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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52화 (52/225)

너의 코드가 보여 (52)

일단 성기사들이 합류하자 정리는 쉬웠다. 서넛 정도가 시선을 끄는 사이 내가 곤봉을 가져다 대기만 하면 되니까.

문제는 기절시킨 용병들을 대충 던져 놓았을 때 발생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네? 제,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어딘가 조심스러운 성기사의 태도. 아무리 견습이라지만 자신이 과해 거의 오만에 가깝다는 설정이 무색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성기사 특성 중 ‘오만함’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사람이 어떻게 다 같을 수가 있겠나. 이놈은 좀 겸손한 성격인가 보지.

“지금 뭐 하시는 거냐고요.”

“그…… 마무리를 지으려는 생각이었습니다만…….”

성기사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아! 하고 소리쳤다.

“죄, 죄송합니다. 수급을 거두는 건 최고 공로자의 일인데 제가 그만…….”

“아니, 그게 아니고요.”

나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 저었다.

그래. 얘들 입장에선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정신지배니 뭐니 말해 봤자 푸른 혈맥이 뭔지 모르는 입장에선 헛소리로밖에 안 들릴 거다.

능력에 대한 설명 없이 이들을 설득시켜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외부인인 내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봤자 귓등으로라도 듣겠냐는 거다.

그렇다고 일단 제압당한, 그것도 강제로 지배당해 움직이던 놈들을 죽일 수도 없고.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은 죽이면 안 돼요.”

“아, 네! 다른 자들에게도 전해 두겠습니다.”

그리고는 녀석이 뒤돌아 동료들에게 달려갔다. 마치 승전보 가지고 돌아가는 전령과 같은 속도.

“…….”

뭐지? 내가 상사도 아니고 뭔 질문도 없이 바로 따르냐? 말단 이등병도 저렇게 군기 잡혀 있진 않겠다.

“신기하죠? 저도 기사님들 저렇게 예의 바른 거 처음 봐요. 정식 기사인 라키안 님한테도 저렇겐 안 하는데.”

목소리에 고개 돌려 보니 어느새 아리나가 다가와 합장하고 있었다.

‘성-기사’ 거리고 있는 놈이랑 비교당하면 솔직히 조금 어이없는데.

“라키안 경은 조금 멍청하잖아.”

“그거 라키안 님한테 말해도 돼요?”

그건 좀 아니고.

내가 입을 다물자 아리나가 살포시 웃는다.

“농담이에요. 그래도 너무 무시하지 마요. 견습 기사님들도 크게 예의만 안 차릴 뿐이지 속으로 존경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무시한 적 없어.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

“그럼 말해도 상관없지 않아요? 사실이라면서요.”

“너는 병신한테 병신이라고 할 수 있냐?”

잠깐 고민하던 아리나가 고개 저었다.

“……못 하겠네요.”

“그런 거야.”

“이해했어요.”

아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번엔 덕분에 살았어요. 비밀도 공유하는 사이에 힘을 숨긴 건 조금 괘씸하지만.”

“힘 숨긴 적 없다니까.”

“뭐, 그런 걸로 해 둘게요.”

배시시 웃는 얼굴. 안 믿는다는 표정이다. 해명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힘숨찐 노릇도 웃기지만, 내가 왜 약한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비참하지 않은가.

저 새낀 정신병 도진 상태였고, 나는 그런 놈 상대론 개사기인 무기 든 상태였고……. 상상만 해도 쪽팔려 죽을 것 같다.

지 혼자 오해하는 걸 내가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지.

고개 돌려서 용병들 구속하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현장을 지휘하던 주교가 다가왔다.

“인사가 늦었소. 이렇게 또 도움을 받는군.”

“별일 아닙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제때 와 준 덕분이지.”

헛기침을 한 주교가 주위를 둘러봤다.

“하마터면 식솔들을 전부 죽인 못난 놈이 될 뻔했소. 정말 뭐라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정도군.”

“마녀 재판 문제도 해결했고요.”

아리나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시르케 님이랑 같이 온 거 보니 결과야 뻔하긴 한데, 잘 해결된 거 맞죠?”

“그래. 혐의는 완전히 벗었다.”

“그 싸가지 없던 심문관은요?”

“말투를…… 후. 그쪽도 잘 해결됐다.”

어떻게 해결됐는지는 설명하지 않은 채 주교가 나를 향해 고개 숙였다.

