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44)
“……재밌는 꼬마네.”
표정이 돌아온 카시아가 웃었다. 그리고 핏방울이 혼자 움직이더니 검을 밀어냈다.
초인의 힘으로도 감당 못 할 압력.
굳이 버티지 않고 순순히 밀려났다. 어차피 이길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으니까.
“마력장 형성할 만큼 기운이 많은 건 아닌데…… 유물이야?”
“네. ‘아지프의 약속’. 하루 한 번 공격을 막아 주죠.”
“그렇다 해도 담력은 놀랍네. 마법에 돌진하다니. 보통 생각은 해도 실천은 못 할 행동인데.”
카시아가 빙긋 웃으며 다가와 내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 대고 벌렁거렸다. 이 할망구가 미쳤나?
“뭐 하는 거예요?”
몸을 빼며 물러서자, 카시아가 피식 웃고는 뒤돌아섰다.
“피 냄새도 특이하고. 모자란 동생이 예언이니 운명이니 지껄일 만은 해.”
“제가 그 운명의 남자 맞아요.”
“뻔뻔한 구석도 있고. 죽일 상대만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젠장,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되나? 당당한 사람 좋아한다는 거 믿고 개겨 본 건데.
“평화적으로 해결하죠. 대륙법에 나와 있잖아요. 생명을 소중히 하자.”
“그런 웃기는 법은 없어. 게다가 네가 말했잖아. 여긴 치외법권이라고.”
저딴 소리 지껄인 5분 전의 나를 찢어발기고 싶다. 안 그랬으면 10분은 더 끌 수 있었을 텐데.
정보가 부족했다.
아무리 내가 개발자여도 캐릭터 하나하나 전부 기억하는 건 불가능하다. 설정상으론 중요하지만, 게임 내 존재감은 옅은 경우도 많았으니까.
카시아가 그런 케이스 중 하나였다. 강하고 비중도 높지만, 등장이 거의 없는 캐릭터. 성소 이벤트 때 한두 번 나오고 끝이다. 자연히 아는 게 적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뭐라도 생각해 내긴 해야 한다. 죽고 싶지 않으면.
너무 오래 끌어서일까, 카시아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유언 같은 거 있으면 지금 말해. 나중에 혈류석이랑 같이 전달해 줄 테니까.”
“……친절도 하셔라.”
고맙진 않지만. 그래도 시간은 벌었다. 유언 생각하는 척하면 되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카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시간은 충분히 준 거…….”
“역혈병.”
“……뭐?”
당황한 표정. 아까 내 공격을 받았을 때 보다 더하다. 하긴, 아직 숨기고 있을 시기긴 하지. 내가 생각해 내는 데 오래 걸릴 정도로.
나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치료법을 알아요.”
“아니, 너 뭐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역혈병? 그게 뭔데?”
조용히 눈치만 보던 카트발이 끼어들었다. 카시아가 한심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너 잡혀갔을 때 터진 전염병이야. 알 수 없는 이유로 피가 역행하는 전염병.”
“뭐, 뭐? 그, 그럼 어떻게 되는데?”
“죽지 병신아. 너 진짜 뱀파이어 맞니?”
카시아가 답답한 듯 한숨 쉬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약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야. 이미 할 수 있는 조합은 전부 시도해 봤어.”
사실이다. 뱀파이어 일족을 멸족 직전까지 몰고 가는 전염병. 해결 방법은 게임 엔딩까지 나오지 않고, 설정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불치병.
개발자인 나조차 고치는 방법 모르는 불치병인 것이다. 지금의 나라면 가능했다. 왜냐면, 혼원공이 있으니까.
“전 가능해요. 아니, 저만 가능해요.”
“……자신감이 대단하네. 네 뭘 믿고?”
“제가 익힌 심법이 그 병이랑 비슷하니까요.”
“심법?”
카시아가 맥 빠진 듯 헛웃음을 지었다. 괜히 기대했다는 표정.
“인간들이 배우는 그거 말이지? 우리가 마력 대신 혈액 이용하긴 하는데, 작동 방식은 완전히 달라. 심법도 익힐 수 없고.”
