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47)
“……저주가 사라졌다고?”
타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론한테 들었어. 황실이 무너짐과 동시에 본성을 되찾은 기분이었다고.”
“…….”
“……괜찮냐?”
“……그거, 확실한 거야?”
확신을 담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한테 들은 정도가 아니라, 내가 직접 짠 설정이니까. 바이론 성격도 변하지 않은 것으로 봐선 설정이 바뀐 건 아닐 거다.
타냐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황실 무너뜨린 왕국 원망 못 하는 건? 아버지를 죽인 대부를 원망 못 하는 건? 그게 전부 내 진심이라고?”
“…….”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답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타냐는 충격 먹은 얼굴로 말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지금은 위로해 줄 사람보다는,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거다.
“후…….”
괜히 말했나?
아니, 결국은 알게 될 사실이었다.
방 앞을 조금 서성거리다 계단을 내려갔다.
타냐가 원래 죽는 이유는 바이론 탓이니까 살짝 일러두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저주 풀린 것도 모르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바이론 그 새끼는 본성이 워낙 딴판이라 바로 눈치챈 건데.
과거사를 대충 아는 입장에서 저런 반응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당분간 요양시킬 작정이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위안하며 거실에 도착하고 바깥을 바라봤다.
어느덧 밤.
문제는 그게 아니라, 코드 하나가 입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NPC-1-162-4]
초대받지 못한 손님, S등급 암살자 나비드.
……저 인간이 왜 여기 있지? 지금이면 아르곤 왕국에서 활동할 시긴데.
거기까지 생각하고 얼굴을 굳혔다.
이놈이 지금 레이튼. 그것도 우리 집 앞에 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나에 대한 암살 의뢰.
그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밖으로 나섰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맞이하면 큰일이니까.
현관을 나가 입구를 바라봤다.
인자한 얼굴의 노인이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말 한마디 없이 서 있었다.
검은색 코트에 옆구리에 낀 기분 나쁜 책.
게임 내 초상화로 볼 땐 별생각 안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소름이 돋는다. 그 몸 안에 날뛰는 마력 코드들을 보니 더.
거의 카시아랑 비슷한 수준이구나.
2부 스토리에 진입도 못 했는데 뭔 괴물들이 이렇게 계속해서 나오는지.
도시에 마가 꼈나?
천천히 입구로 다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여긴 잡상인 출입 금지예요.”
“허허, 내가 뭘 팔러 온 사람처럼 보이나?”
“아니면 뭐, 구걸인가?”
내 이죽거림에 나비드가 다시 허허, 하고 웃음 지었다.
“잡상인도, 구걸도 아닐세. 그럼 이제 뭐가 남나?”
“글쎄요. 진상?”
“전도일세. 좋은 말씀 전하러 왔지.”
“진상 맞네.”
나는 한숨 쉬며 말을 이었다.
“여긴 잡상인, 구걸, 진상, 사이비, 기타 등등 전부 출입 금지니까 그만 돌아가시죠.”
“그러지 말고 한 번 들어나 보지 그러나.”
나비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생에 듣는 마지막 말이 될 텐데 무슨 얘기든 의미가 있지 않겠나.”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 말이라…….
“제가 죽는단 소린가요?”
“바로 맞췄네. 이제 들어 볼 생각이 드는가?”
“글쎄요. 제가 아직 앞날이 한창이라 죽을 생각이 없거든요. 혹시 영감님 관 짜는 날짜를 착각하신 건 아닌가요?”
“허허, 내 관은 이미 만들어 둔 지 오래니 걱정해 줄 필요 없네.”
나비드가 들고 있던 책을 펼쳤다.
나는 그 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설정대로라면 저 책의 표지는 인피(人皮)일 거다.
설정 그대로일지 살펴볼 생각이었는데 육안으로는 구별되지 않는다. 다만, 보고 있자니 속이 매스꺼워지기는 한다. 진짜 사람 가죽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비드는 태연한 얼굴로 책을 들고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아몬 님에 대해 아나?”
“아몬드?”
“아몬 님일세. 방문객들의 신.”
“그런 신은 처음 들어 보네요. 좀도둑의 신이나 암살자의 신은 들어 봤는데.”
