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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43화 (43/225)

너의 코드가 보여 (43)

“너 진짜 병신이니?”

“…….”

카트발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고개 숙였다. 그러나 그 앞에 선 붉은 머리 여자, 카시아는 눈도 껌뻑 안 했다.

“이 시국에 납치된 것도 어이없어 죽겠는데, 뭐? 혈류석까지 넘긴다 했다고?”

“아니, 넘기려고 한 게 아니라 예언이…….”

“예언은 얼어 죽을. 골방에 처박혀 살던 노친네들 말은 언제까지 따를래? 그 책에 죽으라고 쓰여 있으면 죽을 거야?”

그 말에 고개 숙이고 있던 카트발이 당당히 섰다. 결연한 표정. 그는 종족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목숨 내놓을 각오쯤은 되어 있었다.

“당연하지. 그걸로 우리 일족이 다시 부흥할 수 있다면…….”

“그럼 그냥 지금 죽어. 네가 왕 되면 우리 일족은 파멸밖에 없으니까.”

“…….”

오늘따라 더 까칠하네. 아니, 원래 저랬던 것 같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만난 게…… 20년 전이던가? 오래되긴 했다.

카트발이 옛날 기억을 끄집어냈다. 저럴 때 기분 푸는 법이 있었는데, 뭐였지?

“누나……. 미안.”

“이게 50 넘게 처먹어 놓고 지 필요할 때만 누나래.”

퉁명스레 답하지만, 얼굴이 풀려 있다. 이거구나. 카트발이 내심 미소 짓는데, 카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네 주인이라는 인간은 어딨는데?”

“레이튼에 있어. 혈류석 가지고 왔지? 지금부터 돌아가면 약속한 열흘 내에는…….”

“안 가지고 왔는데.”

“……어?”

“혈류석. 안 가지고 왔다고.”

“…….”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중간지점 오는 데만 5일이 걸렸다. 다시 돌아가 혈류석 챙긴다 해도, 약속한 기간 맞추는 건 불가능.

카트발의 눈앞에 비석이 아른거렸다. 카트발, 50세 꽃다운 나이에 피지 못하고 지다.

“가지고 오라 했잖아!”

“이게 어따 대고 소리를 질러? 혈류석이 뭐 네 개인 물품 같니?”

“난 왕자야!”

“그럼 난 공주야. ……아, 씨. 말로 하니까 이상하잖아.”

카시아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드문 일이었지만, 카트발은 그 모습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목숨이 날아가느냐 마느냐의 순간인데 저런 사소한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왕 자리엔 관심 없다더니. 이제 와 마음 바뀐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날 죽이고 왕이 될 속셈이잖아. 배신자! 아무리 그래도 혈족을…….”

“수십 년 새 눈치가 많이 늘었네. 맞아. 그런데 굳이 내가 손댈 필요도 없어 보인다. 난 가 볼게. 잘 살아.”

카시아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카트발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미안! 미안해! 농담이었어! 제발 나 좀 살려 줘, 누나!”

“……하아.”

반쯤 그림자에 잠기던 몸이 다시 솟구쳐 오른다. 저런 것도 동생이라고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완전히 빠져나온 몸을 나무에 기대며 카시아가 입을 열었다.

“가져오려 해도 방법이 없었어. 늙은이들 화가 단단히 났거든.”

“장로님들이? 어째서?”

카시아가 한심한 눈으로 카트발을 쳐다봤다.

“어째서긴, 너 때문이지. 일족 역사상 인간에게 납치된 왕족은 처음이라며 자격 박탈 얘기까지 오가던데?”

자격 박탈. 후계자가 정말 답 없다 느껴질 때 건의되는, 일종의 최후 통보다.

진짜로 왕족 자리에서 끌어내릴 힘이 있는 건 아니다. 뱀파이어 일족의 혈통은 절대적이니까.

하지만 저딴 놈 왕으로 인정 못 하니 배 째라는 경고 정도는 된다. 왕족 역사상 아무도 받아 보지 못한 치욕스러운 칭호. 카트발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누난 뭐 하고 있었는데? 말렸어야지!”

“제일 먼저 찬성했지. 솔직히 네가 생각해도 쪽팔리긴 하잖아.”

“누나!”

