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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55화 (55/225)

너의 코드가 보여 (55)

레이튼에서도 유난히 어두운 뒷골목. 테이어 테르베로츠를 어떻게든 설득한 나는 그 귀퉁이에 서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희미한 빛에 의존해 위태롭게 있던 내 그림자 속에서 사람의 형체가 떠올랐다.

“잡아 왔어.”

그림자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카트발이 기절한 여자를 툭. 하니 내려놓는다.

속절없이 떨어지는 몸에 혼원력을 방출해 신체를 받쳤다. 얼마 전 수련의 성과다. 불안정하고 미약하지만, 어느 정도 힘을 몸 밖에 꺼내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살며시 땅바닥에 놓이는 여자를 보고 한숨 쉬었다.

“넌 표현 방식부터 좀 다시 배워야겠다.”

“왜? 잡아 온 거 맞잖아.”

“구한 거지 멍청아. 잡혀 있던 거 못 봤어?”

“되게 편히 지내고 있던데.”

“네가 노안이 와서 잘못 봤나 보지.”

카트발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언제는 어린애 취급하고, 어떨 땐 노인네 취급하고. 대체 뭐야?”

“꼬우면 너도 인간 해.”

불공평하다며 투덜거리는 카트발을 무시하고 바닥에 누워 있는 여자의 코드를 확인했다.

[NPC-2-434-3]

확실하다. 패왕검 테오도르의 딸.

이름은…… 아마 페트라일 거다. 등장하자마자 죽는 캐릭터라 기억이 잘 안 난다.

코드의 단점이라고 할까. 적은 단어로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지만, 정작 무슨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지 모르면 전혀 쓸모가 없다.

어차피 중요한 코드는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 상관은 없지만.

“깨 있는 거 아니까 그만 일어나시죠.”

공격 의사 없다는 표시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미동도 없는 신체. 그에 반해 몸속은 난리가 났다. 내가 말 꺼내자마자 마력을 공격 태세로 전환하기 시작했으니까.

괜히 반평생을 연기로 살아 온 게 아닌가?

누가 봐도 완벽히 기절한 모습으로 암습을 준비하다니. 과연 3급 기사 상대로 십 년 가까이 속여먹을 만하달까. 나도 코드를 볼 수 없었다면 눈치챌 수 없었을 거다.

나는 손을 든 상태로 페트라에게 다가갔다.

“왼쪽 양말에 단검. 레이튼에서 만든 거네요. 하긴, 가두기 전에 몸수색 정도는 했을 테니 당연한가. 그리고 오른쪽 허벅지에는…… 아니, 독약은 어떻게 구했대? 진짜 감금돼 있던 거 맞아요? 혹시…….”

쉬익!

그 순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페트라의 손이 왼쪽 발로 향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타이밍. 사람이 가장 방심하기 쉬운 대화 도중에 일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속도가 부족하다.

턱!

빠르게 치고 나간 나의 발이 페트라의 손을 막았다. 당황할 법도 한데 그녀는 부어오른 손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진짜 잘 살고 있던 거 납치한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 거 같고.”

설정이 바뀌어서 테오도르가 제정신인가 했다. 저 모습 보면 그렇지는 않은 모양. 평범하게 자랐으면 저렇게 경계심 많지는 않을 테니까.

한동안 나와 카트발을 번갈아 보던 페트라가 결국 포기한 듯 항복 자세를 취했다.

“아버지가 보낸 거야?”

“테오도르가 당신 구하려고 사람을 보낼 거 같아요?”

“아니. 하지만 이제 가족 놀이 유지할 필요도 없으니 귀찮은 거 처리하는 느낌으로 보냈을 수도 있지.”

원망도, 자괴도 없는 덤덤한 대답.

확실히 인재는 인재란 말이지. 실전 경험 한 번 없는 주제에 하는 대응하며 지금도 포기 않고 도주로 찾는 거 보면 말이다.

“굳이 암살자 보낼 것도 없죠.”

“무슨 뜻이야?”

“댁 아버지가 납치범이랑 편 먹었거든요.”

페트라가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봤다.

“테오도르가? 어째서?”

“둘이 성격이 맞았나 보죠.”

“……놈이랑 성격 맞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그걸 믿으라는 거야?”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으니까요.”

손을 들어 피로 물든 도로를 가리켰다. 페트라가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되돌아온 얼굴에 의심의 기색은 사라져 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긴장을 풀고 벽에 기대 늘어져 앉는다.

