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53)
“……열 명?”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놀라서가 아니라, 황당했기 때문이다.
뭐? A급 10명을 제압해? 아무리 농담이라도 말이 되는 소릴 해야 받아 줄 것 아닌가.
저 꼬마가 나름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안다. 당장 이번 일만 하더라도 리안의 귀띔이 없었다면 영문도 모른 채 당했을 테니까.
‘갑자기 찾아와 바이론이 A급 용병 수십 명으로 레이튼을 침략할 거라 했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A급은 용병 중 이름난 최정예의 실력자. 그런 놈들을 수십 명씩 움직인다면 노블레스 정보력에 걸리지 않았을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꼬맹이가 되는대로 내뱉는다기엔 보여 준 성과가 있었다. 생각 없이 내뱉는다기엔 정보가 너무 구체적이었다.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신전 일을 잘 해결했으니 한 번 속아 넘어가 준다는 심정이었다.
일주일 후 날아온 보고서의 맨 앞장에는 한 가지 단어만이 적혀 있었다.
‘진실’
어떠한 기미도 없이 서로 연고 없는 A급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한 몸처럼.
미리 조사를 지시하지 않았다면 얻는 데 일주일은 더 걸렸을 정보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겠지.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지만.’
모은다고 모았지만, 저쪽은 A급이 서른. 신전이 합류해도 단순 전력이 몇 배는 차이 난다.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전략적 후퇴를 택했다. 수십 년은 퇴보하겠지만, 사라지는 것보단 나으니까.
‘스물이면 어떨까?’
서른이 아니라, 스물이라면. 미약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적어도 도전해 볼 정도로는.
‘……불가능한 소리지만.’
하늘에서 벼락이 수백 번 떨어지지 않는 이상 현실성 없는 소리다. 아니, 능력에 따라선 그마저 버틸 가능성도 있다. A등급은 하나같이 괴물 같은 녀석들이니까.
그런 놈들을 추정 C등급인 리안이 이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비교하자면 고블린이 드래곤을 이기는 것과 같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열 마리를 상대로.
“……지금이 농담할 때로 보이나?”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짜증 난 기색을 최대한 숨기며 말했다.
상황에 안 맞는 농담이야 어쨌든 리안의 정보 덕분에 탈출 가능성이라도 생긴 게 사실이었으니까.
“자네 일행들에게는 이미 말해 두었으니 얼른 짐부터 싸게. 조금만 늦으면 도망조차 불가능할 수 있다는 것만 알아두고.”
“농담이 아니오.”
“……주교님?”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황당한 얼굴로 주교를 바라봤다.
이 양반은 갑자기 왜 이러지? 요즘 신전에서는 유머가 기본 소양인가?
“주교님마저 농담을 즐기시는 줄은 몰랐군요. A급 열을 어떻게 제압했다는 겁니까? 땅에서 벼락이라도 솟았습니까?”
“두들겨 팼소.”
“……예?”
농담 좀 받아 줬더니 한 발 더 나간다. A급을 두들겨 패서 제압했다고? 노망났나?
“정확히는 두들겨 팼다기보다는 툭 건드린 것에 가깝긴 하오만.”
“……진심이십니까?”
“내가 거짓을 말해 무엇 하겠소?”
“…….”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입을 다물었다.
믿자니 말이 안 되고, 믿지 않자니 주교가 미쳤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받아들이기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가 다 내팽개치고 혼자 도망칠까 고민하는 사이, 조용히 있던 리안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쪽 문제도 얘기하려 했으니 나가서 확인해 보시죠.”
“……뭘 확인한다는 말인가?”
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잡아 둔 놈들이요.”
* * *
“…….”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저러다 파리 들어가겠네.
“……저들을 정말 자네가 제압했다고?”
“확인증은 못 써드리지만요.”
옛 기억을 떠올리며 불퉁거렸다. 훔쳐 간 보물을 돌려받기 위해 정보를 넘겼을 때.
모른 척하는 건지 눈치챌 여유도 없는 건지 테이어 테르베로츠는 멍한 눈길로 묶여 있는 용병들만 보고 있었다.
“……제리스를 불신하게 만드는군.”
그 닌자 아저씨는 갑자기 왜?
“그분이 저에 대해 뭐라 했었습니까?”
“자네더러 육체도, 마력도 발달되지 않은 꼬맹이라더군. 보는 눈은 확실한 친구였는데……. 하긴, A급 열을 제압할 실력자가 힘을 숨겼다면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한가.”
