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49)
레이튼의 자경단원, 한스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운수가 좋았기 때문이다.
갈 때마다 보호세 없다며 뻗대던 채소가게 노인네가 겨우 몇 대 때린 정도로 순순히 돈을 내뱉었고, 사사건건 신경 거슬리게 하던 스캐빈져 놈들은 어디서 뭘 하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항상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
한스는 기분 좋게 휘파람 불며 거리를 활보했다. 가슴팍에 그려진 자경단의 마크를 보자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치 보며 자리를 피한다.
모르는 이가 보면 기분 나쁠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사실 그는 저런 걸 즐겼다.
자신이 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 망하고 팔자가 피다니. 웃기는 일이지.’
제국 멸망하기 전엔 부모님 재산 까먹으며 살던 백수 나부랭이가 이젠 어깨 쫙 펴고 다니니, 이게 출세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한스는 흐뭇하게 웃으며 근처에 진열돼 있던 음식을 가져다 먹었다.
당연히 돈은 안 냈다.
거리를 지키고 있는 게 누군데.
‘고마운 줄도 모르는 것들.’
쯧쯧, 혀를 차며 새 본부에 도착하니 동료가 나와 한스를 맞이했다.
“순찰은 끝났나?”
“그래. 그보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보호비 걷으러 간다더니, 뻣뻣한 테인 영감이 순순히 돈이라도 냈나 보지?”
하여간 눈치 빠른 놈. 얘기하는 보람이 없다니까.
한스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오늘 스캐빈져 놈들이 안 보이던데 무슨 일인지 알아?”
“아니, 본인이 먼저 말해 놓고 이렇게 끊는 건 뭔가?”
“네가 먼저 재미없게 했잖아.”
동료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 저었다.
“거참 무슨 소린지…….”
“그 얘기는 그만 됐다는 소리다. 그것보다 아는 거 없냐니까.”
“스캐빈져들이라면 나도 아는 게 없지. 단체로 휴가라도 갔나?”
“……놈들이 휴가도 가나?”
“내가 알 게 뭔가.”
삐졌군.
한스는 한숨을 내쉬며 동료를 달랬다.
“그래. 내가 미안해. 네 말대로 채소가게 노친네가 보호비 낸 게 맞으니 오늘은 내가 한턱내지. 그럼 됐냐?”
“진작 그렇게 말하지 그랬나.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는데 안 전할 뻔했군.”
“전달 사항?”
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일은 드문데.
“무슨 전달 사항?”
“나도 아직 모르네. 지금 당장 광장으로 모이라더군. 나도 막 가려던 참일세.”
“본부도 아니고 광장을?”
공지가 있다며 단원들을 모으는 경우는 가끔 있었지만, 그런 경우 전부 본부에서 해결하곤 했다. 더군다나 전달을 광장에서 한다는 건 자경단이 생긴 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이하긴 하지. 나도 이유는 모르네.”
“대체 아는 게 뭐야?”
“자네 인성 엿 같다는 거.”
투덜거린 동료가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그래서, 갈 건가 안 갈 건가?”
“가야지.”
한스가 그렇게 답하며 동료의 뒤를 따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이 나왔다.
넓은 공간 한가운데 화려한 분수가 있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 파편조차 없다. 돈 되는 구석은 왕국 놈들이 전부 약탈해 갔으니까.
어쨌든 광장으로 소집했다는 얘기가 사실이긴 한지,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던 자경단원들이 넓은 공간을 꽉 채우고 있었다.
“허, 이 정도로 많이 모인 건 처음 보네. 본부에 소집할 때도 이렇게 모인 적은 없는데.”
“이번엔 특히나 참석하라 강조했으니까. 안 올 경우 퇴출까지 할 수 있다더군.”
“……그런 얘기를 전달 안 하려 했다고?”
“어쨌든 하지 않았나.”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동료를 보며 한스는 혀를 찼다.
‘그보다…….’
한스가 광장을 둘러봤다.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눈치챘는지 다들 표정이 굳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나긴 할 모양인데…….’
여태 이렇게까지 참석을 강조한 적은 없었다.
분명 중대발표란 소리겠지.
