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58)
“어딜 간다고?”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라이놀에게 다시 한번 덤덤히 답했다.
“대물림의 숲이요.”
“……그 정신 나간 곳은 왜?”
“돌멩이 하나 주우러요.”
“혹시 돌멩이에 머리라도 박았어?”
“아니요.”
“그럼 이리와 봐. 내가 제정신으로 되돌려 줄 테니까.”
라이놀이 근처에 있던 벽돌을 들고 다가왔다. 쳐 보라는 뜻으로 머리를 갖다 대자 한숨 쉬며 손을 뒤로 넘긴다. 땅에 박힌 벽돌이 파삭, 소리와 함께 부서진다.
“칼도 안 박히는 괴물 같은 몸뚱이 믿고 그러나 본데, 아무리 그래도 대물림의 숲은 무리야. 거기 도전한다고 갔다가 죽어 나오는 인간이 몇이나 되는지 알아?”
“마력 안 통하는 지역은 없다고 믿는 머저리들뿐이죠. 제가 그런 병신도 아니고, 드물게 신체 단련한 인간인 것도 아시잖아요.”
“……그래도 대물림의 숲은 아니야. 거인족도 심심찮게 죽어 나가는 곳이잖아.”
“끝까지 통과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중간에 있는 돌멩이 하나 집어 오려는 거지. 위험하다 싶으면 그 전에 나올 수도 있고요.”
“그래도…… 하아.”
말을 잇던 라이놀이 내 얼굴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대화론 설득이 불가능하단 걸 깨달은 거겠지. 하긴, 비슷한 상황이 2년간 숱하게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 줍겠다는 돌멩이는 뭔데? 진짜 돌멩이는 아닐 거 아니야.”
“뇌정석이요.”
시원스레 답하자 아니나 다를까 라이놀이 다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설에 나오는 뇌정석 얘기는 아니지?”
“맞을걸요.”
“그딴 허구는 믿지 말라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항상 어디 가서 진짜를 찾아온단 말이야.”
라이놀이 한숨을 쉬고는 바닥에 앉아 나를 올려다봤다. 장난기는 가시고 진중함만 남은 눈빛. 그에 나도 마주 앉아 눈을 맞췄다.
“대물림의 숲은…… 그래.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그 정도 판단력은 있을 테니까. 하지만 패왕검은 어쩔 건데?”
“……알고 계셨어요?”
“테이어 님이 말씀해 주셨어.”
그 아저씨는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긴, 나랑 얽힌 게 하도 많으니 내가 없어지면 곤란하긴 하겠다. 그나마 내가 말 듣는 척이라도 하는 라이놀을 통해 날 제어해 보려는 속셈이 눈에 훤했다.
악의가 아니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역시 뼛속까지 상인이라 해야 하나. 나름 관계 개선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계산속으로 사람 대하는 건 여전하다.
“그쪽은 여전히 추격당하는 신세잖아요. 저한테 복수할 엄두도 못 낼 거예요.”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지. 추격대를 2년이나 피한 사람이잖아. 도시는 괜찮지만…… 인적 드문 숲에 들어가면 어디서 노려 올지 몰라.”
확실히, 2급 기사가 포함된 추격대를 이렇게 오랫동안 따돌릴 줄은 몰랐다. 금방 잡힐 줄 알았는데. 하지만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괜찮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이자 라이놀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오빤 또 잔소리 중이야?”
어느새 다가온 다린이 라이놀의 입을 막았다.
“대체 언제까지 애 취급인데? 리안도 저 정도면 다 컸다구. 그 이상 하면 사춘기 와서 오빠랑 대화도 안 할걸.”
“……사춘기는 애한테 오는 거야. 내가 하는 건 잔소리가 아니라 충고고. 다린, 너도 같이 들었잖아. 패왕검이 예전 일로 리안한테 복수하려 한다는 거.”
“들었지. 근데 리안도 엄청 강해졌잖아.”
그 말에 라이놀이 인상을 찌푸렸다.
“강해졌지. 겨우 2년 동안의 성과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것도 4급 기사 수준이야. 3급 기사 상대로는 5분도 못 버텨.”
“본인이 괜찮다잖아. 리안이 어디 허세라도 부릴 성격이야?”
“……그건 아니지.”
“그럼 이야기 끝. 과보호는 거기까지만 하세요, 어머니.”
발끈하는 라이놀을 무시한 채 다린이 싱긋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언제 출발할 건데?”
“미룰 것도 없으니 바로 가려고요.”
“지금 바로? 타냐한테는 얘기했어?”
“아뇨. 대신 좀 전해 주세요.”