나비드가 언짢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일반인들 사이에선 그런 식으로 많이 와전되어 있긴 하지. 아몬의 형제들이 좋아하는 말은 아니니 염두에 뒀으면 좋겠군.”
와전이라…….
지들만 인정 안 하는 걸 언제까지 우길 생각인지.
“대부분이 그렇게 알고 있으면 와전이 아닌 거 아닌가요?”
“숫자는 더 많을지언정 그들은 아몬 님을 모시지 않는 자들 아닌가. 자연히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는 거겠죠.”
모든 암살자가 아몬의 신도는 아니지만, 모든 아몬의 신도는 암살자. 이런데 무슨 배울 점이 있다고 사람들이 관심 갖겠나?
심지어 그냥 암살자도 아니다.
어디 한 군데씩 맛 간 또라이들이다.
제정신 박힌 인간이면 절대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도 않을 거다.
“무지몽매한 자들까지 우리가 책임질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튼, 아몬을 전도하러 왔다. 이 말이에요?”
내 말에 나비드가 환히 웃었다.
“그렇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대뜸 암살자 되라고 권하진 않을 테고…….”
“허허, 자네는 이해도 빠르군. 그 말이 맞네. 그런 쪽의 전도는 다른 방식이 있지.”
나비드는 환히 웃는 얼굴로, 인자하게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죽음을 전도하러 왔네.”
“죽음이라…….”
나는 피식 웃었다.
“누가 아몬교도 아니랄까 봐 말을 되게 감성 돋게 하시네. 시인하셔도 되겠어.”
“실제로 겸업하는 자들이 몇 있지. 그보다, 아몬 교에 대해 꽤 아는가 보군.”
나비드가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널리 퍼져 있는 종교가 아니다 보니 신기한 거겠지. 암살자 종교가 널리 퍼져 있는 것도 웃기긴 하다만.
“그냥 대충 아는 정도죠.”
“대충이라도 안다는 것이 중요하지. 허허, 이런 곳에서 아몬의 교도를 만날 줄이야.”
“교도 아닌데요.”
“아몬 님에 대해 알면 다 같은 교도 아니겠는가.”
그런 식이면 나는 종교가 수백 개는 되겠다.
내가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건 말건 나비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럼 혹시 아몬교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도 아는가?”
그 말에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아몬교의 세 가지 질문.
암살 길드와 가장 크게 구별되는 아몬교의 특성이다. 답하지 못하면 죽는다고 알려진, 암살하기 전 당사자에게 묻는 세 가지 물음.
[생명을 해한 적 있는가]
[해쳤다면 이유가 있는가]
[앞으로 해칠 예정이 있는가]
아마 저 세 개였던 거 같은데…….
“질문을 안다니 물을 필요 없겠군. 그래서, 답은 뭐라 생각하나? 네, 아니요로만 답해 주게.”
나는 기대하는 눈빛의 나비드를 슬쩍 보며 입을 열었다.
* * *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나비드는 무척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이유는 물론, 레이튼, 이 쓰레기들의 도시에 온 것 때문이다. 한때는 대륙 최고의 도시로 군림했다지만, 지금 꼴을 보라.
거리는 오물투성이에 사람들 눈에는 생기가 없다. 게다가 모든 이들이 주변을 경계의 눈으로 살피기 바쁘다.
인간을 불신하는 눈빛.
나비드는 저 더러움이 싫었다.
물질적 더러움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정적 더러움이.
‘아몬께서 네 이웃을 경계의 눈으로 살피지 말라 하셨거늘.’
어쩌다 이리 각박한 도시가 되었는지.
예전 레이튼의 모습을 아는 나비드로서는 한숨 나오는 일이었지만, 일은 일. 안 올 도리가 없으니,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긴 하군.’
나비드는 목표가 그려진 초상화를 봤다.
금발의 소년, 특이사항 은신을 꿰뚫어 봄, 무력 C등급으로 추정.
‘내가 맡을 만한 일이 아니거늘.’
끽해야 추정 C등급에게 S등급인 자신을 보내다니, 이건 너무 지나친 낭비 아닌가.
‘교주님 모습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나비드가 고개를 털어 상념을 떨쳐 냈다.
아몬 아래 유일한 하늘이신 교주님을 의심하다니,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보다.