‘최근 떠오른 바이론이란 자 때문인가?’
갑자기 신패를 사용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남자. 퇴장도 화려했다. 신패가 가짜라는 게 들통나며 신전에 제대로 찍혔으니까.
‘그런 미친놈을 신경 쓸 이유는 없을 텐데.’
건드려도 신전을 건드리다니.
굳이 손쓰지 않아도 금방 정리될 테니, 그쪽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럼…… 사자 검이랑 바람의 마도사?’
레이튼 최후의 양심이라 불리는 두 용병.
자경단과도 자주 부딪힌 놈들이다.
크게 부딪힌 적도 없고 해치우자니 득보다 실이 커 보여서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단장이 마음 굳게 먹고 해치울 생각일 수도 있다.
‘괴물 같은 꼬맹이 하나가 붙었다 하니.’
마력도 없는 몸으로 C등급 스캐빈져 수십을 날려 버렸다던가?
대체 어떻게 그런 괴력을 가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놈이 마력까지 가진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아직 직접 부딪힌 적은 없지만, 그 남매 파티 쪽에 붙은 듯하니 잠재적인 적으로 봤을 수도 있다.
‘더 크기 전에 정리할 생각이신가 보군.’
그렇게 결론 내린 한스가 고개 끄덕일 무렵, 광장에 모인 단원들의 고개가 한곳으로 쏠렸다.
철컥철컥.
금속으로 만들어진 굉음.
온몸을 황금색 갑옷으로 감싼 남자가 광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진짜 어딜 가도 눈에 띌 비주얼이란 말이지.’
마력 사용자면서 굳이 갑옷을 걸친 모습.
게다가 그 색깔마저 눈에 띄는 황금색이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겉멋 든 애송이로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놈들은 죄다 죽어 버린 게 문제지만.’
자경단장 철갑의 브루노.
그가 광장의 중앙, 예전엔 분수가 있던 위치에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모이느라, 고생 많았다. 오늘은 말했듯, 중대발표가 있어, 불렀다.”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
말투가 중간중간 툭툭 끊어진다.
‘……뭐지?’
평소에도 비슷한 느낌이긴 했는데, 오늘따라 과하다. 마치 가디언이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한스가 의아함을 느끼든 말든, 브루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늘 모은 이유는, 이거다.”
짝짝.
브루노가 손뼉을 치자 광장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둘러쌌다. 20명은 족히 돼 보이는 인원, 문제는 그 숫자가 아니라 면면들이었다.
“이, 이보게. 저건 일격의 발디 아닌가? 아르곤 왕국에서 활동하는 A등급 용병 말일세!”
“……그 옆은 불꽃의 덴버야. 예전에 칼페온에서 본 적이 있어.”
“엘프 할리도 있네! 겔리안 밖으로 안 나오기로 유명한데…….”
광장이 단원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20여 명 모두가 이름이 널리 알려진 A등급의 실력자였고, 하나같이 레이튼이 아닌 왕국의 용병들이었다.
‘……레이튼에 있는 A등급이 몇이지?’
열은 안 될 거다.
한스가 꿀꺽 군침을 삼켰다. 저 정도면 레이튼 전체와 전쟁을 벌일 만한 전력이다.
‘대체 어디서 저런…….’
지금 상황은 한스의 예상을 한참 초월했다.
뭐? 바이론이라는 미친놈을 잡아? 사자 검과 바람의 마도사를 해치워?
겨우 그따위의 일이 아니란 말이다.
‘레이튼을 손에 넣을…… 생각이다.’
그리고 그건 아주 손쉽게 가능할 거다.
일주일도 걸리지 않겠지.
한스의 두 눈이 순식간에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자경단이 레이튼을 지배하면 말단인 나한테도 콩고물 정도는 떨어지겠지.’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듯 단원들의 눈이 같은 감정으로 가득 찼다.
욕망.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눈치를 보며 활동했지만, 이젠 눈치 볼 필요가 없을 거다.
하지만 브루노는 그런 단원들의 기대를 박살 내듯 말했다.
“우리 자경단은, 지금, 이 순간부터. 바이론님 밑으로 들어간다.”