“…….”
또 힘숨찐 취급. 아까는 구태여 변명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해야 했다. 계획을 위해선 알아 둘 필요가 있는 정보였으니까.
“무기 덕이에요.”
“A급을 픽픽 쓰러뜨릴 수 있는 무기가 있다면 나한테 팔게. 전재산을 털어서라도 살 테니.”
눈빛이 진심이다. 하긴 A급 이길 수 있는 무기라면 값을 따지기 힘들긴 하지.
“어차피 이제 못 써요. 귀속 물건이라.”
“귀속 물건?”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흔하진 않지만 그렇게 드문 물건도 아니다.
마법사에게 의뢰해 각인도 가능할 뿐더러, 심지어는 물건이 주인을 고르는 일도 있을 정도니까. 엄청나게 비싸고 조건이 까다롭긴 하지만.
애초에 귀속 물건이 아니었다면 직접 싸우러 가지도 않았을 거다.
아무리 세뇌된 상태라 하더라도 A급은 A급. 그것도 열 명이나 되는 인원이다. 사기급 무기 하나 있다고 초보자가 간단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말이다. 넘기는 게 가능했다면 대충 제리스한테 넘겼겠지.
“레이튼 고아가 가지고 있을 만한 물건은 아니군.”
“어쩌다 연이 닿아서요.”
“연이라…….”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오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가 뚫어져라 바라보는 상황이 달갑지는 않아서 재빨리 입을 열었다.
“게다가 가주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굉장한 물건도 아니에요.”
“무슨 뜻인가?”
“일반인이 A급을 이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물건이 아니란 소리죠.”
입을 열려는 테이어 테르베로츠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긴 힘들어요. 이런저런 조건이 많다는 것만 알아 두세요.”
더 이상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로 단호히 답했다.
어쩌다 보니 협력하고 있지만, 노블레스와의 관계는 애매한 부분이 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노블레스는 원작에서 악역에 가까웠다. 어느 정도 정해 둔 선이 있기는 했지만, 예전 지위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놈들이었으니까.
얼마 전 있던 이종족 경매만 해도 금지된 일 아니던가. 거기서 카트발 사 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관계란 소리다. 굳이 불필요한 정보를 넘길 필요는 없지.
목소리에 담긴 단호함을 눈치챘는지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어깨를 으쓱였다.
“좋네. 그쪽은 묻지 않도록 하지. 어차피 귀속 물건이라면 구입할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무슨 소린가? 설마 이제 와 빠지려는 생각은 아닐 테고.”
“저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 지었다.
“A급 스무 명 상대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대체 뭔가?”
“그 A급 스무 명 부리는 놈을 치는 일이요.”
“바이론을?”
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테이어 테르베로츠는 이해가 가지 않는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원작을 모른다면 저게 당연한 반응이긴 하다. 언젠가 쳐야 하긴 하지만, 굳이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을 테니까.
하지만 원작에 대해, 바이론에 관해 알고 있는 나로서는 감상이 다르다. 녀석은 가능한 빨리 제거해야 한다.
“당장은 이해 안 가시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바이론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확실히 이해할 수 없군. 그리 서두를 필요가 없을 텐데. 어차피 녀석의 전력은 사실상 A급이 전부. A급 스무 명을 그렇게 표현하긴 뭐하지만, 자네 무기만 있으면…….”
“그 용병들이 전력이 아니라면.”
가주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놈들이 단지 시간을 끌기 위한 버림 패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자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보군.”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굳은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A등급이 정식 기사와 맞먹는다는 사실은 아나?”
“보통 4급 기사와 동등하다 치죠.”
“잘 아는군. 그럼 정식기사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아나?”
물론 잘 알고 있다. 내가 짠 설정이니까.
이 세계에서 기사 신분은 보통 귀족들의 전유물이다. 평민 출신을 배척하기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뱃속에서부터 지원받고 자라는 그들을 따라잡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서다.
본격적인 기사 가문에서는 아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교육을 준비한다. 산모에게 마력 패스 넓히는 영약들을 잔뜩 먹이는 것이다.
그래 봤자 늘어나는 숫자는 5, 6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걸 위해 귀족들은 수백 골드는 가볍게 투자한다. 명문이라 불리는 가문에서는 수천 골드까지 투자하는 경우도 심심찮다.
