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45화 (45/225)

너의 코드가 보여 (45)

“……뭐?”

카시아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자기가 들은 말을 확신하지 못 하는 얼굴.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필요 없다고요.”

“……혹시 가짜라고 의심하는 거야?”

그럴 리가.

내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할 리 있나. 지금도 혈정석 위로 코드가 선명하게 떠 올라 있다.

[IT-S-74]

역시 S등급이었나.

게임에 등장하는 아이템도 아닌데 코드까지 짜 놓은 내 성실함에 새삼 감탄했다.

“역혈병을 알면서 혈정석을 모르진 않을 거고…… 모르나?”

“진짜인 거 알아요.”

“……그럼 대체 뭐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알기는 해?”

카시아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500년 전, 이 혈정석 하나로 우리 종족 전체의 생존을 보장받았어. 그 정도로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고!”

“유명한 이야기죠.”

“……그걸 알면서도 거절한다고? 무슨 생각이야?”

경계심 가득한 모습으로 카시아가 물었다.

현명하다. 하긴 연세도 있으시니.

“물론 공짜는 아니에요. 물건 하나만 구해다 줘요.”

“……물건? 혈정석을 마다하고 물건 하나?”

“네.”

당연히 평범한 물건은 아니다.

어디 있는지, 어떻게 얻는지 아는 상태에서조차 구할 엄두도 못 내고 있는 물건이니까.

혈정석과 같이 전설로 존재하는 아이템.

천둥과 벼락을 머금은 번개의 돌.

“뇌정석 좀 구해다 줘요.”

“…….”

카시아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게 실존하긴 하는 거야?”

“없는 걸 구해다 달라고 하지는 않죠.”

나는 반신반의하는 카시아에게 뇌정석의 대략적인 위치와 얻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지만, 얘기가 워낙 자세했기 때문인지 중간부터는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설명이 끝나고.

뭔가 망설이던 카시아가 내게 꾸벅, 고개 숙였다.

“뭐예요?”

“네 배려를 눈치챘다는 제스처.”

“배려 아니에요. 뇌정석이 필요할 뿐이지.”

“거짓말.”

카시아가 피식 웃었다.

“뇌정석이면 혈정석과 비슷한 가치를 갖기는 할 거야. 하지만 지금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혈정석을 포기하고 요구할 만한 가치는 없거든. 그것도 이미 얻는 방법 알고 있는 상태에서.”

“…….”

“고마워. 그리고 공격했던 거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할게.”

그리곤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뱀파이어들에겐 없는 인사, 인간들의 방식이다. 이종족 입장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 방식인데, 게임 내에서 저런 인사를 받는 건 2부의 주인공뿐이다.

“……뭐. 착각은 자유라고들 하니까요.”

카시아가 피식 웃었다.

“귀여운 구석도 있네.”

“방법 알려 줄 테니 얼른 돌아가기나 해요. 이러고 있는 사이에 다 뒤졌겠네.”

“안 그래도 돌아갈 거야. 보채기는.”

카시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혈정석을 심장 부근에 밀어 넣었다.

그 안에서 꺼낸 모양.

안 받길 잘했다.

세균이라도 있으면 어쩌겠는가.

초인의 면역력을 뚫고 올 병균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또 누가 아는가. 설정에는 없었어도 여기에는 있을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종이를 꺼내 치료법을 적어 건넸다.

“이미 병이 온몸에 퍼진 경우엔 못 고쳐요.”

“거기까진 기대도 안 했어. 그 정도로 심한 경우는 드물기도 하고.”

카시아가 종이를 보물 다루듯 소중히 품속에 넣고는 내 쪽을 바라봤다.

“뇌정석은 병 해결하는 대로 구하러 갈게. 그리고 이건 기억해 둬. 우리 일족은 받은 은혜를 절대 잊지 않아.”

그리고는 카시아가 순식간에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대답할 새도 없이 사라지는 코드를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혈정석 대신 뇌정석을 고른 것.

