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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51화 (51/225)

너의 코드가 보여 (51)

쓰러지는 용병의 몸을 잡아 대충 근처에 던졌다. 죽은 건 아니다. 기절한 것 뿐.

잠시 손에 든 곤봉을 쳐다봤다.

[IT-A-144]

A등급 아이템 정신이 번쩍 곤봉.

A등급이나 하는데 이름도 효과도 웃긴 개그성 무기다. 때리면 잠깐 정신 번쩍 드는 게 전부인 잉여 아이템. 심지어 공격력도 없다.

당연히 사용하는 유저도 관심 두는 유저도 없었는데, 사실 이 무기에는 숨겨진 효과가 하나 있다.

바로 정신 계열 상태 이상에 빠진 상대에게 사용하면 기절한다는 것.

바이론 공략에 필수적인 아이템인데, 쓸데없이 등급 높아서 3천 포인트나 들어가는 걸 코드 변경으로 1천 포인트에 해결했다.

귀찮은 퀘스트 안 깨도 돼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원래 얻으려면 며칠은 개고생해야 하니까.

“……리안 님?”

목소리에 고개 돌려 보니 쓰러진 라키안을 치료하는 아리나가 보였다. 자연스레 라키안에게 먼저 눈이 갔다.

복부에 뚫린 구멍. 지구라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지만, 신관이 있는 벨리아 대륙 기준으로는 별거 아닌 상처다. 외상 치료 하나는 타고났으니까.

문제는 남은 신성력이 있냐는 것. 신성력은 코드로 보이지 않으니 판단이 힘들었다.

아리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거 치료 가능해?”

“네, 네? 아…… 지금 남은 힘이 별로 없어서 출혈 막을 정도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품속에서 포션을 집어 던졌다.

“포션 뿌려서 치료해. 다른 사람들한테도 나눠주고.”

“네……가 아니라! 대체 왜 여기 있는 건데요?”

아리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보면 몰라? 지원 왔잖아.”

“위치는 어떻게 알고…… 아니, 그보다 무슨 도움이 된다고 여길 와요?”

“이런 도움.”

쓰러진 용병을 가리켰다.

[NPC-1-MC-A]

남자 용병 A등급. 저 정도 등급 되면 네임드 비중이 꽤 되는데, 놈은 그렇지 않은 모양. 그냥 단순한 NPC를 뜻하는 코드였다.

“……혹시 힘 숨기고 있었어요?”

아리나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벌써 몇 번 했던 질문 같은데.

“그냥 요령이야.”

“……대체 무슨 요령을 부리면 A등급이 저렇게 픽 쓰러지는데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사람들부터 치료해. 아직 아홉이나 더 남았으니까.”

내 말에 아리나가 수긍한 듯 재빨리 포션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며 내심 안도했다.

딱히 비밀은 아니지만, 이딴 걸 어디에서 얻었냐 물으면 대답할 말이 궁했으니까. 하늘에서 뱁새가 물어다 줬다 할 순 없지 않은가.

한숨 쉬며 시선을 돌려 다가오는 용병들을 바라봤다.

기억나는 네임드도 있었고, 별 비중 없는 조연도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어느 쪽이든 내가 상대할 만한 놈들은 아니라는 것.

방금 쓰러트린 놈도 제정신 아니라 기습 성공한 거지, 평상시라면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했을 거다.

“흠…….”

하지만 문제는 없었다. 저 중에 제정신인 놈은 없었으니까.

* * *

‘……대체 뭐지?’

시르케가 자리에 주저앉은 상태로 생각했다.

‘직접 싸울 때도 느끼긴 했지만…… 좀 심한데.’

A급이란 놈들이 서로 연계도 못 하는 건 그렇다 치자. 처음 만나 상호 보완 안 되는 경우엔 아예 연계를 포기해 버리기도 하니까.

‘공격에 날카로움이 없어.’

직접 겪을 때보다 멀리서 볼 때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지금 이 싸움이 딱 그랬다. 버티는 것만으로 급급하던 상황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으니.