어디 그뿐인가? 태어난 아기는 부모 품보다 먼저 포션에 몸을 담근다. 그래야 몸이 튼튼해진다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다시 수백 골드가 들어간다.
그렇게 모유보다 영약을 더 많이 먹고 자란 아이는 걸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검을 든다. 그리곤 전 왕국 제 2기사단장 같은, 이름만 들어도 입 벌어지는 인간들 밑에서 검술을 배우는 것이다.
놀라운 건 그렇게 투자를 하고도 정식기사에 합격하는 사람조차 극소수라는 점이다.
최말단인 5급이 그런데 그보다 높은 4급은 말할 것도 없다. 세가 약한 귀족 중에는 4급 기사가 나온 것만으로 가문의 영광이라며 당사자의 동상을 만드는 경우도 있을 정도니까.
이런 와중에 A급 용병이라 함은, 맨몸으로 그런 괴물 같은 놈들과 동등하다 평가받는 미친놈들이다.
포크로 오우거를 이기고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 화살을 맞추며 한 번의 마법으로 수천을 학살하는 인간병기들.
3급부터는 국가의 관리를 받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사실상 만나 볼 수 있는 최강자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죠.”
“그럼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겠군.”
“네.”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눈살을 찌푸렸다.
“바이론이 그런 자들 수십을 마음대로 부리는 게 가능하다고 보나?”
“이미 부리고 있지 않습니까.”
“단순한 고용이지. 그것도 이해는 안 가지만, 마음대로 부리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일세. 순순히 명령 들을 리도 없을뿐더러 속아 넘어갈 일도 없을 테니까.”
조금 놀랐다. 확실히 노블레스 수장다운 침착성이라 해야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됨에도 이성을 유지한 채다.
사실 그리 대단한 추리는 아니다.
A급은 실전으로 만들어진 초인들. 4급 기사에 비하면 실력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산전수전의 경험으로 커버 치는 인간들이다.
그런 자들이 자살 작전에 순순히 응할 리도, 속아 넘어갈 리도 없다는 건 지나가던 카트발도 알겠지.
문제는 지금 상황. 급작스러운 총공격에 풍전등화인 형편이다. 보통은 A급 서른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 들은 순간 정신 나가서 도망칠 생각밖에 안 들었을 거다.
여태까지 평정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가주 자격은 증명한 거나 다름없다 봐야겠지.
나도 원작 지식 몰랐다면 대안이고 자시고 일단 튀고 봤을 거다. 아니, 낌새도 못 알아채고 죽었겠구나.
개발자였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며 입을 열었다.
“타국의 A급 서른을 소리 소문 없이 부른 시점부터 증명됐죠. 보고 없이 국경을 넘은 용병에게는 심각한 제재가 들어간다는 사실은 아실 텐데요.”
“유명무실한 관행이지. 세 왕국이 동맹 맺으며 사실상 사라지지 않았나.”
“A급이면 얘기가 다르죠. 국가 관리하에 있지는 않더라도 감시 하나씩은 붙은 자들 아닙니까.”
“……처음 듣는 소리네만.”
그러고 보니 기밀 정보였던가. 하긴 굳이 초인 심기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까. 나라님이 감시한다는데 누가 좋아하겠나?
이건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 대뜸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한숨을 쉬었다.
“의심은 하고 있었지. 그런 괴물들을 무방비로 풀어 두는 게 더 말이 안 되니.”
“……어떻게 알았나 묻지 않으세요?”
“어차피 또 얼버무릴 거 아닌가. 여기까지 와서 안 믿을 수도 없고. 게다가.”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피식 웃었다.
“내가 사람을 잘 믿는 편은 아니지만……. 자네라면 신용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드는군. 아들놈이 친구 하나는 잘 만들었어.”
그리고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이어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화에 따라오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녀석이 당황해서 주춤거렸다.
저런 놈과 친구라니 농담이시죠? 묻고 싶었지만, 그 아버지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꾹 참았다. 대신에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 정도로 신용하신다니 다행이네요. 바이론 목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는데.”
“부담 없이 말해 보게. 무슨 일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니.”
그럼 다행이고. 얘기하면 바로 도망칠 거 같아 미뤄 두고 있던 건데.
나는 태연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바이론은 패왕검 테오도르를 움직일 생각이에요.”
쿵!
그리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의자가 큰 소음을 내며 나뒹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