“소리 좀 그만 질러 진짜. 요즘 나이 먹었더니 온몸이 다 쑤신단 말이야.”

그러더니 카시아가 허리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노인의 꼴. 카트발이 그 모습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직 100살도 안 됐으면서 왜 엄살이야?”

“그만큼 고생했다는 거지. 네가 밖에서 노는 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고생은 무슨. 그냥 성소에서 시간 때우는 게 다잖아.”

“이게 진짜. 나 그냥 간다?”

“누나.”

카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수십 년 만이니 조금은 진중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반대다. 오히려 더 유치해진 것 같기도 하고.

이제 50 넘은 놈이 이러고 있으니 진짜 걱정이다. 얘한테 일족의 미래를 맡겨도 될까?

‘내가 해 버려?’

뱀파이어의 왕. 그 자리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옛날에 포기한 자리. 귀찮은 일만 잔뜩이고, 누리는 건 거의 없다.

하지만 일족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얘보다는 내가 낫지 않을까?

“무슨 생각해?”

“일족의 미래 걱정.”

카트발이 감동한 눈으로 카시아를 쳐다봤다.

“그래도 누나는 누나네.”

“뭐?”

“내 걱정해 줬다는 뜻이잖아.”

“……어떻게 그렇게 되는데?”

“내가 일족의 미래잖아. 아니야?”

“……말을 말자.”

돌아가면 진지하게 고민 좀 해 봐야겠다. 진짜로 왕이 될지 말지에 대해서. 장로들은 두 손 벌려 환영할 테니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가능할 거다.

카시아가 한숨 쉬고 말을 이었다.

“주인이란 인간 있는 곳이나 안내해 봐.”

“같이 사과해 주려고?”

“웃기는 소리 좀 그만하고. 죽여야 할 거 아니야.”

“……어?”

카트발이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나 구해준 사람이란 말이야!”

“노예로 부려먹으려고 말이지. 애초에 그 낙인은 소유주 살아 있는 이상 안 사라지잖아. 일족의 왕자가 노예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건…… 말이 안 되지만…….”

반쯤 설득당하던 카트발이 퍼뜩 정신 차렸다.

“아무튼, 안 돼. 구해 준 건 둘째치고, 냄새가 났단 말이야!”

“또 그 예언이니 운명이니 하는 소리 지껄일 거면 그만둬. 난 그거 믿은 적 없으니까.”

“누나!”

“안 되는 건 안 돼. 나는 뭐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전부 네 탓이잖아.”

카시아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걱정 마. 적어도 고통은 없게 보내 줄 테니까.”

* * *

자리에 앉아 물병에 든 액체를 마셨다. 영초를 갈아 만든 영액. 몸 안에 흡수되자 혼원력으로 변환돼 쌓인다.

몸 내부를 관조해 보니 쥐꼬리만 하던 혼원력이 사람 손가락 크기 정도로 늘어나 있다.

엄청난 속도.

아무리 영약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보통 사람들은 꿈도 못 꿀 만큼의 성장이다. 보너스 스탯 마력에 몰빵해도 이 정돈 안 되겠다.

전부 새로 익힌 혼원공 덕이다. 개발자 시절에 이런 스킬 만들었으면 버그 픽스하라고 항의 메일 엄청 받았겠지.

사자 심법보다 빠르고, 천마 신공보다 강한 출력. 힘세고 오래가는 건전지 같달까.

“그보다 너무 조용한데…….”

바이론과 만나고 2주일이 흘렀다. 바로 보복 들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반응이 없다. 이러면 오히려 더 불안한데. 폭풍 전의 고요 같은 느낌이라.

“후…….”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조금이라도 더 마력을 쌓는 것.

앉은 김에 수련하려는 순간. 익숙한 코드와 낯선 코드가 나란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NPC-1-34-2]

[NPC-2-64-3]

혈류석 가지러 떠났던 카트발, 그리고 누나 카시아다.

약속한 기간 지나도 안 오길래 걱정했는데, 같이 돌아오느라 그런 거였나?

누나 쪽은 혈류석 전달하고 바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성소 수호자 자리는 그리 오래 비워 둘 수 있는 역할이 아니니까.

뭐, 골치 아프게 머리 굴릴 필요 없이 오면 알아서 설명해 주겠지.

코드가 어느 정도 가까워진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쳐!”

