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50)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경악성을 토했다.
“같이 있던 성기사들은 어쨌나?”
“있기는 했습니다만…… 습격자 중 A등급이 열이나 되었다고…….”
“A등급이 열 명?”
나도 놀랐다.
레이튼에 있는 놈들까지 합하면 서른.
게임 내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되지만, 그건 지금보다 한참 시간이 흘렀을 시기다.
벌써 이 정도 전력을 준비해 뒀다고?
나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대책 마련이다.
당황해 우물쭈물하는 게 아니라.
“주교님이랑 마녀…… 아니, 시르케 행방은요?”
내 말에 남자가 테이어 테르베로츠 쪽을 바라봤다. 말해 줘도 되냐는 질문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현재 행방이 묘연합니다. 레이튼 신전에서 지원을 보냈다곤 합니다만…….”
“지원이라…… 인원은요?”
“전원입니다.”
전원.
훗날 키탄의 성녀가 될 아리나도 포함됐다는 소리다.
시르케나 라키안 죽는 것도 뼈아프지만, 녀석이 죽으면 진짜 대륙 단위로 역사가 바뀔 거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나는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대략적인 위치만 알려 줘요. 저도 갈 테니.”
“자네가 가서 뭘 한단 말인가? A등급이 열일세. 정보 능력은 인정하지만, 무력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을 텐데? 게다가…….”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그새 냉정을 되찾은 얼굴로 말했다.
“굳이 지원을 갈 필요가 있나, 싶군.”
“…….”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주교 행렬이 전멸하면 신전에서도 좌시할 수만은 없을 터. 반쯤 버린 레이튼이라 해도 본격적으로 개입해 올 거다.
수준 높은 성기사들과 신관들을 파견하겠지.
구해 봤자 큰 전력 안 될 놈들 구하느니, 파견 기다리며 어부지리 노리는 게 낫지 않겠냐는 뜻이다.
계산적이라고 보기만은 힘들다.
그에게도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나도 속사정 몰랐다면 같은 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엔 대책 없이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설득하는 편이 낫다.
어차피 감성이 먹힐 인간도 아니고.
“그들이 죽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살려 주는 편이 더 이득입니다.”
“그중 전력이 될 만한 건 주교와 성기사 라키안 경 정도로 알고 있네. 마녀 의심을 받던 시르케도 A등급이긴 하지만, 본래는 바이론 밑에 있던 자. 오히려 적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군.”
생각 이상으로 잘 알고 있어서 조금 놀랐다.
앞부분이야 어쨌든, 시르케가 바이론 밑에 있던 건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일 텐데.
“시르케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쪽은 저한테 진 빚이 있으니까요.”
“재판에 도움을 줬다지. 애초에 내가 보낸 일인데 모를 리가 없지 않나. 내가 궁금한 건, 그녀가 그걸 지킬 만한 인물이냔 것이네.”
“그건 문제없습니다. 제가 보장하죠.”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연다.
“그렇다 해도 굳이 구할 필요 있는지 모르겠군. 어차피 그들 전력 더해진다고 해 봤자 시간 조금 더 끄는 정도 아닌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가주님.”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말을 끊었다.
이 아저씨가 뭐 착각하는 거 같은데.
“가주님은 지금 미래를 걱정할 처지가 아닙니다. 내일 뜨는 해를 볼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죠. 지금 전력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틀? 삼일? 적어도 신전의 파견이 도착할 때까지는 아닐 겁니다.”
내 말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한숨 쉬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만…… 그래도 그쪽이 자네 계획보다는 현실성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느끼신다면 그쪽을 선택하셔도 됩니다. 만에 하나 파견 도착할 때까지 버텼다 쳐도 노블레스는 회생 불가능 수준이겠지만요.”
“……내게 선택을 강요하는군.”
“어디까지나 가주님의 선택이죠. 솔직히 전 레이튼에 닦아 놓은 기반도 없으니 왕국으로 튀어도 상관없어요.”
거짓말이다.
왕국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큰 타격은 없겠지만, 그때는 바이론이 문제다. 지금도 A등급 30명 동원할 정돈데, 지금 놓치면 얼마나 커질지 상상도 안 간다.
놈이 파견 올 거 생각 안 하고 일 저질렀을 리도 없고. 뭔가 대책이 있겠지.