저렇게 말할 거라 예상했다. 별로 놀랍지도 않다. 지금 시점에서 마력에 대한 개념은 저 정도가 전부니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맞으면서도 틀리다고?”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혼원력을 방출했다.
“이거 느껴져요?”
“당연히 느껴지지. 마력이잖아. 그게 뭐 어쨌단 건데?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힘 다루는 방식이랑 마력 다루는 건…….”
“마력이 아니에요.”
“……뭐?”
카시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손끝을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더니, 조금 짜증 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마력 맞잖아.”
“마력 아니에요. 혼원력이란 거지.”
“혼원력? 처음 들어 보는데…….”
처음 들어 볼 수밖에. 공백의 시대에만 존재하던 거니까. 설명은 생략하고 말을 이었다.
“마력의 성질을 띠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른 기운이에요. 그런데 그쪽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죠. 왜라고 생각해요?”
“……마력이 생소해서?”
그럴 수도 있긴 하겠다. 성소에 박혀서 외부인 볼 일 적었을 테니.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근원이 마력이라 그래요. 혼원력뿐 아니라, 모든 기운이.”
“……그러니까, 우리가 혈액을 다루는 것도 마력이 근원이다. 이거야?”
이해가 빠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도 안 되는 소리. 뱀파이어는 마력을 다룰 수 없어.”
“워낙 적은 양이라 의식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무의식적으로 운용하는 거죠.”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뱀파이어도 아닌 데다 나보다 약하면서.”
“적어도 역혈병에 관해선 더 잘 알죠.”
나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이대로라면 10년 내에 당신네 종족 절반이 사망할 거예요. 장담하죠.”
“…….”
내 표정이 너무 자신 있어 보인 탓일까? 카시아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반쯤 넘어온 셈. 이제 쐐기만 박아 주면 끝이다.
자리에 앉아 심법 동작을 취했다.
“……뭐 하는 거야?”
“제대로 봐 둬요.”
속으로 혼원공을 운용했다.
이 짓거리도 상당히 익숙해졌다. 혼원력을 오른 다리까지 돌릴 수 있을 만큼. 머지않아 역행하는 곳까지 도달하고, 기운을 반대로 돌렸다.
콰과광!
들릴 리 없는 소리. 마치 폭포수 같은 굉음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뭐?”
“저게 뭐야!”
경악한 목소리를 무시하고 천천히 기운을 진정시켰다. 아직 조절은 자신 없었으니까.
사람 손가락만 한 크기의 마력에서 나온다고는 믿기 힘든 힘. 한참을 끙끙댄 후에야 모든 기운이 갈무리됐다.
“후우…….”
진정하고 발밑을 바라봤다. 바닥이 전부 부서져 있다. 수리비 어떡하지…….
“……확실히 역혈병과 같은 증상이야.”
카시아가 중얼거렸다. 경악하던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침착한 얼굴. 수호자 역할만 아니라면 왕이 되었을 거란 평가가 걸맞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폭증하는 기운…… 증상이라고 하기도 뭐하네. 너는 그걸 완벽히 조절하고 있으니까.”
“이제 좀 믿겠어요?”
“……보여 주기까지 했는데 안 믿을 수도 없지.”
한숨을 내쉰 카시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치료법은? 이건 결국 네 자랑일 뿐이야. 우리라고 원인을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니까.”
“피가 역류하는 지점 조사해 놨죠?”
아직 발병 초기 시점이라 거기까지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곤란한데. 그 경우 내가 직접 가야 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자리를 뜰 수 있는 시점이 아니었다. 일족이 유능하길 바라는 수밖에.
다행히 카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염병이란 거 눈치채자마자 조사했지.”
“잘됐네요. 그 위치 좀 알려 줘요.”
“……뭔가 방법이 있는 거야?”
“역류를 버티는 게 어렵지 막는 건 간단하거든요.”
사실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래도 일단 보내고 봐야지.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죽이겠어?
그런 생각을 티 내지 않고 서 있는데, 카시아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단 고마워.”
일단 고마운 건 뭐야? 이단도 있나?
“방법 알려드릴 테니 그만 돌아가요. 전염병은 초기에 잡는 게 좋으니까.”
“……어째 빨리 돌려보내려는 속셈 같은데.”
“그런 속셈 맞아요. 한시라도 빠르게 일족을 치료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냥 내가 싫은 건 아니고?”
