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56)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건물. 화려하지도 수수하지도 않은, 단순히 평범한 집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내게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피로 얼룩진 고문실이라 하면 알맞을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위장. 사실 지하가 7층으로 지상보다 2배 이상 큰 기이한 구조다.
1층은 고문실, 3층은 인공 던전. 이런 식으로 구역이 나뉘는데, 그 모든 걸 뚫고 들어가면 최하층인 7층에서 바이론과 붙게 된다.
그 후엔 최면에 빠진 동료들의 공격을 버티며 놈을 해치우면 이야기 끝. 그렇게 바이론의 스토리는 엔딩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래. 그래야 할 터인데.
[BOSS-4]
……그런데 어째서 지하 7층이 아니라 지상 3층에 있는 거지?
그렇다고 따로 눈에 띄는 코드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함정일 가능성도 없다는 뜻.
“…….”
여기서 생각해 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다. 숨을 고르고 건물로 진입했다.
맞아 주는 이 하나 없는 현관.
어느 것 하나 게임과 같은 게 없다. 원작에선 여기서 자경단원들과 전투가 벌어지는데. 2층도 마찬가지. 사람 하나 없이 가구들만 널려 있다. 그리고 마지막 3층.
“늦었네.”
나는 바이론을 만났다.
* * *
“뭐 해? 앉아.”
바이론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친구라도 맞이하는 듯한 태도. 그에 리안도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영입 제안이면 일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선택지 중 하나기는 했지. 진작에 생각 접었지만.”
피식 웃은 바이론이 와인 병을 꺼내 들고 잔을 채웠다. 본인의 것과, 리안의 것. 그리곤 잔을 들어 안에 든 새빨간 와인을 바라봤다.
“옛날에 딱 한 번 황실에 간 적이 있어. 왜인지 알아?”
“관심 없는데요.”
퉁명스런 대답에도 바이론은 신경 쓰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아버지 몰래 창고 식량을 전부 털어 영지민들에게 나눠줬거든. 감히 황제폐하께서 내려 주신 음식을 평민들에게 나눠 줘 황실의 권위를 떨어뜨렸다는 이유였지.”
바이론이 와인 잔을 흔들며 웃었다.
“정작 황실 권위 떨어뜨리는 건 그 귀족 놈들 목적이었을 거야. 방계를 벌주게 해 망신살 좀 뻗치게 하려 했겠지. 그놈들은 작은 일 크게 만드는 게 특기거든. 그런데 더 재밌는 사실이 뭔지 알아?”
리안의 대꾸가 없자 바이론이 와인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정작 음식을 나눠 준 나도 놈들이랑 비슷한 생각이었다는 거야. 내가 왜 저 벌레 같은 놈들에게 재산을 나눠 준 거지? 그냥 바닥을 기다 죽어 버리면 될 텐데 말이야.”
피식 웃은 바이론이 잔을 넘겼다. 그 모습을 본 리안도 잔을 넘겼다. 코드를 볼 것도 없이, 독살의 염려는 하지 않았다. ‘초인’의 신체가 독 조금 먹는다고 영향받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논점이 뭐예요? 난 겉과 속이 다른 싸이코다? 정신 상담은 신전 가서 하세요. 그쪽에 딱 맞는 신도 있으니까. 병신이라던가?”
“겉과 속이 다르다…… 결론은 맞지만, 이유는 틀렸어. 내 자의로 꾸민 행동이 아니었거든. 푸른 혈맥 발현된 것도 모르던 때였으니까.”
잔을 내려놓은 바이론이 옆에 있던 와인 병을 집었다.
“어쨌든 이 술은 그때 황제에게 받은 거야. 이걸 벌로 대신한 거지. 제국에선 와인을 선물로 주는 게 심각한 모욕이거든. 병신 같지?”
바이론이 큭큭 웃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튀려고 저러나? 리안의 긴장이 무색하게 바이론은 그저 병을 창가에 내려놓을 뿐이었다. 김이 샌 리안이 빈 잔을 돌려놨다. 하긴, 도망칠 생각이었으면 진작 갔겠지.
“의미 없는 과거사 그만 주절거리죠. 저희 해결할 게 남은 거 같은데.”
“의미 없는 과거사라니. 나한텐 소중한 추억인데 너무하는 거 아니야?”
“개소리도 집어치우시고.”
“그럼 네 정체에 관해서는 어때?”
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바이론이 그 간극을 꿰뚫듯 입을 열었다. 리안은 살짝 표정을 찡그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 정체요?”
“그래. 네 정체.”
바이론이 고개를 돌려 리안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날카롭게 벼려진 것 같기도, 허무하게 내려앉은 것 같기도 했다.
“홀연히 나타나선 순식간에 레이튼 지배자들과 관계를 맺은 네 정체 말이야.”
“……레이튼이 무정부 상태인 건 알고 지껄이는 소리죠?”
“명목상의 통치자는 없지. 그런 낌새라도 보이면 세 왕국에서 바로 개입할 테니까. 하지만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이 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나를 포함해서 말이야.”
“자의식이 과하시네.”