“되게 섭섭해할 텐데…….”
다린이 저택 2층 창문을 바라본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삐죽 튀어나와 있던 회색빛 머리칼이 재빨리 커튼 뒤로 모습을 감춘다. 다린이 혀를 쯧쯧 찼다.
“그리 드센 애가 왜 너한테만 순한 양이 되는지…….”
한숨 쉬듯 중얼거린 다린이 라이놀 눈치를 보며 작게 손짓한다. 뭐지. 가까이 붙자 귓속말로 속삭인다.
“근데 카트발도 같이 가는 거야?”
“아니요. 할 일 있다고 해서요. 왜요?”
되묻자 다린이 우물쭈물거리다 내뱉는다.
“그…… 오빠가 이종족을 혐…… 좋아하지는 않잖아. 둘 사이에 나만 끼어 있으면 어색해서 죽어 버릴 거 같단 말이야.”
“딱히 서로 싸우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치만…….”
“금방 돌아올 테니 좀만 참아요.”
다린의 어깨를 툭툭 치고 라이놀을 바라보자 어색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야 다 들었겠지.
라이놀의 성취도 2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상승했다. 아무리 속삭이는 소리래도 이 정도 거리에서 못 듣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다린이 그걸 몰랐을 리는 없고…… 오히려 들으라는 심정이었겠지. 하여간 둘 다 유치하기는.
생각이 겉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유의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나름 사람 사는 것처럼 깔끔해진 레이튼 거리가 보인다. 그 모습을 배경으로 배웅하는 라이놀과 다린의 인사를 받으며 성문을 나섰다.
* * *
속성석. 단어 그대로 속성을 머금은 돌로, 최하급만 되도 수십 골드를 호가하는 귀중품이다. 그만큼 수요가 많기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4대 원소에 해당하는 불, 물, 땅, 바람의 속성을 최고로 친다.
가장 대중적이고, 쓸모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4대 원소에 속하지 않으면서 그보다 평가가 좋은 극소수의 예외가 존재하니까.
대표적으로는 혈(血) 속성이 있다.
4대 원소처럼 보편적으로 쓰기는 힘들지만, 대인전에 한해서는 그보다 강력하다 평가받는다. 그야 피가 흐르지 않는 생물은 세상에 없으니까.
문제는 오직 뱀파이어 일족들만 소유할 수 있다는 것.
보통 땅에서 채취되는 속성석들과 다르게 혈정석은 뱀파이어의 몸에서만 생성된다. 요컨대 그들이 가진 힘의 근원. 말하자면 드래곤 하트와 같다.
당연히 그런 걸 아무렇게나 관리할 리 없다. 뱀파이어 왕족과 의회에 의해 철저히 통제받는 물건. 하지만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관리가 철저할 뿐, 유통을 금지하는 건 아니니까.
반면 4대 원소보다 평가도 좋으면서 구하는 게 불가능한 속성이 있다.
바로 뇌정석.
보통의 속성석들과 다르게 등급도 나뉘어져 있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니까.
소문만 무성하고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가한 자들이 주점에서 전설 속 이야기를 떠들 뿐.
번개의 힘을 가진 자, 대륙을 울리는 벼락이 될지니.
“너 누구야?”
상념 중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붉은 머리칼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성지의 수호자, 카시아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뒤에 서서 킁킁거리는 중이었다.
“……뭐 해요?”
“너…… 그때 그 꼬마 맞아? 아니, 분명 냄새는 같긴 한데…….”
“일단 좀 떨어지시죠.”
손으로 어깨를 밀자 순순히 멀어진다. 카시아가 떨어져서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성장한 건 그렇다 쳐. 인간들 발육 빠르단 거야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 마력은 뭐야? 2년 전이랑 비교도 안 되잖아!”
“원래 인간이 마력패스 적성도 높은 편이잖아요.”
“……내가 겔리안 출신인 건 알고 하는 얘기지? 엘프, 그 요술쟁이들도 그런 속도로 마력을 쌓는 건 불가능해.”
“그럼 그냥 제가 대단해서 그런가 보죠.”
카시아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보다 뇌정석은 확실히 찾은 거 맞아요?”
“아니, 그보다 해명을 먼저…… 에휴, 됐다. 이런 걸로 스트레스받아 봤자 주름살만 늘지. 역혈병도 어떻게 알았는지 얘기 안 하는걸.”
한참을 투덜거린 카시아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대물림의 숲은 통과 못 했지만…… 그 외의 조건은 확실히 네가 말한 대로야. 중간까지 들어갔을 때 분명히 벼락 치는 소리를 들었어.”
