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54)
“네놈이 원하는 게 뭔지 도통 모르겠군.”
붉은 머리의 사내가 바깥을 바라보며 인상 찌푸렸다.
“제국을 탈환하고 싶은 게 아니었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자의 뒤쪽에서 희미한 형태가 나타났다. 무덤덤한 얼굴에 와인 잔을 들어 올린 검은 머리 남자. 바이론이었다.
“탈환이라니, 무슨 그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저는 제국인도 아닌데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시치미 떼지 마라. 버러지 같은 게. 네놈이 쓰는 알량한 능력이 푸른 혈맥이란 걸 모를 줄 알았나?”
그리고 붉은 머리 남자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커허억…….”
“아악……!”
무려 3급 기사의 마력이 만들어 낸 압력. 가볍게 뿜어 낸 그 기세만으로 주변의 시중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이론은 그 힘과 살기를 정면으로 받고도 태연히 받아넘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역시 황족의 핏줄이라는 건가? 네놈이 버틸 만한 힘이 아닐 텐데.”
“테오도르 님이라면 아실 거라 생각하긴 했습니다.”
바이론이 와인 잔을 집어 던지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피범벅이 되어 버린 손. 테오도르의 기세에 깨져 버린 와인 잔이 낸 상처 탓이다.
“박수라도 쳐 드리고 싶지만……. 이 손으로 그랬다가는 더러운 피가 사방에 튀어 버리겠군요.”
“도시를 피바다로 만든 놈이 할 말은 아니군.”
“저들의 피는 깨끗하지 않습니까.”
바이론이 테오도르 곁으로 다가와 창문 밖을 바라봤다.
“새빨갛고, 맑고, 심지어 투명해 보일 정도군요.”
“푸른 혈맥이라고 진짜 피가 푸른색인 건 아닐 텐데?”
“겉으로 보기엔 말입니다. 하지만 테오도르 님은 느낄 수 있을 텐데요.”
그가 손을 들어 떨어지는 핏방울을 무심한 얼굴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 인간의 것이 아닌 마력 말입니다.”
“확실히 인간의 것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군.”
테오도르가 기운을 갈무리하며 떨어지는 핏방울을 받아 입가에 가져갔다.
꿀꺽!
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의 것이라 믿기지 않는 마력량은 둘째치고 맛부터 달라. 이런 맛없는 피는 난생처음 먹어 보는군.”
“……먹어 보는 건 상상 못 했지만, 확실히 아시겠지요.”
테오도르가 피식 웃었다.
“그래. 무려 제국의 핏줄이 이종 교배 산물이라니. 제국에 반감이 가장 큰 겔리안 왕국에 가서 말해도 믿지 않겠군.”
“정확히 말하자면 교배는 아닙니다. 섞었다는 표현이 맞겠군요.”
“……섞어?”
테오도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일생을 검에 바친 자. 하지만 그렇다고 마법에 문외한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꽤 해박한 편에 속했다. 웬만한 마법사를 뛰어넘을 정도로.
그런 그의 지식에 이종 교배를 제외하면 저런 피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가능했다.
이미 수많은 마법사가 인간과 이종족을 융합한 키메라에 도전했고, 모두 실패했으니까.
지금은 대륙법으로 금지된 행위지만 한창때 날렸던 마법사들은 모두 도전해 본 실험이다. 심지어 그중에는 패왕검 테오도르조차 내려다보는 대마법사까지 존재할 정도였다.
그런 위대한 마법사들이 모두 불가능하다 말했던 실험. 그런 걸 성공시킬 인물은, 그가 생각하기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해방왕인가?”
“역시 똑똑하시군요. 세간의 평과 다르게.”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지. 누구나 금방 알아챌 문제니.”
테오도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확실히 해방왕이 대단하긴 하군.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성공 못 한 키메라를 이계 침공 당시 완성하다니.”
“정확히 말하자면 키메라도 아닙니다.”
“……이종 교배도, 키메라도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바이론이 쓰러진 시중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피가 묻지 않은 손으로 그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옷에 피를 닦은 뒤 턱 내던졌다.
“각인입니다.”
“……뭐?”