해치운다면 지금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태연하게 말했던 것은.
“……위치를 알려 주게.”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저렇게 말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목숨 내줬으면 내줬지, 노블레스를 포기할 인간은 아니다.
남자가 알려 주는 위치를 듣고 바로 검을 챙겼다.
“제리스를 붙여 줄 테니 같이 가게. 이제 와 자네가 죽으면 나도 곤란해지니까.”
“필요 없어요. 어차피 사람 한둘 더 붙는다고 이길 전력도 아니잖아요.”
“그럼 대체 어쩔 생각인가?”
“20명도 버거운데 30명은 무리죠.”
검이 잘 메어졌는지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숫자 좀 줄이고 올게요. 가주님은 그동안 시간만 끌어 주세요.”
* * *
“주교님은 비석에 뭐라 적혔으면 좋겠어요? 레이튼 주교, 길거리 한량들에게 맞아 죽다. 이런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적어도 아리나, 네 옆에 묻히고 싶지는 않구나.”
주교가 한숨 쉬며 아리나를 바라봤다.
태연한 척 굴고 있었지만, 가장 힘을 많이 쓴 신관이 그녀다. 애써 숨기려 해도 얼굴에 드러난 피곤을 감추진 못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성기사들은 쓰러진 지 오래고, 그 상처를 치료할 신관들도 힘이 바닥나 기진맥진한 상태다.
시르케와 라키안 둘이 번갈아 가며 시간을 끌고 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다.
10분은 더 버틸까.
A급 열 명 상대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성과지만, 유의미한 시간이라 보기는 힘들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10분 더 연명해 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단을 내린 주교가 옆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라키안을 바라봤다.
“라-키탄-안티그란 경. 일부만이라도 탈출시킨다면 성공 확률이 얼마나 되겠소?”
“성-기사.”
라키안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주교가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경과 시르케 양, 아리나 셋이라면?”
“주교님!”
아리나가 기겁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무리 저랑 묻히기 싫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죽기보다 싫으니 말하는 게다.”
주교가 덤덤한 얼굴로 아리나를 바라봤다.
“같이 묻힌다 해도 그게 지금은 아니야. 적어도 수십 년은 지났을 때의 얘기지.”
잠시 말을 멈춘 주교가 머뭇거리다 손을 뻗어 아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디 내 손으로 너를 묻을 일은 없게 해 다오. 아리나, 네가 나를 묻어야지 내가 너를 묻는 일이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
너무나 진중한 대답에 아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도 저 방법 외에는 길이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일이다.
주교가 고개 숙인 그녀의 정수리를 보다가 다시 라키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확률이 얼마나 되겠소?”
“……성-기사.”
라키안이 한 손가락을 전부 폈다.
숫자 다섯. 절반이란 뜻이다.
주교가 한숨 쉬며 말했다.
“높진 않지만…… 그 정도면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니 어쩔 수 없군. 지금 바로 준비…….”
“전 안 갈 거예요.”
고개 숙인 채 대답하는 아리나의 말에 주교가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고집부리지 말거라. 어차피 네가 여기 남는다 해도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
“고집부리는 거 아니에요.”
아리나는 최대한 태연해 보이는 얼굴을 가장한 채 고개를 들었다.
“왜 나가는 게 전데요? 저기 낀다고 무슨 도움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기사님이랑 시르케님 둘만 나가면 확률이 7할은 될 거예요.”
“그건 네가 신관 중 가장 재능이…….”
“제 재능 넘치는 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게 저 내보내려는 유일한 이유예요? 키탄께 맹세하면 저도 군말 없이 따를게요.”
“…….”
이번에는 주교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재능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십 년 몸담아 온 키탄께 거짓을 맹세할 수도 없었다.
“기사님과 시르케님이 나가는 건 신전에서도 인정할 거예요.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으니까. 근데 그 옆에 견습인 제가 껴 있으면 그림이 이상하죠.”
아리나가 고개 저으며 말을 이었다.
“만인을 평등하게 대해야 할 주교가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처리했다간 지금까지 쌓아 온 주교님 명성이 바닥으로 떨어질 거예요. 전 제 목숨 하나 건지자고 그런 불명예 안겨드릴 생각 없어요.”