“중간까지 들어갔다고요?”
눈살을 찌푸리자 카시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끝이 어딘지 모르니 그냥 감일 뿐이지만 말이야.”
“번개 친 흔적만 찾으면 된다고 했잖아요.”
“그게 뇌정석 탓인지 그냥 번개 몇 번 친 건지 어떻게 알아?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거 확인하는 게 가장 확실하지.”
“…….”
‘대물림의 숲’. 게임에서야 그냥 한 개의 필드일 뿐이지만, 현실에선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이다.
그렇다 보니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조사를 부탁한 건데…… 아마 2년 동안 수십 곳은 돌았을 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지만, 보통 인간이라면 수천 번은 죽고도 남았을 거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카시아가 피식 웃었다.
“네가 우리 일족 살려 준 거랑 따지면 이 정돈 당연하지. 사실 아예 들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더 들어갈 수가 없더라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카시아가 질린 눈으로 숲을 바라본다.
아니, 숲이라 하기는 좀 이상한가. 이름이 ‘대물림의 숲’일 뿐,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은 평야니까.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내가 꽤 강한 편이거든? 겉모습은 꽃 한 송이 못 꺾을 것처럼 여리여리해 보이겠지만 말이야.”
“진짜 본인 입으로 내뱉을 소리는 아니네요.”
“아무튼, 카트발 그 덜떨어진 동생이랑 비교하면 곤란하단 소리야. 인간 기준으로 보면…… 그래. 2급 기사라 하던가? 그 정돈 될걸.”
카시아가 뽐내는 기색도 없이 덤덤히 말했다.
“신체만 따지면 그보다 훨씬 강할 거야. 뭐, 종족이 다르니 당연한 얘기지만. 어쨌든 그런 내가 중간까지 들어가는 게 한계였어. 그런데 너는…….”
머뭇거리는 기색이길래 괜찮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였다.
“……인간이잖아. 미안. 차별할 생각은 아니었어.”
“인간 종족 신체 능력 딸리는 거 누가 모른다고. 별생각 없으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요.”
“……아무튼, 대물림의 숲에서 마력 사용 못 하는 거 알지? 신체 능력 하나만 본다 이거야. 인간 몸으론 통과는커녕 한 발자국 들여 넣기도 힘들걸.”
카시아가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킨다. 겔리안 연방이 있는 방향이다.
“그러니까 내가 거인족 쪽에 부탁해 볼게. 그쪽도 일이 많아서 당장은 힘들고, 한 5년만 더 기다리면…….”
“미쳤어요?”
아무리 장수(長壽)종과는 시간 감각 차이가 난다지만, 5년‘만’이라니. 300년 가까이 사는 뱀파이어한테는 짧은 시기일지 몰라도, 나는 그거 기다리다 답답해 죽어 버릴 거다.
“애초에 대물림의 숲에 있다 한 게 저잖아요. 가지고 나올 방법도 없이 찾아 달라 하진 않았겠죠.”
“대물림의 숲에 편법이 존재한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는데…….”
못 미덥단 표정으로 서 있던 카시아가 곧 눈을 빛낸다.
“아, 그렇구나.”
뭐가 그렇단 거지.
“카트발한테 들었어. 허공에서 신기한 물건들 끄집어낸다고. 툭 치면 쓰러뜨리는 봉이라든가, 방 안을 마력으로 채워 주는 잔이라든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다 했지만, 이번에도 그런 거지?”
“아닌데요.”
“……그럼 대체 뭔데?”
카시아가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이유는 알겠다. 아마 공간계통 마법을 상상한 거겠지. 그쪽 계열은 극히 희귀하니까 이참에 견학이나 해 두자는 심정이었을 거다. 완전히 헛짚었지만, 한가진 맞았다.
“그 말이 맞아요.”
“뭘?”
“대물림의 숲에 편법은 없다는 거.”
게임 내에서도 마찬가지. 애초에 수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필드. 꼼수를 부릴 필요도, 이유도 없다.
여기가 내가 만든 ‘벨리아 대륙’ 전기가 아니라는 건 인정했지만, 대체적인 설정은 맞으니까. 굳이 있는 정보를 활용하지 않을 까닭은 없다.
카시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럼 아티팩트도 없이 뭘 어쩔 생각이야? 그냥 돌아가서 조금만 기다려 봐. 서두르면 4년 정도로…….”
“편법이 안 통하면 남은 게 뭐 있겠어요? 정공법뿐이지.”
“……너, 설마.”
“네. 맞아요.”
나는 몸을 풀며 대물림의 숲 입구를 바라봤다.
“그냥 몸으로 뚫을 거예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