콘시가 두 쌍의 날개를 흔들어 내 근처까지 날아왔다.

―너 정말 인간 맞아?

파닥파닥. 귓가에 날갯짓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이건 뭐 모기도 아니고.

대충 손사래 쳐 쫓아내자 카시아가 경악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본다.

―무슨 짓이야!

“인간 맞아. 그리고 인간 근처를 허락도 없이 날아다니는 건 굉장히 무례한 짓이지.”

―어디 인간 주제에……!

“그런 발언은 처벌 대상이야. 아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10년쯤 전에 차별 금지를 포함한 대륙법이 발효됐거든.”

―이…… 이…….

콘시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카시아가 기겁한 표정으로 몇 걸음 더 멀어졌다. 삭신이 쑤신다며 불평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요정은 예외야! 아니면 그렇게 만들게!”

“예외는 없어. 그렇게 될 일도 없고.”

“너 진짜!”

카시아가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귓가에 속삭인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 잠깐만 조용히 있어. 너, 요정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

“알 만큼은 알아요.”

“아니. 넌 몰라. 안다면 그렇게 대할 리가 없어.”

떨리는 목소리로 카시아가 말을 이었다.

“저 녀석들은 관념체야. 네가 아무리 강해도 건들 수조차 없다고. 게다가 성격은 또 얼마나 지랄맞은지……. 겨우 요정 셋 때문에 연합 탈퇴하려는 종족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놀랄걸?”

“음…… 근데 괜찮아요?”

“당연히 안 괜찮지! 지금 당장 여길 나가야…….”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카시아의 뒤편을 가리켰다.

“쟤 다 듣고 있는데.”

―누구 성격이 지랄맞다고?

콘시의 몸은 이제 부들부들 떨리는 정도가 아니라 흡사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려댔다. 카시아는 새하얘진 안색으로 입을 닫았다.

아무리 당황했대도 요정이 가까이 다가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줄이야. 설정에 나오진 않지만, 관념체에게 한 번 크게 데인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희 종족이 지랄맞다고 한 것 같은데. 너한테 한 말은 아닌 거 같으니까 걱정 마.”

“너 진짜 미친……!”

―아, 그렇구나.

진동하던 몸이 뚝 멈춘다. 안색도 평온하다. 미소 짓는 얼굴엔 ‘앙금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아요.’라고 쓰여 있는 것 같다.

―나한테 한 말이 아니라 동족한테 한 말이구나. 그렇구나.

“그렇지.”

―그럼 내가 기분 나빠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거네?

“똑똑하네.”

―근데 왜 기분이 나쁘지? 왜인지 알아?

“성격이 지랄맞아서 그런가 보지.”

―아니.

콘시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내 앞까지 날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에 들어온 벌레 때문인 거 같애. 이럴 땐 어떡하는지 알아?

보통 벌레는 작은 쪽 아니던가. 말을 내뱉기도 전에 콘시가 팔을 높게 들어 올렸다.

―당연히 내쫓아야 해. 벌레는 엥엥엥엥 시끄럽거든. 진짜 짜증 나는 일이지.

팔이 서서히 내려온다. 카시아는 기겁한 표정으로 몸을 떨어댔다. 그걸 본 콘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콘시. 담당하는 관념은 시련. 똑똑히 기억해 둬.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겠지만 말이야.

마침내 작은 팔이 의기양양해하는 얼굴과 직각을 이루어 나를 가리킨다.

―내가 너희 벌레들에게 내리는 시련은…… 엥?

휙. 그 팔을 집게손가락으로 잡아 멀리 날려 보냈다. 엥? 하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멀어져 간다.

귀찮기는.

어차피 요정과 마주친 이상 원활하게 관계 정립될 일은 없다. 말이 길어지기 전에 해치우는 게 최선. 이 정도면 해결됐겠지.

“그럼 어떡할래요? 여기 있을 거예요, 따라올 거예요?”

“너…….”

멍한 눈으로 나를 보던 카시아가 중얼거렸다.