눈치가 빠르다.
“그럴 리가요. 저는 고통 받고 있을 뱀파이어들 생각에 마음 급한 것뿐이에요.”
“……잠깐 기다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카시아가 그렇게 말하더니 벽 뒤로 숨었다.
뭐 하려는 거지? 빨리 돌아가기나 하지.
정육점에서나 들릴 법한 으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녀석이 빨간 돌덩이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뭐야 시X.
“누나!”
이때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목소리로 카트발이 소리 질렀다. 못 볼 거라도 본 듯한 얼굴이다.
“……뭐예요, 그건?”
“혈정석.”
……혈정석?
“그거 전설에나 나오는 거 아니었어요?”
“알고 있어? 하긴, 역혈병도 알았는데.”
뭘 납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카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에 나오는 건 맞는데, 전설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야. 이때까지 등장한 적이 한 번뿐이라 그렇지.”
그러면서 내게 혈정석을 내밀었다.
“얼른 받아. 혈류석보다 좋은 거니까.”
“…….”
말문이 막혔다. 그도 그럴 게, 혈정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제가 아는 게 맞다면 혈정석 재료는 진혈일 텐데…….”
진혈. 왕족의 근원이다. 다시 회복할 수 없는 힘.
혈류석이 종족의 보물이라면, 진혈은 왕족의 목숨과 같다. 왕족이 왕족으로 존재하는 이유니까.
혈정석이 역사상 기록된 건 단 한 번. ‘해방 왕’ 시절뿐이다. 그리고 그때 진혈을 잃은 인물은 왕족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카시아는 태연히 웃었다.
“왕족 자리가 뭐 별거라고. 제약만 가득한걸. 오죽하면 왕 되기 싫어서 그 지루한 수호자 자리까지 들어갔겠어.”
“되기 싫으면 거부할 수도 있잖아요.”
대체자가 있을 때의 경우지만. 카시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진짜 뭐야? 어떻게 그리 잘 알아?”
“그건 상관없고요. 진혈 없어지면 수명도 절반은 줄 텐데, 무슨 생각이에요?”
“……진짜 세세하게 다 아네. 내 쓰리 사이즈까지 아는 건 아니지?”
알고 있는데.
“대답이나 해요.”
“……뭐, 공격한 게 미안하기도 하고. 뭣보다 우린 80프로 이상으로 봤거든. 사망자 수.”
카시아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정도면 사실상 전멸이야. 그 인원이랑 내 진혈을 교환한다? 차고 남는 장사지.”
“안 돼!”
카트발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럼 차라리 내걸 줄게! 왜 누나가 희생해?”
“까불지 말고 얌전히 있어. 네 진혈은 쥐꼬리만 해서 혈정석 안 만들어지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진혈 양은 내가 더 많다고 어릴 때 장로님들이 그랬잖아!”
“그 늙탱이들 말을 어떻게 믿어? 당장 눈멀어도 이상하지 않을 영감들인데. 그 인간들은 내일 칼 맞아 죽어도 자연사야.”
“누나…….”
카트발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카시아가 그 모습을 보며 한숨 쉬었다.
“유일하게 걱정되는 게 있다면 네가 왕 확정이라는 건데…… 잘할 수 있지?”
“……응.”
“아무 피나 막 먹지 말고. 하긴, 네가 나보다 냄새 잘 맡으니까 이건 잔소리겠다.”
“아니야! 누나 말 들을게!”
“모르는 사람이 불러도 막 따라가지 말고. 햇빛 싫어하는 건 아는데, 이겨 내야 돼.”
“……응! 내일부터 일광욕할 거야.”
둘이 서로를 마주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쌩쇼를 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카시아가 내게 다가왔다.
“시간 끌어서 미안. 여기 혈정석. 혈류석이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는데, 이게 혈류석보다 몇 배는 더 효과 좋을 거야.”
그리고는 내게 혈정석을 내밀었다. 새빨갛고 영롱한 빛. 딱 봐도 A랭크는 가볍게 넘을 물건이다. 경매장에 내놓으면 수십만 골드는 우습게 나갈 귀중품.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 빛을 바라보며, 나는 덤덤히 답했다.
“필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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