말할 필요도 없이 공격 코드 보이자마자 몸을 피했다.

푸슈슉.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피보라가 난무했다. 새빨간 꽃 모양. 마치 장미 같다. 닿는 순간 죽는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낯선 코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뱀파이어식 자기소개예요?”

“설마. 이런 식으로 인사했으면 우리 일족은 진작 멸종했겠지?”

어둠 속에서 여성의 형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말할 것도 없이 뱀파이어의 모습이다. 코드 없어도 한눈에 알아볼 얼굴. 카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쟤는 끝까지 도움 안 되네. 고통 없이 보내 줄 마지막 기회였는데.”

한숨 쉬고 싶은 건 나다. 요즘 나 죽이려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카트발을 바라보니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배신은 아니고.

긴장을 유지한 채 상대를 주시했다.

“손 내민 게 검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대가성 구매를 손 내밀었다 표현하진 않지. 혈류석 때문이잖아? 내 동생 산 거. 그 얘기 듣기 전까진 무시했다던데.”

입 싼 새끼. 어디까지 얘기한 거야?

카트발을 한 번 노려봐 주고 말을 이었다.

“대가성 거래라면 물건이 오갈 일이지, 칼이 오갈 건 아니죠. 혈류석 주고 쟨 데려가요. 나도 필요 없으니까.”

비굴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도저히 지금 상대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성소의 수호자. 일족 중에서도 혈통과 실력이 인증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다.

햇빛 싫다고 납치당한 카트발 따위완 비교도 안 되는 강자.

게임 중반부에나 나오는 인물인데, 초반부에도 못 들어선 지금이라면…… 혼자 레이튼 멸망시키는 것도 가능할 거다.

아까 공격 피한 것도 천운에 가깝다. 진짜 고통 없이 보내 주려 한 건진 모르겠지만, 상당히 차분한 기술을 사용했으니까.

진짜 죽일 생각이었다면 나는 지금 서 있지도 못했겠지.

내 얼굴을 바라보던 카시아가 입을 열었다.

“혈류석은 못 가지고 왔어. 그래도 아쉬울 일은 없을 거야. 저세상에서 그런 것들은 도움이 안 될 테니까. 나도 가 본 적은 없지만.”

젠장, 내 돈 주고 산 노예도 뺏기게 생겼는데, 혈류석도 없다고?

누굴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보나.

“그럼 그냥 데려가요.”

일단 살고 봐야지.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도 그냥 돌아가고 싶은 마음 굴뚝같긴 한데, 쟤 낙인 좀 봐. 납치당한 것만으로도 노친네들 방방 뛰는데, 노예 돼서 돌아오면 진짜 반란 일으킬걸?”

카시아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네가 이해 좀 해 줘. 애초에 대륙법으로 이종족 노예 금지된 게 언젠데. 불법이잖아.”

“여긴 치외법권인데요.”

정확히는 법 집행할 인간이 없다는 게 맞지만. 카시아가 황당한 얼굴로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 너도 알지? 우리 쉽게 가자. 얌전히 있으면 순식간에 끝내 줄게.”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 알죠? 목 달란다고 목 빼고 있는 인간이 어딨겠어요?”

“그것도 그렇긴 하지.”

카시아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숫자들이 모인다. 뱀파이어 전용 공격 마법 혈탄.

“어차피 나도 허락 맡고 공격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탕!

총과 같은 소리를 내며 혈액이 몰아쳐 온다. 속도도 비슷할 거다. 설정이 그러니까.

안에 담긴 마력은 지금의 내가 넘보지도 못할 정도고, 움직이는 모습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혈탄의 특성. 일직선이지만, 방향 전환이 가능하다. 코드를 보고 움직여도 피하는 건 불가능.

“……뭐?”

그렇다면 뚫는다. 다리에 힘을 주고, 오히려 정면으로 돌진했다. 이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카시아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나와 혈탄이 부딪히려는 순간.

삐.

주머니에서 괴상한 소음과 함께 새하얀 막이 펼쳐져 나왔다.

쿵!

그 막과 혈탄이 부딪히며 서로 상쇄됐다.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카시아에게 다가가 검을 목에 대었다. 카시아의 당황한 표정과 함께 목덜미에서 미세하게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손님 대접은 해드릴 테니 여기까지만 하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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