이 세계 왔을 당시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지다. 뭐가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지금 당장 전력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하지만 내가 고른 건 뇌정석이다.

왜? 겨우 그사이에 넘치도록 여유가 생겨서?

“…….”

사실 정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심 사람들을 단순히 캐릭터로. 0과1로 이루어진 코드로 보던 내가, 점점 그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게 뭐 어쨌단 건데.”

제1 목표는 지구로 돌아가는 것. 힘을 키우는 건 어디까지나 그 과정일 뿐이다.

여기는 지구가 아니다.

내가 태어난 곳도, 내가 살아온 곳도, 심지어는 내가 살아갈 곳도 아니란 말이다.

문득 치밀어 오르는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구보다 큰 태양.

지구보다 맑은 하늘. 지구보다 많은 구름…….

저 모든 것들이, 이곳은 너의 세계가 아니라 말하고 있다. 그 위에 떠 오른 코드가, 여기는 너의 세상이 아니라 말하고 있다.

내리쬐는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나는…….

“……뭐 하냐?”

“일광욕. 누나 진혈은 지켰지만, 약속도 지킬 거야.”

이런 병신.

“그늘에 있으면서 무슨 일광욕이야?”

“나뭇잎 사이로 햇빛 들어온단 말이야. 이 정도로도 나에겐 충분한 고통이라고. 원래 수련은 점진적으로 늘려 가는 거잖아.”

“…….”

말을 말자.

카트발에게 최대한 눈길을 주지 않으며 수련장 전경을 살폈다.

“……수리비 내고 가라 할걸.”

남아있는 잔고를 떠올리며 한숨 쉬었다.

* * *

“폭격 마법이 휩쓸고 갔나?”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없는데…….”

얌전히 고개부터 숙였다. 잘못한 게 있으니까. 심지어 얼마 전에 라이놀의 팔까지 뽑은 입장 아닌가. 여기서 뻔뻔하게 굴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 새끼다.

그나마 돈이라도 있으면 어깨 당당히 펴겠는데, 지금은 그마저 없는 상태.

가장의 무게는 주머니 무게와 반비례한다던가. 다른 세계 와서까지 경제난을 겪을 줄이야.

“수련장이야 원래 부서지라고 있는 거고. 그보다 무슨 일인데? 다친 덴 없어?”

“멀쩡해요. 저 몸 튼튼한 거 아시잖아요.”

“그렇다고 무적인 것도 아니잖아. 어디 봐 봐.”

무슨 극성 부모도 아니고.

멀쩡하단 걸 확인시켜 주고 나서야 라이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쌈닭도 아니고 어디서 이리 사고를 치는지…….”

“그래도 항상 멀쩡하잖아요.”

“그게 문제지. 한 번 크게 다쳐 봐야 조심할 줄 알 텐데.”

“저주인지 격려인지 헷갈리게 하시네.”

나는 피식 웃고 말을 이었다.

“잠깐 아는 사람이 찾아왔었어요.”

“아는 사람?”

라이놀이 새삼 주변을 둘러보다 말했다.

“화끈한 사람이었나 보네. 수련장을 이 꼴로 만들어 둔 거 보니까.”

“그보단 피비린내 나는 사람이었죠.”

“……범죄자야?”

“그건 아니고요.”

라이놀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설명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팔은 이제 괜찮아요?”

“거의 새로 돋아난 느낌이야. 견습이라던데 어지간한 신관들보다 실력이 좋더라. 너도 한번 가 봐. 돈을 좀 요구하기는 하지만.”

견습이 돈을 요구해?

“혹시 그 신관 이름이 아리나는 아니죠?”

“어떻게 알았어? 아는 사이야?”

……견습은 치료 업무에 못 들어갈 텐데, 주교가 없으니 아주 마음대로 날뛰는구나. 하긴 정식 신관이라 거짓말 안 친 게 어디긴 하냐만.

“그냥 조금요. 거긴 다시 가지 마요. 부정 타니까.”