“오히려 낮은 편이지. 나는 겨우 이런 촌 동네 하나 지배할 생각이 아니었거든.”
사실을 읊을 뿐이라는 어투로 바이론이 말을 이었다.
“물류는 테이어 테르베로츠. 이 도시에 물건 유통하는 건 노블레스뿐이야. 놈한테 밉보이면 돈이 넘치게 있어도 내일 먹을 빵 하나 구할 수 없을 걸.”
“…….”
“정신적 지주는 키탄의 신전. 이 X같은 도시에서 빈민 돌보는 건 놈들밖에 없거든. 어찌나 존경받는지 갈 데까지 간 스캐빈져 놈들조차 거긴 건드리지 않아. 거의 성역이지.”
바이론이 피식 웃고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리곤 손가락을 튕겨 탁자의 잔을 친다. 팅.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범죄에 한 번이라도 손대 본 놈들은 대부분 내 밑에 있지. 여기서 질문. 레이튼에 깨끗한 자가 몇이나 있을까?”
그 말에 리안이 생각에 잠겼다. 설정에 명시해 두진 않았지만, 아마 절반은 넘을 것이다.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도시니까.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보호자도 없이 레이튼에 내팽개쳐진 고아들이 무슨 일을 하겠는가? 관광객 있으면 안내라도 하지, 이런 범죄자 소굴에 놀러 올 정신병자는 없다. 대부분 제 먹을 것도 부족한 마당에 구걸을 한들 돈 줄 인간이 있을 리도 없다.
성인도 마찬가지. 먹고 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은 몬스터 퇴치뿐인데, 생환율이 10프로밖에 안 된다. 평생 검 한 번 들어 본 적 없는 자들이 야생에서 살아남기란 그리도 버거운 것이다. 그런 확률에 본인 목숨 맡길 인간이 흔할 리 없다.
그에 반해 소매치기는 어떤가? 목숨을 걸 필요도, 갇힐 위험도 없다. 그야 치안을 유지할 국가가 없으니까. 걸렸을 때 리스크도 없다. 어차피 당한 놈도 어디서 훔쳐 온 물건이니까. 실력을 비웃을지언정 소매치기 자체를 탓할 인간은 없다는 소리다.
이 도시에는 그만큼 범죄가 만연해 있다.
그 모두가 바이론을 따르는 건 아니다.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 하지만 그들 위에 있는 건 바이론의 부하. 사실상 그 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부하, 본인이 다 죽이고 있는 거 같은데.”
“내 거니까 내가 죽여. 간단한 문제잖아.”
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 새낀가? 그랬지 참. 그런 리안의 표정 변화에는 관심 없다는 듯 바이론이 활짝 웃었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네 정체 말인데.”
“신의 사자 아니에요. 이미 주장한 사람 있거든.”
“너, 악마지?”
순간 분위기가 바뀐다. 설렁설렁했던 공기가 이전과 비할 수 없이 무겁다. 느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말을 꺼낸 바이론도 이전과 달리 웃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슨 의미예요?”
“말 그대로 악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거 말이야. 대부분 모르는 단어지만, 너라면 알 텐데?”
질문을 던진 바이론이 리안의 얼굴을 살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 당황해서인지 감흥이 없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진 확실했다. 단어의 뜻을 모르는 자가 내비칠 표정은 아니라는 것.
그가 피식 웃었다.
“역시 알고 있구나.”
“무슨 근거로?”
“이런 중요한 순간에 상대가 모르는 단어를 뱉었어. 보통은 황당해하며 무슨 개소리냐 묻는 게 일반적이지. 그런데 너는 묻지 않았잖아. 적어도 악마가 뭔지 알고 있다는 소리야.”
바이론은 잔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수십 년 전에 한 마법사가 주장한 이론. 이 세계는 악마에 의해 만들어졌고, 모두 조종당하고 있다는 그 희대의 개소리를 말이야.”
“……개소리를 믿는 거예요?”
“널 만나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지.”
바이론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리안을 내려다봤다.
“다음 행동을 정하는데 근거가 없어.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논리가 없어. 멍청해서 그렇다기엔 너무 대응이 완벽했지. 마치 답안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래서 생각한 거야. 너는 악마라고.”
리안은 여전히 무표정인 채 입을 열었다.
“신이나 예언가도 있을 텐데?”
“놈들 능력으로는 불가능해. 큼직한 사건의 실마리를 볼 수 있을 뿐, 디테일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네가 이 세상 존재가 아니라는 확신도 섰거든.”
“와인?”
바이론이 인상을 찌푸렸다.
“……알고 있었나?”
“알고는 있었죠. 눈치를 지금 챘을 뿐.”
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이론을 마주 봤다. 다시 분위기가 반전된다. 추궁당하는 자에서, 사실을 선고하는 판사의 모습으로.
“첫 잔은 주인과 마시지 않는다. 제국 관습이죠. 나는 속도 없이 같이 마셨고. 여기서 제국인 아니라는 거 눈치챘을 거예요.”
“…….”