“그쪽도 포함해 감사를 표해야겠군. 다시 한 번 고맙소.”

“그쪽은 주교님이 감사를 표할 일이 아니죠.”

시르케 쪽을 한 번 쳐다봤다. 녀석이 움찔거리더니 이쪽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피식 웃고 다시 주교를 바라봤다.

“그보다 신전에서 감사하는 건 맞습니까?”

“무슨 말인가?”

“제 잘못은 아니지만 신전 입장에서 달가울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일어난 일만 보면 내가 신전의 잘못을 바로잡아 준 형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결국 내가 신전의 치부를 드러낸 꼴.

조용히 넘어갈 수 있던 걸 괜히 들춰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조직이 본인들 잘못 숨기는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까. 적어도 나를 곱게 볼 인간들만 있을 거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주교는 별일 아니란 듯 고개 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 확실히 이번 일을 반기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걱정할 일은 없을 거요.”

“어째서입니까?”

주교가 처음 보는 얼굴로 씨익 웃었다.

“이번 일의 전권은 본인이 맡았기 때문이오.”

“……주교님이 말입니까?”

“그렇소. 주교 입장에서 잘됐다고 하긴 그렇지만…… 생각보다 일이 커졌거든.”

그 말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패왕검 테오도르입니까?”

“……허어, 참. 대체 어떻게 아는 것인지.”

주교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맞소. 신패를 도용당한 그가 신전에 항의했지.”

“……난리가 났겠군요.”

패왕검 테오도르는 3급 기사. 게다가 칭호 ‘패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격도 개판이다. 그런 놈이 소동 부리면 신전 입장에서도 껄끄럽겠지.

“그 덕에 본교는 그 뒤처리만으로 급급한 상황이오. 그 외 신패에 관련된 모든 일을 나에게 위임했지.”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군요.”

전혀 안타깝지 않은 어조로 답하자 주교가 헛웃음 짓는다.

“내 앞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소. 그렇게 꽉 막힌 인간은 아니니. 그보다…….”

주교가 반쯤 정리된 현장을 다시 둘러봤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아시오? 갑자기 습격받아 정신이 하나도 없군.”

“돌아가면서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지. 그리고…….”

주교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 줄 보답도 생각해야겠군.”

* * *

도시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거리 곳곳에 시체가 늘어져 있긴 했지만, 사실 평소보다 숫자가 더 많을 뿐이지 레이튼은 항상 이런 분위기긴 했다.

“이게 대체…….”

하지만 주교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보다.

“주교님 일행을 습격한 쪽과 같은 놈들이 저지른 짓입니다.”

“어찌…….”

“일단 가시지요.”

아직까지 돌아다니는 자경단원 몇몇이 보였다. 놈들에게 당하진 않겠지만, 싸우는 소리를 듣고 A급들이 공격해 오면 곤란했다.

정작 놈들이 먼저 덤벼 오진 않았다. 알아서 몸 사리고 피했으니까. 아무리 견습이라도 성기사는 최소 B등급의 실력자. 칼만 들었지 대다수가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녀석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일행 쪽. 사람 수급을 자랑처럼 달고 다니는 자경단원들 모습에 분노한 몇몇 성기사가 대열을 뛰쳐나가려 했다.

다행히 주교가 말렸지만, 하나같이 곧 터질 듯한 표정이다. 자리 좀 빠르게 옮겨야겠는데. 여기서 각개격파 당하면 답도 없다.

“바이론 아저씨도 꽤 몰렸나 보네.”

어느새 다가온 시르케가 속삭였다.

“이렇게까지 일 벌인다는 건 레이튼 기반 포기하겠단 소릴 텐데.”

“신전이랑 척진 데다 얼굴도 드러났으니까요.”

“으음…… 뭐 그렇지.”

시르케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바이론 아저씨가 너부터 노리는 거 아니야?”

“왜요?”

“전부 네가 관련된 일뿐이잖아.”

“결정적인 계기를 준 건 그쪽인 데다 배신까지 했으니 저보다 몸 사리셔야 할 거 같은데.”

“난 괜찮아. 여차할 땐 도망칠 수단도 있으니까.”

“저도 괜찮아요.”

“역시 무슨 방법이 있는 거지?”

시르케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뭘 기대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방법이 있긴 하죠.”