‘입력된 동작을 수행하는 느낌.’

A등급은 싸움 기술이 몸에 각인된 인간들이다. 무의식으로도 동작을 수행할 수 있는 미친놈들. 그런 자들이 몸을 움직이기까지 반응이 한 박자씩 늦고 있다.

‘……무의식까지 지배했다고?’

바이론 아저씨 능력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예전에 한 번 겪었으니까. 하지만 무의식까지 지배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보다 신기한 건…….’

시르케가 리안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능숙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았다. 무술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자의 움직임.

아무리 한 박자 늦다 해도 A급 용병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문제는…….

‘전부 피하고 있어…….’

더 놀라운 건 그 모든 공격이 행해지기도 전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

상대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감지하고 그 작은 동작만으로 무슨 기술을 사용할지 전부 알아챘다는 소리다.

공격보다 먼저 움직이는데 닿을 리가 있나.

‘……저게 가능한 일인가?’

일단 대륙에 존재하는 수천 가지 기술을 전부 꿰고 있어야 한다. 그것도 이름만 아는 수준이 아니라 준비 동작부터 행하는 동작까지 완벽히.

게다가 그 정보들을 안다고 끝이 아니다. 준비 동작만으로 무슨 기술인지 맞추려면 그 기술을 수백, 수천 번 정도는 반복해 봐야 할 터.

한 기술 당 수천 번. 그걸 수천 가지.

대체 어디서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물리적으로 가능한 시간이 아니었다. 리안은 스물도 되지 않은 소년이니까. 딱 한 번만 봐도 모든 걸 깨우치는 천재라면 또 모르겠지만.

‘……미래 예지 능력이라도 있나?’

꽤 신빙성 있어 보였다. 본인 위치를 찾은 거 하며 뭐든 알고 있다는 마냥 항상 여유로운 태도까지. 어디 걸리는 게 한두 개여야지.

천재적인 재능이든 미래 예지 능력이든, 한 가진 확실했다.

‘괴물.’

그리고 다행인 건 그런 사람과 같은 편이라는 것.

부탁이라는 명목으로 인생 반쯤 저당 잡힌 처지니까, 배신할 수도 없는 상대가 능력 좋으면 나쁠 거야 없다.

바이론 아저씨 능력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떤 능력이든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전투 중인 리안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르케가 싱긋 웃었다.

* * *

어째 도우러 오는 새끼가 하나도 없지?

옆구리를 노리고 찔러 오는 창을 피하며 생각했다.

얼른 치료하라고 포션까지 던져 줬는데 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잠시라도 시선 떼면 죽을 판이라 살펴볼 수도 없고.

그때 왼쪽에서 코드가 떠올랐다.

[SK-1-143]

전사 전용 스킬 패왕참. 그걸 보고 오른쪽으로 몸을 뒤틀었다. 쉭! 설정대로 공격이 대각선 방향으로 베어 들어왔다.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검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씨X.”

몸을 되돌리며 한숨 쉬었다. 상대 숫자 많은 덕에 버티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라 해야 하나.

연계도 안 되는 놈들이 무슨 액션 영화 스턴트맨처럼 달려들어서 버티고 있는 거지, 1대1이었으면 오히려 버틸 수 없었을 거다.

다시 자세를 잡고 용병들을 바라봤다.

네임드 둘, 조연 일곱.

사실 네임드라고 무조건 강한 건 아니다. 잠깐 등장하는 캐릭터도 일단 네임드기는 하니까. 지나가던 주인공에게 자기 소개한 농부도 따지고 보면 네임드라는 소리다.

하지만 저 둘은 내가 기억하는 녀석들이었다.

상실의 알렌과 꿰뚫는 볼드헬름.

A등급 최상위로 평가되는 놈들.

그 둘 중에서도 더 강한 놈 고르라 하면 알렌을 꼽았을 것이다. 까다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 오히려 조연들보다 약할 거다. 진짜 문제는 볼드헬름.

