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46)
“그건 말도 안 돼.”
타냐가 단호하게 답했다.
“황족 중에 살아남은 건 나밖에 없어. 그건…… 내가 직접 확인했으니까.”
아직도 괴로운 듯 타냐가 힘겹게 말했다.
황족 대부분은 전쟁 이후 레이튼 광장에서 참수당해 죽었다.
직접 확인했다는 건…… 그 광경을 목격했다는 뜻이겠지.
가족의 죽음이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 그걸 어떤 심정으로 버텼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사실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화제를 돌려 그 기억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뿐이었다.
“방계라고 했어. 그것도 먼. 그러니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그건 더 말이 안 돼.”
타냐가 고개 저었다.
“방계는 푸른 혈맥이 발현되지 않아. 직계 중에서도 소수에게만 나타나는 특성이니까.”
“돌연변이랬어.”
바이론은 말한 적도 없고 오히려 혐오까지 하는 단어지만, 나는 덤덤히 답했다.
꼬우면 와서 반박해 보던가.
“가끔 피가 진한 방계 중에 푸른 혈맥 나왔단 얘기는 들어 봤지만…… 내가 이름도 못 들어 볼 정도로 먼 친척이 그랬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는데…….”
“그러니까 돌연변이지.”
완벽한 논리. 설득당하는 듯하던 타냐가 고개 저었다.
“하지만 전에 그랬잖아. 그 사람, 고문이 취미라고.”
“그랬지.”
“그럼 푸른 혈맥 아닐 거야.”
“왜?”
“푸른 혈맥엔 저주가 걸려 있으니까.”
……얘가 지금 뭐라는 거지?
“푸른 혈맥의 저주?”
“인류를 배신할 수 없게 인간을 사랑하게 만드는 저주.”
인간을 위해 살아라. 인류에 헌신하라.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희생하라. 그것이 너 자신이라 해도.
황실에 내려오는 가르침.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받는 황족의 자리는, 사실 기계 부품과 같다.
오직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 저주 때문에 나는 부모님을 죽인 사람도 원망할 수 없어. 그 저주 때문에 나는 원수까지 이해할 수밖에 없어.”
타냐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내뱉듯 말했다.
“그러니까, 사람 괴롭히는 게 취미인 인간은 푸른 혈맥일 리가…….”
“말하는 도중 미안한데.”
이 말은 해야겠다.
“푸른 혈맥의 저주는, 황실 무너졌을 때 이미 사라졌어.”
* * *
해방 왕 로이드 스트라우드.
제국민들에겐 초대 황제, 인간들에겐 인류의 구원자, 이종족들에겐 문을 닫은 자.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종족, 성별, 나이 모든 걸 막론하고.
심지어 커뮤니티 여론도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제국의 초대 황제, 로이드의 이름을 거꾸로 하면?]
뭘까요?
―드이로?
ㄴ정답은 ‘신성한 황제 폐하의 존함은 거꾸로 부를 수 없다.’ 입니다. 저열한 왕국민 새끼야.
ㄴX망한 제국 새끼들 또 나대죠?
ㄴ응. 배신자 새끼들 상대 안 해.
ㄴ응. 나라 없는 떠돌이. 밖에선 스캐빈져한테 처맞고 안에선 자경단한테 처맞고 상점 갔다 노블레스한테 덤터기 처맞아.
[로이드 이 새끼 중2병 아님?]
지도 인간이면서 인간들 너무 나약하다 인간 싫다, 이지랄 ㅋㅋㅋ
―한낱 인간의 몸으로 신을 품고 계시니 그리 생각할 만도 하지.
ㄴ그러면서 인간은 왜 구한 거임? 심지어 지 후손들한테 저주까지 내리고.
ㄴ벌레들이 안쓰러우셨나 보지.
ㄴ후손은 안 불쌍함?
ㄴ벌레가 왜 불쌍함?