테오도르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각인. 들어 본 적 있다. 아니, 오히려 흔하다. 그야 모든 마법 물건에 적용되는 마법이니까. 하지만 각인은 무생물에 거는 마법. 생물에 적용했다는 건 들어 본 적 없다.
“노예 각인 같은 걸 얘기하는 건가?”
“노예 각인은 문양을 몸에 옮길 뿐인 마법이지요. 그런 조잡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정말 생물에 거는 각인이 성공했다고?”
바이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각인은 유전이 됩니다.”
“허…….”
이종족 키메라를 만들었다 해도 학계가 뒤집힐 판인데, 생물에 각인이라니.
이 소식 들으면 자괴감에 자살해 버릴 사람이 수천 명은 될 거다. 수십 년간 그 분야를 연구하고 불가능하다 단언한 마법사의 숫자다.
테오도르가 검을 배우길 잘했다 생각하며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그도 그중 하나가 아니었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까지? 황족을 담당하는 마법사 배치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위대한 선조께서 인간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죠.”
바이론이 피식 웃었다.
“각인에 저주도 포함시켰거든요. 마법사가 배신할 가능성, 당사자가 거부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겁니다.”
“저주?”
바이론은 대답하지 않고 의자에 다가가 앉았다.
“사설은 여기까지 하죠. 어차피 저도 얼마 전 알아낸 정보라 잘 알지 못합니다.”
“……뭐 좋아. 나도 어차피 이미 멸망해 버린 제국의 비사 같은 건 큰 관심 없으니.”
테오도르가 바이론의 맞은편에 다가가 앉았다.
“그럼 자네 목적은 선조에 대한 복수인가? 이런 피를 내린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리겠어, 이런 거?”
“그럴 리가요. 어차피 저는 방계인 데다, 이 피에는 오히려 감사하는 입장입니다.”
“말이랑 행동이 따로 노는군. 제국의 마지막 도시를 피바다로 만들어 놓고 말이야.”
바이론이 탁자에 놓인 와인잔을 집어 들며 대답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입니다. 날파리가 좀 꼬였거든요. 이게 생각보다 귀찮아서 크게 한 번 청소해 줄 필요가 있었을 뿐이죠. 어디까지나 제 목표는 제국 재건입니다.”
“네놈 능력이 안 통하는 상대라. ……설마 레이튼에 남은 제국 기사가 있나?”
테오도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응시했지만 바이론은 태연히 와인 잔만 흔들었다.
“걱정 마시지요. 3급은커녕 기사급도 못 되는 자입니다.”
“……그 말을 믿으라고? 기사급도 못 된 자가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직접 겪어 봤기에 알 수 있다. 처음 만났을 당시 신기한 능력이라 생각하고 자신에게 걸어 보라 했었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겼지만, 사실 그는 그때 당시 굉장히 놀랐었다.
무려 3급 기사인 자신의 정신까지 상당 부분 침범한 것이다. 자칫 방심했다간 넘어갈 정도로. 그건 4급 기사라도 버틸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4급은커녕 5급도 되지 않은 자가 버텼다고? 이건 그를 무시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눈살 찌푸리던 테오도르가 아, 하고 고개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 인간이 있었지.
“테이어 테르베로츠 말이군.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더니. 제국 최고 상단을 운영 중이던 놈이면 정신 방어 물품 한두 개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거 없지.”
만족스럽게 고개 끄덕이는 그를 보며 바이론이 피식 웃었다.
“테이어 테르베로츠에게는 능력을 건 적이 없습니다. 뭔가 눈치챈 건지 절대 대면하는 일이 없더군요. 제가 말한 건 다른 인물입니다.”
“따로 있다고?”
“예. 리안이라는 자입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테오도르가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조차 긴장하게 만든 능력을 막은 인간이 무명이라니. 대륙은 얼마나 넓은 것인가.
그가 내심 긴장하며 입을 열었다.
“그 리안이라는 놈은 뭐 하는 녀석이지? 은퇴했던 제국의 기사? 아니면 제국 궁정 마법사 출신인가?”
“둘 다 아닙니다.”
“흠. 그럼 짐작 가는 게 없군. 벽지에서 수련한 검객인가?”
그때 바이론이 들고 있던 와인잔 까지 놓치며 푸하하하 웃었다.