“뭔데? 설명해 줄 수 있어?”

“부탁 찬스 있잖아요. 그거 써서 그쪽 목숨 걸고 싸우는 사이 튀면 되지 않겠어요?”

“……진심은 아니지?”

“하는 거 보고 고민해 보죠.”

우물쭈물하는 시르케를 두고 몸을 돌렸다.

사실 바이론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 신중한 녀석이 벌써 몇 번씩 실패한 암살을 다시 시도할 리 없었으니까.

다른 일을 꾸미면 꾸몄지, 나를 노릴 리는 없다. 문제는 내 안위가 아니라 레이튼이 멸망 직전이란 거지만.

빠르게 걷다 보니 노블레스 거리가 보였다. 평상시 깔끔하고 고급지던 외양은 어디 갔는지 피범벅이 된 모습.

그 와중에 비싼 건 죄다 빼 갔다. 아마 일 터지자마자 노블레스에서 수거해 간 모양.

하긴 그쪽도 이번에 A등급 열 고용하면서 돈 꽤나 나갔겠지. 한 푼이라도 아껴 보겠다는 심정 이해 안 가는 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던 주교가 쓰게 웃었다.

“……이 거리는 전쟁 이후 처음 와 보는군.”

충격은 꽤 덜은 표정. 하긴 그 정도로 정신줄 놓았으면 레이튼 주교는 진작 때려치웠겠지.

“신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닐 텐데요.”

“여기 오면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더군. 밖의 레이튼 모습과 대비돼서 말일세.”

“……너무 어렵게 사시는군요.”

“아니면 신관의 길을 택하진 않았겠지.”

모든 신관이 그런 생각은 아닐 텐데.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주교가 먼저 고개 저었다.

“물론 다른 신관이나 신도들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네. 이건 내가 선택한 신관의 길이지, 다른 이들의 길은 다를 수 있으니까.”

“…….”

이만한 인물이 왜 이름도 없는 조연 역할인지 모르겠네. 아리나 과거사에도 딱히 등장한 적 없던 거 같은데. 하긴, 과거 설정이라 해 봤자 2, 3줄로 요약된 간단한 정보뿐이긴 하지만.

이제 와 이름을 묻기도 그랬다. 주교가 주교가 아니게 되는 건 이상하잖아.

“한동안 여기서 지내시게 될 텐데 그건 괜찮으십니까?”

“투정 부릴 생각은 없네.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게 최우선이니까. 테르베로츠 가주님께 실례를 끼치게 되겠군.”

“가주님도 환영하실 겁니다.”

곧이어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저택이 보였다. 입구의 검문을 통과하자, 가주가 나와 사람들을 맞았다.

“……솔직히 얘기해서 돌아올 줄 몰랐는데.”

“제가 허언을 뱉은 적은 없잖습니까.”

“그것도 정도가 있지. A급 열 명 상대로 살아 돌아올 거라 누가 예상이나 하겠나?”

그가 감탄의 눈으로 나를 훑어봤다.

“게다가 저만큼이나 살려 오다니. 무슨 방법을 썼는지 짐작조차 안 가는군. 아무튼, 짐들 싸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짐이요?”

“원래 예상은 A급 20명이지 않았나. 그것도 가능할까 싶었는데 거기에 10명이 추가됐어. 이길 수 있는 숫자가 아니야.”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크게 한숨 쉬었다.

“대부분 기반은 잃게 되겠지만…… 아예 사라지는 것보단 낫지. 세 왕국이나 신전에서 개입할 때까지 잠시 몸을 피할 생각이네.”

“제가 숫자 좀 줄여 온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하는 말 아니었나?”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그냥 허세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긴 나 같아도 웬 꼬맹이가 A급 상대한다 했으면 우습긴 했겠다.

“확실히 줄이고 왔어요. 죽인 건 아니지만.”

“……제압을 했다는 소린가?”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제압은 죽이는 것보다 힘드니 그 점에 놀란 걸 수도 있고, 굳이 그런 이유를 몰라서 놀랐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목소리 높여 말을 이었다.

“도망친 것만으로도 믿기지 않는데 인원까지 줄였다니……. 얼마나 줄였나? 한 명? 두 명? 몇 명이든 대단하긴 하지만, 크게 차이 있는 숫자는…….”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얼굴을 보며, 나는 덤덤히 말했다.

“열 명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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