“……지금 관념체를 던진 거야? 손으로?”

“네.”

“어, 어떻게?”

“적당히 힘줘서요.”

이번에는 뭔가 꺼낸 게 맞았지만, 밝히지는 않았다.

코드로 생성해 낸 ‘요정의 보주’. 관념체를 만질 수 있게 해 주는 아이템이 어느 정도 파장을 일으킬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게 힘으로 되는 일이던가?”

“적당히 줘야죠. 그런데 계속 따라올 거예요?”

“……그냥 밖으로 나갈래.”

카시아가 기운 빠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뭔가 허탈한 기분이야.”

“그래요, 그럼.”

주저앉는 모습을 뒤로하고 숲의 중심부로 향했다. 한 발자국 더 내디딜 때마다 몸에 가해지는 압력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 열 걸음, 스무 걸음. 살짝 뻐근하다고 느껴질 때쯤, 바닥에 번개가 내려친 자국이 보였다.

“…….”

확실히 저것만으론 뇌정석의 존재를 확신하기 힘들긴 하다.

여기는 ‘대물림의 숲’.

거인족이 성년식 통과 의례로 방문하는 곳이다. 놈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도중 땅에 새겨진 상처가 한가득. 번개가 친 건지, 거인이 뒹군 건지 구분이 안 간다.

오크 정도의 지능만 있어도 저렇게 되기 전에 탈출할 텐데. 대화가 통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성체 취급해도 좋은 걸까.

쓸데없는 상념과 함께 더 깊숙이 들어가자 멀리서 번개 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동시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대물림의 숲 2단계, ‘고난의 대물림’.

게임에서는 최대 체력이 낮아지는 식으로 표현됐는데, 여기서는 알 수 없는 힘이 생명력 자체를 갈취하는 느낌이다.

피가 생명의 근간인 뱀파이어 종족은 순식간에 수십 리터 혈액을 헌혈한 기분이었겠지. 살아 돌아온 게 용하다.

압력만으로 삐걱대던 몸이 무너져 간다. 이쯤 되니 아무리 나라도 버티기 버겁다.

카시아에게 맡기지 않길 잘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이 정도면 거인족 중에서도 가지고 나올 수 있는 녀석이 몇 안 될 테니까.

과연, 유사 이래 통과한 자가 3명뿐이라는 사실이 이해 간다고 해야 하나. 내심 끝까지 갈 수 있다 여겼는데, 지금의 신체로는 불가능할 거 같다.

문제는 없다. 통과가 목적이 아니니까.

퍼지려는 다리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신체의 관절은 제자리가 아니라는 듯 삐걱댄다.

그렇게 열 걸음, 백 걸음.

이제 몸에선 땀이 흐르지 않는다. 피다. 칼도 박히지 않는 몸뚱이에서 구멍이란 구멍마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억지로 삼키려 드니 목구멍을 통해 올라오던 혈액과 부딪혀 숨이 막혔다.

무슨 역혈병도 아니고.

“퉷.”

피를 뱉었는데 주변과 구별도 가지 않는다. 눈의 실핏줄이 터진 지 오래기 때문이다. 세상이 붉은색으로만 보였다. 번개 치는 소리에 의존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치지직. 치지지직.

사방에 천둥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그 중심부의 결정이 실핏줄 터진 눈으로도 선명히 보였다.

뇌정석(雷霆石).

영롱한 황금빛의 돌멩이가 모조리 태워 버릴 것 같은 전기를 내뿜으며 허공에 윙윙 떠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갔다. 접근하는 건 모조리 없애 버리겠다 시위하던 번개 가닥들이 내 신체를 타고 빗겨난다.

그 뇌전의 소용돌이를 지나 결정을 움켜잡았다.

그 순간.

주위를 맴돌던 번개 가닥들이 순식간에 뇌정석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파지직거리는 소음이 연이어 들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

“후…….”

내 손안에는 황금빛 결정, 뇌정석이 영롱한 빛을 뽐내며 자리 잡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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