겨우 두 번째 만남이지만 저런 이미지는 아니었는데. 기분이 나빠진 테오도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아, 죄송합니다. 그리 떠올리는 게 당연하단 생각이 드니 너무 웃겨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무슨 소리지?”
“리안이라는 놈은……. 그래. 그냥 꼬맹입니다. 십 대 중후반이나 됐을까요?”
“……꼬맹이?”
테오도르가 이번에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드래곤이 변신한 건가?”
“확실한 인간입니다.”
“고위 마법사가 변장한 것이겠지.”
“마법의 기색은 없었습니다. 제가 보증하죠.”
“……그럼 답은 하나군. 푸른 혈맥. 아무 힘없이 그 능력에 맞서려면 같은 푸른 혈맥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할 테니.”
바이론이 피식 웃으며 와인 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저도 얼마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죠. 전쟁에서 살아남은 적통이라고.”
“아니란 말인가?”
“조사 결과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는 없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있었지만요. 아, 물론 남장도 아닙니다.”
“……그럼 뭐지? 푸른 혈맥도 아니고, 아무 힘도 없는 꼬마가 네놈 능력을 막았다고? 그런 놈이 대체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모릅니다.”
바이론이 웃음을 뚝 그친 얼굴로 대답했다.
“조사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더군요. 어느 시점까지는 명확히 행적이 보이는데, 그 이전은 완벽한 공백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그래서, 그 하늘에서 뚝 떨어진 꼬맹이 하나가 무서워 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건가?”
테오도르의 이죽거림에도 바이론은 덤덤히 답했다.
“예. 저는 무섭습니다. 제 능력으로도 행적을 알아낼 수 없는 그 정체가 두렵고, 미래를 꿰뚫고 있는 듯한 모습은 소름이 끼칩니다.”
“생각이 너무 많군. 겨우 꼬맹이 하나에 말이야.”
테오도르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제국에 남은 마지막 핏줄이 꼬맹이에게 벌벌 떠는 머저리라니. 흥이 식었다. 하지만 흥미는 돋는군. 그 리안이라는 꼬마는 만나 봐야겠어.”
그렇게 말한 테오도르가 출입구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바이론이 대수롭지 않게 와인 잔을 흔들며 물었다.
“따님은 안 데려가십니까?”
“딸……? 아, 그거 말이군.”
테오도르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딸을 인질로 만남을 요구했던 게 이제야 생각난 것이다.
“네놈 마음대로 해라. 날 상대로 인질극 벌인 놈이 누군지 궁금했을 뿐이니.”
그리 말한 테오도르가 다시 출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 죽음을 위장해 준 것에 대한 감사 표시로 그 리안이라는 꼬마는 죽여 주지. 왕국 밑에 있을 땐 날뛸 수 없으니 미칠 것 같았거든.”
끼익.
그렇게 문이 닫히고 한참 동안 방 안엔 와인 잔 흔드는 소리만 가득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늘진 구석에서 여우상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일은 얘기하지 않으세요?”
“신전 쪽에 보냈던 A급 열이 당한 일? 말해 봤자 믿지 않을 게 뻔해.”
그제야 바이론이 계속 흔들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는다 해도 별 의미는 없고. 끽해야 도망이나 치겠지. 담대해 보이는 척하지만, 경계심 많고 영악한 자다. 조금이라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거야. 약한 놈들 피 맛보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지.”
“저런 자가 어떻게 신패를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어이없다는 듯 한숨 쉬는 여자의 모습에 바이론이 피식 웃었다.
“신패가 착한 어린이 상은 아니니까. 능력은 되니 어떻게 연이 닿았겠지.”
“바이론 님 말씀대로, 저런 자라도 3급 기사. 일 처리는 확실하겠죠. 이왕 죽이는 거 그 배신자년도 처리해 주면 좋을 텐데요.”
“글쎄. 그 꼬마만이라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
그 말에 여자가 경악성을 토했다.
“설마 3급 기사를 상대로 이길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바이론 님 말이라면 전부 믿지만…… 그건 너무 과평가예요.”
“나도 머리로는 그리 생각해.”
그럼 심적으로는요? 그렇게 물으려던 여자가 입을 다물었다. 바이론이 이제껏 본 적 없는 얼굴로 환히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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