‘연유가 있으시겠지.’
자신은 그냥 일만 끝내면 될 뿐이다.
그래도 목표가 있는 노블레스 거리에 도착하니 기분이 조금 풀린다.
‘여긴 그래도 깨끗하군.’
그 점은 마음에 들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경계의 눈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도시에서 가장 잘 사는 거리가 이 정도라니…….’
쇠퇴해도 어디까지 쇠퇴한 건지.
쯧쯧, 혀를 찬 나비드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지나 상당한 크기의 저택이 나왔다.
목표가 사는 곳.
정문에 서서 기다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발의 소년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명백히 자신을 의식하고 나온 모습이었다.
‘은신을 꿰뚫어 본다는 게 사실이었군.’
마력은 전부 감췄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거지?
S등급으로 승급한 20년 전 이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하긴 대륙은 넓으니.’
아몬교에 들어오고 50년.
온갖 기이한 능력자들을 셀 수 없이 봐 왔다. 은신을 눈치채는 건 능력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다.
‘딱히 상관은 없지.’
아몬의 교도들은 암살자가 아니니까 은신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당당히 죽음을 전도할 뿐.
‘그보다…….’
나비드가 대화를 나누던 목표물을 쳐다봤다.
기억할 필요 없다고 느껴 흘려 넘겼던 이름이 떠오른다.
분명…… 리안이었던가?
‘건방지군.’
하지만 건방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몸에는 알 수 없는 여유가 흐르고, 태도에는 자연스런 존중이 배어 있다.
실력을 감췄다 해도 그는 옷차림만으로 사람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런 자신을 상대로 저런 여유와 행동은, 스물도 안 된 꼬마가 억지로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나비드는 오랜 세월을 살면서 저런 인물을 몇몇 본 적이 있었다.
‘제국의 고위 귀족. 혹은…… 황족의 생존자.’
전자라면 별문제 없겠지만, 혹여 후자라면…… 교주께서 자신을 배정한 것도 이해가 간다.
‘역시 깊은 뜻이 있으셨던 게지.’
나비드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아몬교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도 아는가?”
물으면서도 나비드는 저 꼬마가 답을 알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아몬교에 대해 꽤 알고 있는 거 같기는 하지만, 세 가지 질문은 그리 널리 퍼진 정보가 아니니까.
그래서 별로 대수로운 것도 아니란 마냥 리안이 고개 끄덕였을 때,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만.’
무슨 답을 하든 남는 건 죽음뿐일 테니까.
그래도 간만에 마음에 든 녀석이니 자비롭게 죽여 줘야겠다. 머리는 아몬께 바치고 사지는 잘라 제물로 쓰면 되겠지. 세상에 이런 영광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나비드는 인자한 표정으로 웃었다.
“질문을 안다니 물을 필요 없겠군. 그래서, 답은 뭐라 생각하나? 네, 아니요, 로만 답해 주게.”
나비드가 기대 어린 눈으로 리안을 바라봤다.
긍정인가 부정인가.
대답을 예상해 보는 건 그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적중률도 꽤 높았다.
80프로 이상은 맞았으니까.
‘첫 번째 질문은…… 긍정.’
똑똑한 녀석이다.
‘생명’이란 게 인간만을 뜻하진 않는단 것까지는 눈치챌 터. 벌레도 죽여 보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두 번째 질문도 긍정.’
이유 없는 살생을 즐길 만한 인물은 아니다.
그런 이들에게 풍기는 특유의 ‘피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세 번째는…… 모르겠군.’
황족의 생존자라면 본인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터. 피바람 부는 미래가 될 것이다.
그 정도 각오는 있을 것 같지만…….
‘이 자리에서 살아날 방법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을 수 있지.’
지금 죽는다면 미래에 죽일 예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이유로 나비드도 마지막 말 만큼은 무슨 대답이 나올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나비드가 인자하게 웃으며 리안의 입을 바라봤다.
세 번째 질문은 내 패배를 인정하겠다. 하지만 첫 번째, 두 번째는 내가 틀렸을 리 없다.
‘자, 어디 한번 답해 보거라.’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니요.”
“……뭐?”
그리고 나비드는 레이튼에 오고 처음으로 당황의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