ㄴ가불기 오지네;
ㄴ그래도 제국 무너지면 저주도 풀리게 조치해 뒀잖아. 여기서 트루엠페러 로이드님의 인성을 엿볼 수 있지.
ㄴ수백 년간 혹사당한 후손들 오열.
[로이드님 인생의 오점은 한 개뿐이지]
바이론 이 개새끼 낳은 거. 시X럼이 전투 때마다 계속 동료 세뇌해서 나 다구리 치는데 대체 어케 잡음? 부동심 배우고 갔는데도 이 지랄임.
―바이론은 애들이 하도 어렵다고 징징거려서 리안이 직접 올려 둔 공략본 있음. 그거 참고하셈.
―26대손쯤 되는 놈이 저지른 걸 왜 로이드님 탓을 하냐? 이 족보도 없는 새끼야. 너 왕국민이지
이렇듯 플레이어 중에서도 추종자가 생길 정도지만, 결점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수천의 민간인이 한 명의 기사보다 전력이 안 된다는 이유로 버리고, 본인 대신 사망한 충성스러운 수하의 희생을 비웃는. 직계인 타냐보다 방계인 바이론에 가까운 인간이다.
저주가 사라지는 것도 후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약을 설정할수록 소비되는 힘이 적어지기 때문에 내린, 오직 효율만을 본 선택지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기록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백만의 민간인을 희생해? 그게 뭐 어쨌다고?
인류의 존속이 걸린 전쟁이었다.
그 정도 희생도 없는 것이 이상하다. 사람들은 영광의 함성을 지르며 명예롭게 죽어 갔을 것이다.
기사의 희생을 비웃어? 그게 뭐 어쨌다고?
로이드 전하께서 그 이후 이루신 업적을 봐라. 죽은 기사마저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 그게 뭐 어쨌다고?
그 실험 덕분에 인간이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지 않았나. 분명 피험자들도 인류를 위해 헌신의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전부 본인 일이 아니기에 내뱉을 수 있는 헛소리.
어떤 죽음에도 영광은 없었고, 기사는 피눈물 흘렸으며, 피험자들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고 죽어 갔다.
공(功)으로 업(業)을 가릴 수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
희생자들은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건, 아직 살아 있는 로이드의 후손뿐이다.
* * *
타냐는 어릴 적 기억들을 떠올렸다.
‘황녀님, 레나 님과 싸우셨다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었는지요?’
‘걔가 꼴 받게 하잖아!’
‘……황녀님.’
‘걔가 빡치게 하잖아!’
‘……전혀 나아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나빠졌군요.’
타냐는 억울했다.
자랑질한 것도 걔고 무시한 것도 걘데 왜 나한테 뭐래?
‘레나가 먼저 생일 선물로 말 받았다고 뻐겼단 말이야.’
‘자랑했다, 겠지요. 그리고 말이라면 황녀님도 선물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 종이로 접은 거? 물에 젖어서 버렸어.’
‘……리카르도 경이 들으면 슬퍼하겠군요.’
곰 같은 덩치로 종이접기를 하던 1기사단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타냐도 내심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지만, 어쩌란 말인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애초에 황족이 귀족보다 높다고 했잖아. 근데 왜 걔는 맨날 나 무시해?’
‘그건…….’
‘아, 몰라. 난 잘못한 거 없으니까 벌줄 거면 알아서 하라 그래.’
답은 빨랐다.
매로 20대. 기사가 직접 집행했고, 인정을 봐주지 말라 했다.
타냐는 신관의 치료를 받고도 한 달 가까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어린아이 싸움에 과한 처벌이었고, 형벌이었다. 그 대상이 황족일 경우라면 더욱더.
누가 감히 황족을 처벌한단 말인가?
하지만 형벌은 그대로 집행되었다. 그 명령을 내린 것이 당대 황제. 즉, 타냐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그만한 잘못이겠거니, 처음에는 순응하던 타냐도 점차 반발심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했나?’