“내 명예를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제가 연관된 일인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어차피 죽은 자의 명예다.”
“저 대신 돌아가셨을 아버지의 명예죠.”
아버지.
그 단어에 주교의 몸이 움찔거렸다.
10년 넘게 키워 오며 딸 같이 생각하는 아이지만, 호칭은 주교님으로 통일시켰다. 언젠가는 친부모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나는 네 아비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는요. 근데 저희가 과학 따지는 종교는 아니잖아요. 감성으로 믿어야지.”
아리나는 주교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는 얼굴 한 번 못 본 친아빠보단 제 밥에 몰래 고기 한 점 더 넣어 주던 주교님을 아버지라 생각해요. 주교님도 저를 딸처럼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하진 못하잖아요.”
단호하게 없다고 답하려던 주교의 입이 멈췄다. 불안으로 떨리는 아리나의 눈동자를 본 탓이다.
“봐요. 이렇다니까.”
아리나가 재빨리 말했다.
대답할 틈도 안 주려는 것처럼.
“그리고 주교님보다 먼저 죽진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제 목숨이 얼마나 질긴데요?”
“……아리나.”
“게다가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그리고는 시르케와 싸우는 중인 용병들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 눈 풀린 거 보세요. 무슨 병든 닭 보는 것 같네. 비실비실한 게 틈만 보이면…….”
아리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르케가 날아왔다.
“더는 무리야. 교대 좀 해 줘.”
“상대는 어때요? 비실비실한 게 곧 쓰러질 것 같지 않아요?”
“……무슨 헛소리야?”
시르케가 본인 얼굴을 가리켰다.
항상 싱글거리던 표정은 어디 갔는지 피곤에 절은 얼굴이다.
“저쪽이 비실비실한 거면 난 지금 죽음 앞둔 노인이야.”
“눈빛 말이에요. 제정신 아닌 거 같은데.”
“……확실히 반응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시르케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A급이 열이야. 솔직히 두셋 정도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저건 무리지.”
아리나가 푹. 고개 숙였다.
같은 A등급인 그녀가 두셋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는 말. 마녀의 힘을 드러냈을 때 기준일 거다.
사실, 그 점을 믿은 것도 있다.
예전에 본 시르케의 힘은 그만큼 대단해 보였으니까. 그런데 그 상태로도 두셋이 한계란다.
아무리 전투가 더하기 빼기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지만, 그녀와 비슷한 전력의 라키안이 합류해도 열 명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방법 없는 거예요?”
“있긴 한데.”
그 말에 아리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뭔데요?”
“저거 아무리 봐도 바이론 아저씨가 보낸 놈들이란 말이야.”
시르케가 싱긋 웃었다.
“다시 밑으로 간다고 하면 봐줄 것 같기도 하고. 전력 부족 상태일 테니까.”
“……저희는요?”
“모르지. 내가 아는 아저씨 성격이면 죽일 거 같은데? 신전 사람 밑에 두는 건 메리트보다 디메리트가 커서.”
“……진짜 갈 건 아니죠?”
아리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상태로도 버티는 게 한계인데, 그녀마저 전향해 버리면 그들은 바로 무너져 내릴 거다.
시르케는 읽기 힘든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었다.
“글쎄?”
“…….”
“……그렇게 보지 마. 농담이니까. 어차피 반쯤 인생 저당 잡힌 처지라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고.”
아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당이요?”
“그런 게 있어. 그보다 무슨 결정이든 빨리 내리는 편이 좋을걸? 조금만 더 끌면 선택권 자체가 없어질 테니까.”
“……그럼 역시 기사님이랑 시르케님 둘이 탈출하시는 게…….”
그때 시르케와 교대해 시간을 끌던 라키안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근처까지 날아왔다.
복부에 꽤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당장 치료하기도 힘든 수준의 상처였다.
시르케가 얼굴을 굳혔다.
“이미 늦은 걸 수도 있고.”
아리나가 다급히 마지막 신성력을 쥐어짜 라키안을 치료하며 옆을 돌아봤다.
A급 용병들이 무기를 든 채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기사님이랑 시르케님 보내는 건데.’
그렇게 후회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순간.
“……리안 님?”
갑자기 쓰러지는 용병 사이로, 이곳에서 볼 거라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