어이가 없네.

“그렇게 바로 믿어도 되는 거예요?”

“지금 상황에서 거짓말할 이유가 없으니까. 거기서 탈출할 방법 없던 것도 사실이고. 네 말대로 죽일 생각이었으면 이리 번거로운 방식을 사용하진 않았겠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른 태세변환 아닌가?

내가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든 말든 페트라는 태연히 손의 상처까지 살피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단한 상처가 아니라 판단했는지 내 쪽으로 고개 돌린다.

“하지만 구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어. 그놈에 대해 잘 아는 거 보면 나 데려가서 보상받겠단 생각도 아닐 텐데 말이야.”

“그쪽 아버지가 저를 죽이려 하거든요.”

페트라가 어깨를 으쓱인다.

“그래서 뭐? 혹시 인질로 삼을 생각이면 소용없을 거야. 대충 아는 거 같지만, 말이 부녀 관계지 사실 남보다 못한 사이거든.”

알고 있다. 원작에서도 본인 아버지, 테오도르에게 죽는 인물이니까.

패왕검은 그가 전쟁터에서 거침없이 전진한다 하여 주어진 칭호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그는 단지 피를 갈구했을 뿐이다.

오히려 본색은 영악하고 조금의 위험도 회피하는 비열한 인간.

그래, 단지 이미지 관리를 위해 가족까지 만들어 둘 정도로. 인간을 베는 걸 좋아할 뿐이라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방도였을 뿐인데 말이다.

그런 목적으로 만든 가족에게 애정이 있을 리가.

상대하기 귀찮은 부인은 병사로 처리해 버리고, 대충 유지할 자식은 시종에게 맡겨 버렸다.

사랑도 증오도 없는, 단순한 무관심.

원작에서 딸을 죽이는 이유도 별거 없었다. 그냥 눈에 들어온 김에 처리했던가? 플레이 화면에는 나오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건 저도 알아요.”

“그러면? 도망칠 방법이라도 알려 달라는 거야? 포기해. 피 냄새 하나는 기막히게 잘 맡는 인간이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유서라도 맡아 달라고? 나라고 놓아 줄 인간이…….”

“약점이 필요해요.”

말을 끊자 페트라가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3급 기사한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혹시 있대도 너 같은 꼬맹이한테 당하겠어?”

“저한텐 방법이 없죠.”

한 템포 쉬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쪽한텐 있잖아요.”

“뭐? 그런 거 있었으면 내가 진작에…….”

말을 잇던 페트라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곤 처음으로 경악의 기색을 띠었다.

“너, 설마…….”

“네. 알고 있어요.”

나는 상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이 모아 둔 테오도르의 학살에 대한 증거가 필요해요. 어머니 유품도 포함해서.”

“…….”

페트라는 기겁한 채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사실이었을 테니 놀라울 테지.

사실 나도 그 정도 대화만으로 상황 파악을 마치는 영특함에 놀랐다. 운이 조금만 따라 줬더라면 원작에서도 살아남지 않았을까.

나는 그 모습을 일별하고 몸을 돌렸다.

패왕검 테오도르는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본인과 가장 가까이 있는 자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놓친 거다. 그게 아무리 관심 없는 자식이라도 말이다.

힘은 없지만 영특했던 아이. 그 아이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파헤치고, 밝혀내기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그야 둘 모두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이에게는 유일하게 애정을 준 인간이요, 오롯이 부모라 부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사람을 빼앗은 자에겐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기 마련이다. 이가 안 박히면 잇몸으로 물어서라도.

그 작았던 아이가 십 년 넘게 수집한 학살의 증거들.

그거라면 패왕검 테오도르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다. 살아 있는 모습과 같이 제출하면 왕국의 추격자가 붙을 테니까.

제 목숨은 끔찍이 아끼는 녀석이니 바로 몸을 숨기겠지. 애초에 싸울 필요가 없는 녀석이다.

뭐, 원작에서는 페트라가 죽는 탓에 무력으로 이기는 것밖에 답이 없지만 말이다.

똑똑한 여자니까 지금이 적기라는 것도 이해할 테고, 설득은 어렵지 않겠지. 그보다…….

나는 피로 흥건한 도로를 다시 바라봤다.