“멧돼지 같은 새끼.”

꿰뚫는. 딱 그 이름값 하는 놈이었다. 오직 찌르기만 단련한 미친놈이니까. 상성도 최악이었다. 단순한 찌르기. 패턴이고 뭐고 없다. 그저 압도적인 속도로 공격해 들어올 뿐.

C등급 수준인 내가 지금까지 피한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순식간에 시선을 돌려 성기사들 쪽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상처가 심했던 건지 이제야 슬금슬금 일어나고 있었다. 합류까지는 조금 더 걸리겠다.

“후…….”

원래 계획은 저 녀석들이 시선 끄는 사이 내가 곤봉으로 기절시키는 거였는데. 아무리 견습이 대부분이라지만 저렇게 하나도 빠짐없이 쓰러져 있을 줄 몰랐다.

“…….”

쓸모없는 놈들이라 욕하지는 않았다.

내가 더 오래 버티고 있는 건, 저들보다 대단해서가 아니라 제작자로서 가진 알량한 특권 덕분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토할지언정 내게는 저들이 흘린 땀을 욕할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도움 되지도 않았다. 볼드헬름이 투박한 검을 들고 찌르기 동작을 취하는 중이었으니까.

“저 새낀 찌르기만 쓸 거면서 대체 왜 검을 드는 거야?”

창 쓰면 S급도 노려봄 직했을 텐데. 병신인가?

투덜거리면서도 상대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공격을 한 번 막아 주는 ‘아지프의 약속’은 사용한 지 오래. 순수하게 내 실력으로 피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볼드헬름이 몸을 살짝 숙이고 왼손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오른발을 뻗으며 돌진해 왔다. 슈웅! 바람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중 어디에도 눈길 주지 않고,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볼드헬름의 찌르기는 특별하다. 어차피 내가 아는 동작도, 반응할 수 있는 속도도 아니었다.

대신 나는 오직 검을 쥔 상대의 왼팔만을 바라봤다.

검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스킬 제작할 때 참고삼아 이론 공부 정도는 해 뒀다. 한 손 찌르기는, 공격 직전 팔이 시계 방향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찌르기의 달인이라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현상. 단지 그 정보만을 믿었다.

이제는 두 다리로 보내는 게 가능해진 혼원력을 순환시키며 정신을 집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어째선지 내가 보는 게 불가능할 모습이 뇌리에 박힌다. 눈으로 본 것이 아닌, 감각이 느끼고 뇌에 전달해 준 정보였다.

그리고 놈과 나 사이의 거리가 다섯 발자국으로 좁혀졌을 쯤, 뇌가 온몸에 위험신호를 보냈다.

볼드헬름의 왼팔이 시계방향으로 틀어지고 있었다. 그걸 느낌과 동시에 꽉 막혔던 호흡이 튀어나왔다.

“……흡!”

필요한 건 단 한 번의 접촉. 따라붙기 전에 기절시킨다. 다리에 모인 혼원력을 폭발시켜 상대의 비어 있는 오른쪽 측면을 파고들었다.

왼쪽을 향하던 볼드헬름의 검이 마치 뱀처럼 나를 쫓아왔다.

저 정도 속도로 찔러 가던 검의 방향을 순식간에 전환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저 경지에 이르기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수련을 감당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적어도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시간임이 분명했다.

원래대로라면 내 공격이 닿기도 전에 저 검이 먼저 나를 꿰뚫었겠지.

아니,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반응이 한 박자 늦다 해도 나랑은 비교도 안 되는 속도를 가진 자니까.

그래.

만약 내가 왼팔의 뒤틀림보다 조금이라도 늦거나 빨랐다면 말이다.

퍼억!

곤봉이 볼드헬름의 옆구리에 닿았다. 녀석의 검은 내 몸과 겨우 한 뼘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곧이어 볼드헬름의 몸뚱이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휴.”

극도의 집중 상태에 들어갔던 탓인지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손으로 부채질하며 뒤를 돌아보자, 신전의 생존자들이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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