“와인 병 창가에 내려놓는 거. 대륙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행동이죠. 해방왕 전기에 나오는 내용이니까. 준비 끝났으니 이제 싸우자. 그런데 나는 멍청히 앉아 있었고. 여기서 대륙인 아니라는 거 눈치챘을 거예요.”
“너…….”
“마지막으로 손가락으로 잔 치는 거. 모든 종족이 공유하는 관습이죠. 네가 불편하니 떠나 달라. 진짜 가지는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반응했어야 해요. 헛짓거리 말라든가 하는 식으로. 여기서 이종족 아니라는 것도 눈치챘겠죠.”
모두 알고 있던 내용. 하지만 생각에 미치지는 못했다. 이런 건 알고 행하는 게 아니라, 몸에 밴 습관 같은 거니까.
“모든 걸 아는 듯 행동하는 인물. 그러면서 관습에는 어색한 인간. 악마는 가장 훌륭한 관찰자다. 딱 그 말대로긴 하네요.”
“……인정하는 건가?”
“그런 험악한 이름은 아니지만요.”
칭하는 명칭만 다르지 결국 같은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저 사람들 입장에서야 개발자나 악마나 별 차이점도 없을 테니까.
“……네 목적은 뭐지? 유희? 장난감들이 아등바등 사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나?”
바이론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짐작과 확신은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내뱉으면서도 본인이 제정신인가 수백 번 고민한 의문. 그게 사실이라 단언하니 아무리 그라도 평정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리안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 쉬었다.
“저도 오고 싶어 온 거 아니니 모함은 그만두죠. 장난감이라 생각한 적도 없고.”
“네가 만들고, 네가 조종한다. 이게 장난감이 아니면 뭐지?”
“댁은 조종한 적 없어요. 만든 적도 없고.”
리안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생각 정리 끝냈거든. 나도 내가 만든 세계라 생각했는데, 아니야. 설정과 다른 사람도 많은 데다, 애초에 나는 이런 세상 만들 능력 안 돼요.”
“그럼 대체 네 정체가 뭐라는 거야!”
바이론이 여유롭던 모습을 내던지고 소리쳤다. 지금의 행동 역시 조종당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억누르며 유지하고 있던 평정이었다.
쉽게 시인하는가 싶더니, 이젠 또 아니라니.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에도 정도가 있단 말이다!
리안은 그런 바이론을 덤덤히 바라봤다.
“모르죠. 나도 억지로 끌려온 거라니까. 그 마법사 말대로 그냥 관찰자였을 수도 있고. 아무튼, 이번에는 좀 놀랐어요.”
“……뭐가 말이지?”
“원래 상상하는 게 일이었거든. 몇 번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만약 내가 이 게임에 들어온다면 내가 제작자라는 걸 눈치챌 사람이 있을까, 하고.”
“…….”
모르는 단어가 몇 나왔지만, 바이론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어차피 리안도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리안은 그대로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수십 번 상상해 봐도 그런 사람은 하나밖에 없더라고. 바이론 당신이요. 그런데 정말 그 생각대로 된 거잖아.”
“……영광이라 해야 하나?”
“그럴 것까진 없고. 이제 여기 혼자 남아 있던 목적이나 말해 봐요.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던데.”
그 말에 바이론이 리안의 얼굴을 직시했다. 흔들림 없는, 단호함 마저 느껴지는 눈동자.
예상이 틀렸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상대는 저런 진지한 눈빛이 아닌,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야 했다.
바이론은 의자에 앉으며 허무하게 웃었다.
“날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어째서요?”
“너는 사람을 직접 죽인 적이 없으니까. 처음 만난 용병들은 그냥 날려 버렸고, 내가 보낸 A급은 동상의 힘을 빌려 처리했을 뿐이야. 이번에 A급 열 명도 죽이지 않고 제압만 했지.”
큭큭 웃은 바이론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장난감에 애정이 있어서 그랬을 린 없어. 당연히 스스로 건 제약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 이번 유희는 불살의 길을 걷겠다, 이런 거 말이야. 그런데 아니었군.”
바이론이 고개를 살짝 내려 리안을 마주 보았다. 단호함 속에 애정이 보인다. 냉정함 속에 연민이 보인다. 그가 상상하던 어떤 악마의 모습에도 저런 얼굴은 없었다.
“너는 단지 그들을 인격체로 생각했을 뿐이었어. 처음부터 말이야.”
“……할 말은 끝났어요?”
그 말에 바이론이 천장을 바라보며 다시 큭큭 웃었다.
혹시나 싶어 시도한 정신장악은 이미 쉽사리 막힌 뒤다. 더 이상 반항할 수단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게 존재하기는 할까? 저런 놈을 상대로 말이다.
무슨 수를 써도 이기지 못할 거란 확신이 서 걸어 본 도박 수. 그게 틀렸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적어도 추하지 않게 가는 것.
“봐줄 생각은 없는 것 같네. 그래도 언젠가 정점에 설 녀석 첫 상대라면…… 뭐, 나쁘진 않지.”
바이론이 눈을 감는다. 푸욱. 소리가 뒤따라 들리고.
“…….”
방을 나온 리안의 검에는 새빨간 선혈과 함께 푸른빛의 불꽃이 불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