막말로 친구랑 싸운 게 이렇게까지 혼날 일이냔 말이다. 아니잖아!
레나가 자랑하던 것도 생각났다.
말 집이 없다 했더니 목초지를 사 줬다거나 아예 보석상을 매입해 줬다는 얘기 등등.
‘재수 없는 계집애.’
나는 황족인데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나는 황족인데 항상 처벌만 당한다.
‘이게 무슨 황족이야. 우리 집 개도 이렇겐 안 맞아.’
목초지나 보석상까진 원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날 싫어하는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직접 묻긴 무서웠다. 진짜 싫어한다는 말이 나올까 봐.
그래서 황후, 엄마를 찾아갔다.
‘엄마, 아버지는 왜 저를 싫어해요?’
‘그게 무슨 말이니?’
‘그렇잖아요.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맨날 혼내기만 하고. 어떨 때 보면 나 혼낼 궁리만 하는 사람 같다니까.’
황후는 쓰게 웃었다.
‘폐하가 타냐를 싫어할 리 없잖니. 폐하는…… 그래. 줘야 할 사랑이 너무 많은 것뿐이야.’
‘그거랑 제가 혼나는 게 무슨 상관인데요?’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걸 보여 줘야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지.’
‘……겨우 8살 된 저를 개 잡듯 때려서요?’
‘타냐가 이해해 주렴. 제일 괴로운 건…… 분명 폐하일 거야.’
그렇게 말하는 황후의 표정이 너무 서글퍼 보여서 타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16시간 동안 이어지는 수업에서 깜빡 졸았다는 이유로 다시 수십 대를 맞은 날, 타냐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어째선지 기사의 제지는 없었다.
그냥 말없이 방문을 살짝 열어 줄 뿐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화난 기색으로 들어가던 타냐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항상 냉정하고 굳건해 보였던 아버지가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이후로 타냐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황족이기 때문에, 욕심부려선 안 된다.
황족이기 때문에, 본인에게 더 엄격해야 한다.
하루 16시간 지속되는 수업에 군말 없이 참여했고, 무엇이 갖고 싶다 떼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아버지 저 푸른 혈맥 각성했어요!’
그때까지 어느 곳에서도 재능을 찾지 못한 타냐에겐 구원과 같은 소식이었다.
어딘가에는 재능이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항상 냉담하던 아버지도 함께 기뻐해 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반응은 정반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제는 말했다.
‘그건 저주다. 로이드 그 새끼가 내린 저주.’
들어 본 적 없는 말투와 목소리.
제국의 시조이자 존경받는 조상에게 했다고는 믿기 힘든 말이었다.
처음 보는 모습에 벌벌 떠는데, 아버지가 설명했다. 능력과 재능이라는 미끼로 인간을 사랑하게 만드는 저주라고.
타냐는 그 말이 잘 이해 가지 않았다.
‘그게 왜 저주지?’
지금도 사람 좋아하는데. 레나 걔는 좀 꼴 받긴 하지만.
아버지가 그걸 저주라고 부른 이유를 알게 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엄마가 변방 마을에 시찰을 하러 간 날이었다.
두 개의 마을에 몬스터 웨이브가 터졌고, 하나는 엄마가 있는 마을이었다.
근처에 주둔 중인 기사단은 하나, 한 곳은 포기해야만 했다.
‘당연히 황후께서 계시는 마을에…….’
‘두 마을 중 어느 곳이 더 인구가 적나?’
‘예? 황후께서 계시는 마을이 조금 더 적습니다만…… 그건 왜 물으시는지?’
황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인구가 더 많은 곳으로 보내게.’
그날, 타냐는 깨달았다.
모두를 사랑한다는 건,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그 이후로 타냐는 밤마다 울었다.
얼마 전 봤던 아버지 모습 그대로.
웃음 짓지도 않게 됐다.
냉담하다 생각했던 아버지 모습 그대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