“……뭐?”
그 뜬금없는 발표에 한스는 물론, 자경단원 모두가 일제히 경악의 목소리를 냈다.
“단장! 그게 무슨 말이요!”
“우리가 왜 그런 놈 밑으로 들어간다는 겁니까!”
“그놈이 엉덩이라도 대줬소?”
“조용.”
그런 웅성거림과 본인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브루노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는 결정사항이며, 거부하는 자는, 이 자리에서, 참수한다.”
스르릉.
브루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광장을 둘러싸고 있던 A급 용병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사방에서 솟구치는 살기.
아무리 멍청한 자들이어도 그것이 단순한 협박용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자경단원 중에는 이런 상황에 항변할 용기 있는 자도, 살아서 빠져나갈 실력자도 없었다.
그러니 모두 조용히 침묵할 뿐.
브루노가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지금부터. 바이론님의 첫 번째 명령을, 전달하겠다.”
서걱.
말이 끝남과 동시에 브루노가 근처에 있던 자경단원의 목을 베었다.
퉁. 퉁. 퉁.
주인 없어진 머리통이 바닥에 튕기며 굴러갔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모르는 표정으로.
순식간에 광장이 서늘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오늘 자정까지, 인간의 수급, 열 개를 모아 와라. 못 모은 자는, 머리를 벤다.”
브루노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작.”
* * *
“꺄아악!”
“사, 살려 줘!”
“하, 한스…… 네가 어떻게.”
“닥쳐! 수급이 하나 부족하단 말이다! 자경단원 거, 안 쳐 준단 말은 없었다고!”
밖은 아비규환이었다.
민간인들이 무력하게 학살당하고, 자경단원이 같은 자경단원을 베는 모습도 보였다.
현세에 지옥이 강림한다면 이러할까.
그전에도 살기 좋다고 말하기 힘들던 레이튼이었지만, 그때의 모습이 천국 같아 보일 정도의 지옥도를 뽐내고 있었다.
“…….”
죄책감을 느끼진 않는다.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책임감은 느꼈다.
나와 관계없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쓰러지는 사람 시선 하나하나를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그게 이 게임 제작자로서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짜 자네 말대로 됐군.”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말에 고개 돌리지 않은 채 답했다.
“바란 적은 없지만요.”
“이런 상황을 누군들 바라겠나. 바이론같은 자가 아니고서야. 그래도 자네는 할 만큼 했네. 저 용병들을 풀자고 한 건 자네 아닌가.”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자경단원들과 싸우고 있는 용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공치사는 됐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경단원들이 아니잖아요.”
“……A급 용병들 말이군.”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침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최대한 모아 봤지만 10명 정도가 한계였네. ……한데 정말 A급이 20명이나 되나?”
“직접 조사도 했을 거 아니에요.”
내가 알려 준 건 바이론이 왕국에서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다는 것과 그 명단뿐이다.
안면 좀 있다고 확실치도 않은 정보에 움직일 만큼 노블레스가 호락호락한 조직도 아니고. 내가 정보를 줬지만, 진위 조사 정도는 분명하게 하고 움직였을 것이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를 끝냈으니 더 이해가 안 가는 걸세. 바이론에게는 그 정도 용병을 고용할 인맥도, 돈도 없을 텐데…….”
“원래 사람은 비밀 한두 가지 정돈 가지고 있는 법이죠.”
“그리고 자네는 우리도 파악 못 하는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거고.”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예전 독살에 대해 얘기할 때 받았던 눈초리.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의심의 빛보다 경탄의 빛이 더 강해 보였다.
“그건 제 비밀로 해 두죠. 알아봐 달라 했던 건 어떻게 됐어요?”
“키탄의 주교라면 오늘 돌아올 걸세.”
“다행이네요. 그쪽이 돌아오면 같이…….”
“테, 테이어님!”
앞으로 계획에 대해 설명하려는 순간, 한 남자가 문을 부수듯 열고 들어왔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중요한 일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 했을 텐데.”
“그, 그게…….”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남자가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말씀하셨던 신전의 귀한 행렬이…… 습격을 받아 도주 중이랍니다.”
“……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