아무리 바이론이라도 현재 시점에 3급 이상을 둘이나 데리고 있진 않을 거다. 즉, 패왕검 테오도르는 지금의 바이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수라는 소리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인질 관리가 허술하다. 만약 패왕검이 딸에게 별 관심 없다는 걸 알아냈다 쳐도 최근일 텐데.

카트발이 페트라를 데려온 것까진 그렇다 치자. 아무리 꼼꼼한 녀석이라도 이종족 고유 기술까진 고려하지 못했을 테니.

하지만 인질이 칼은 물론, 독약까지 챙기는 걸 두고 봤을 리가 없다. 아무리 페트라가 똑똑하다 해도, 바이론에 비할 바는 아니니까.

실제 게임에도 식기를 나뭇가지로 제공했다는 묘사를 넣었었다.

공격당하는 것보단 자살 방지 목적이 컸지만, 아무튼 무기가 될 만한 것의 출입을 철저히 금했다는 뜻이다.

따로 노리는 게 있나?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 냈다.

내가 아는 한 바이론이 낼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다. 만능처럼 보이는 능력이지만, 사실 제약이 상당하니까.

그도 그럴 게, 능력이 최면이다. 그런 걸 마음대로 쓸 수 있었으면 최종 보스는 바이론이었겠지.

녀석이 사용할 수 있는 수는 전부 대비해 둔 후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방도를 낸다면 그건 설정 오류뿐.

그렇다면 지금 내가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백날 생각한다고 모르는 걸 알 방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없다.

바이론을 만든 것도, 수백 번씩 클리어하며 공략을 작성한 것도 나니까. 녀석이 어떤 수를 가지고 오든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 * *

적막만이 가득한 방. 여우상의 여자가 안절부절 못 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그 앞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검은 머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테오도르가 도망쳤다, 이 말이지.”

“그, 그게…….”

“이유는?”

바이론의 덤덤한 목소리에 여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패왕검, 그자가 수십 년 동안 변방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녔다는 증거가 포착되었어요. 그 때문에 왕국이 2급 기사를 포함한 추격대를…….”

“바네사.”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바이론이 말했다.

“내가 이유를 묻고 있잖아.”

그 차가운 목소리에 바네사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고개를 숙였다.

“이, 이번에 탈출한 그 딸의 소행일 거예요.”

“뜬금없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는 그년 말이지.”

“……네. 아마 뱀파이어 중에서도 고위급의 짓 같은데, 어째서 그랬는지는 저도 도저히…….”

“한 놈밖에 없지.”

바이론이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심문관도 못 알아챈 신패의 위조 여부를 알아보고, 적통도 아닌 주제에 나도 모르는 제국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데다, 모두 죽었다 생각하는 패왕검 테오도르가 실은 이쪽에 붙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단 말이지.”

“…….”

“거기다 네가 꼭꼭 숨겨 둔 인질의 위치도 훤히 꿰고 있었고. 나도 모르던 정보를 말이야.”

“……바, 바이론 님.”

여자가 황급히 무릎 꿇었다.

“겨, 결코 제가 배신하거나 한 게…….”

“알아.”

바이론이 차갑게 내뱉었다.

“애초에 그 딸이란 년이 그리 중요할 줄은 테오도르, 그자도 몰랐을 테니까. 알았다면 그리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그가 차분한 걸음걸이로 의자에 돌아가 앉았다.

“그렇게 영악한 자가 자식이 십 년 넘게 자신의 일을 추적하는데 눈치도 못 챘어. 그 딸 본인만 간직하던 사실이라 생각하는 게 맞겠지.”

말을 마친 바이론이 턱을 괴고 한참을 침묵했다. 부복한 채 눈치만 보고 있던 여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그 꼬마를 처리할게요.”

하지만 바이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완벽한 무시. 바네사가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바이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전부 알고 있다는 건가? 타인의 정신까지 지배할 수 있는 내가 모르는 것까지?’

그처럼 제약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진작 눈치챘을 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그런 일이 가능한 존재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아무 조건 없이 세상 모든 일을 아는 능력이라니. 주신 키탄이나 예지의 신 위르겐도 그런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신의 사도일 리 없다. 놈들은 신의 능력을 능가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푸른 혈맥일 리도 없다. 조사 결과 황실에 저 나이대의 남자아이가 없었다는 건 확실했으니까.

전설 속에 나오는 어떤 예언가도 보여 주지 못한 능력.

바이론이 다시 창문으로 다가가 바깥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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