“왜? 실력 좋던데.”

“신관인데 신을 공경 안 해요.”

“……근데 왜 신관이야?”

“모르죠.”

“너랑 아는 사람들은 어째 다 특이하네.”

댁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라이놀은 언뜻 정상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약간 맛 간 상태다. 레이튼에서 저 성격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정상은 아니란 뜻 아닌가.

비정상 사이에서는 정상인이 비정상 취급받는 법이니, 라이놀이 딱 그 꼴이다.

“제가 정상이잖아요. 균형을 맞추는 거죠.”

“……그래.”

뭔가 불만인 표정으로 라이놀이 답했다.

“아무튼, 당분간 수련은 힘들겠네. 수련장은 언제 고칠 거야?”

“네?”

“응?”

잠시 어색한 침묵.

“……제가 고쳐요?”

“당연하지. 부순 것도 네 지인이고, 돈 제일 많은 것도 너잖아.”

……맞는 말이긴 한데…… 후자만 ‘많았던’으로 바꾸면.

“돈 좀 꿔 주세요.”

라이놀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당당한 건 좋은데, 좀 과해서 뻔뻔해 보이기까지 한다. 네 돈은 다 어쩌고?”

“쓸데가 좀 있었어요.”

“……수천 골드를?”

“네.”

사실 나도 반쯤 후회 중이다.

나중에 구할 뇌정석이야 어쨌든, 지금 있는 건 햇빛도 못 보는 피 버러지 하나가 전부다. 왕이 됐을 때라면 모를까 당장은 쓸모가 없고, 심지어 반품도 불가능.

등장인물이고 나발이고 무시할 걸 그랬나.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 이종족 하나를 샀어요.”

“……이종족? 노예 얘기하는 거야?”

“네.”

라이놀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래서 얘기 안 하려 했는데.

“어디서 그런…… 후. 아니다. 뭔 생각이 있겠지.”

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이럴 땐 대꾸하는 게 오히려 역효과다.

“그래서, 무슨 종족인데?”

“뱀파이어요.”

“아까 피비린내니 뭐니 한 게…….”

그 말에 고개 끄덕이자, 라이놀이 한숨 쉬고는 말을 이었다.

“뱀파이어면 그나마 좀 낫네. 집에 있어?”

“네. 지하에요.”

“그래.”

다시 찾아온 어색한 침묵.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불편함이 뒤섞인 침묵이었다.

나는 내심 한숨 쉬었다.

이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확인하는 건 다르니까.

라이놀도 어색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타냐는 만났어?”

그러고 보니 얼굴 못 본 지 꽤 됐다.

방에 처박혀 지내는 건 다린과 비슷한데, 심심하다며 얼굴 내비치는 그쪽과 달리 잘 나오지도 않는다.

“아뇨, 왜요?”

“며칠 전에 잠깐 나온 걸 봤는데 안색이 말이 아니더라. 우리 집 왔을 때보다 더하던데?”

“……타냐가요?”

짐작 가는 게 있긴 하다.

부적 제작. 전에 적당히 하라 일렀는데, 그 정도론 부족했나?

“뭐라고 좀 하지 그랬어요.”

“했지. 근데 걔 너 아니면 제대로 대답도 안 하잖아.”

……이건 처음 듣는 소린데.

“걔가 좀 싸가지 없긴 했어도 요즘은 많이 나아졌는데요.”

“너한테만이겠지. 나랑 다린은 제대로 얘기도 못 해 봤어.”

“검술이나 마법도 가르쳐 줬었잖아요.”

“뭐 얘기하면 고개만 끄덕거리더라.”

“그렇게 붙어 있었는데 뭔 대답이라도 했겠죠.”

“응, 아니. 뭐 그런 게 제일 긴 대답이었지.”

“…….”

응, 아니야도 아니고. 진짜 긍정문 하나 부정문 하나가 끝이란 소린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라이놀이 되려 황당하단 듯 나를 쳐다봤다.

“솔직히 네가 모르고 있던 게 더 신기하다. 같이 지낸 지 꽤 됐는데 왜 그리 무심해?”

“…….”

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바쁘긴 했지만, 그 정도 여유도 없는 건 아니었는데.

나는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타냐는 방에 있어요?”

“나오는 걸 본 적 없으니 그렇겠지?”

“잠깐 좀 보고 올게요.”

“그래라. 건강 좀 챙기라 전해 주고.”

라이놀에게 대충 인사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다린과 타냐의 방이 있는 곳.

마지막으로 올라온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

걸어서 30초.

내가 얼마나 무심했는지 새삼 실감 난다. 한숨 쉬며 타냐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언젠가 한 번 들어 본 대답.

차이점이 있다면, 거의 다 죽어 가는 목소리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문 좀 열어 줄래?”

“……리안?”

끼이익.

대답과 함께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타냐의 야윈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집 오기 전이 더 나았을 거라는 라이놀의 말이 맞았다. 체격 자체는 나아졌지만, 얼굴이 곧 죽을 사람 같다.

“안에 좀 들어가도 될까?”

“……아, 안에?”

“부탁할게.”

“……알겠어.”

문이 활짝 열린다. 안을 보니 왜 망설였는지 이해가 간다. 온통 부적으로 채워진 바닥.

이게 사람 사는 방인가?

그보단 공장에 가까운 거 같은데, 부적 공장.

생각을 티 내지 않고 제멋대로 의자에 앉았다. 정작 방 주인인 타냐가 내 눈치를 보며 마주 앉는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타냐가 조금 진정된 모습을 보일 때 입을 열었다.

“타냐.”

“으, 응?”

“시간은 금이라는 말 들어 봤어?”

“들어는 봤는데…….”

“너 파산했어. 일주일 뒤에 죽어.”

진짜 죽진 않겠지만.

분위기 환기시키려고 가볍게 던진 농담인데, 진짜로 믿은 듯 타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니, 이걸 왜 믿냐?

“……일주일?”

“그만큼 안 좋아 보인단 소리야. 진짜 죽는단 소리가 아니라. 곧이곧대로 듣지 마.”

“…….”

재수 없는 농담한 건 난데 안절부절못하는 건 타냐다.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부적 하루에 몇 개씩 쓰고 있어?”

“……6개.”

일부러인지 작게 대답한다. 나는 조금 인상 찌푸린 채 다시 물었다.

“몇 개?”

“……16개.”

“……후.”

참았던 한숨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 소리에 타냐가 몸을 움찔거렸지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내가 무리하지 말라고…….”

“……미안.”

재빠른 사과.

그 말에 목구멍까지 나왔던 잔소리가 쏙 들어갔다. 어휴, 그래. 어디 얘 잘못이겠냐.

“잠깐 기다려.”

대답도 듣지 않고 옆의 다린 방으로 향했다.

전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선물로 보낸 물건 중에 보약이 있던 걸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줬다 뺏는 게 어딨냐는 다린의 울부짖음을 무시한 채 물건을 챙겨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는 타냐의 시선을 마주 보며 보약을 늘어놨다.

“오다 주웠다. 하루에 하나씩 먹어.”

존X 카리스마 있어.

“고, 고마워.”

“그리고 당분간 부적 만드는 것도 금지야.”

“……조금만 만들면 안 돼?”

“안 돼. 너 이러다 진짜 죽는다.

“……알았어.”

이해가 안 된다.

이렇게 온순한데 무슨 대답을 안 한단 건지. 안색 안 좋다는 건 맞았지만, 후자는 라이놀 착각이겠지.

애초에 게임에서도 사람 잘못 보고 훅 가지 않던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혹시 바이론이란 남자 기억해?”

“저번에 습격했던 사람이잖아.”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 새끼도 푸른 혈맥이래.”

“……뭐?”

타냐의 두 눈이 경악으로 동그랗게 커졌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