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42)
“……인사가 좀 격하시네.”
굳어지려는 표정을 숨기며 최대한 덤덤히 말했다. 여기 오고 유혈 사태 목격한 적은 많지만, 이렇게 적나라한 건 처음이다.
“그런가? 그런 것치곤 별 동요 없어 보이는데.”
한동안 내 얼굴을 쳐다보던 바이론이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마치 이미 겪어 본 사람처럼. 예를 들어, 7년 전 황궁이라던가.”
“…….”
떠보는 질문. 이미 나를 황족이라 착각하고 있을 텐데 저런 용의주도함이라니. 그 부분은 설정과 같아 오히려 안심된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7년 전 전쟁은 겪었지만, 황궁에 가 본 적은 없어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전혀 믿지 않는 표정으로 바이론이 웃었다.
“어쨌든 이야기 공통분모는 생겼네. 7년 전 전쟁. 어렸을 때라 기억나는 게 별로 없을 거 같은데, 어때?”
“대충 기억하는데요.”
“그래도 들어. 물을 것도 있으니까.”
“…….”
뭐지. 답정너인가? 뭐라 할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설정과 달라진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바이론은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터졌을 당시 제국 상황이 어땠는지 알아?”
“최악이었죠. 귀족은 부패했고, 시민은 핍박받고, 황실은 힘이 없고.”
“잘 아네.”
대견하다는 듯한 시선. 나를 적수가 아니라,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그럼 삼 왕국은?”
“최고였어요. 특성들을 잘 살리기도 했고, 서로 은밀히 협력하며 힘을 키웠으니까.”
“맞아. 아르곤은 기간트라는 듣도 보도 못한 병기를 만들어 냈고, 칼페온은 몬스터 테이밍 기술을 개발한 데다, 겔리안은 흩어져있던 이종족 전부를 규합해 냈지.”
바이론이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그놈들 저력에는 나도 놀랐어. 그렇게 강해질 거란 생각은 못 해 봤거든. 뭐 반쯤은 미친개 아이언이 다 하긴 했지만.”
바이론이 책상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제국은 최악이었고, 동맹은 최고 전성기였지. 누가 봐도 전쟁의 승패는 예상이 가지?”
사실 묻는 게 웃긴 질문이었다. 세 왕국이 승리한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제국의 승리.”
“맞아.”
바이론이 비릿하게 웃었다.
“놈들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한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약해졌어도 제국은 제국. 제대로 했다면 질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어.”
“…….”
“하지만 제국은 졌지. 왜일까?”
싱글거리는 눈으로 바이론이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정답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나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이유는 알지만, 밝힐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일부러 졌어.”
바이론이 싱긋 웃으며 나이프를 들고 음식을 썰기 시작했다.
“전쟁 시작 한 달 전. 황제는 제국 최고 전력인 1기사단을 동대륙으로 보냈지. 분명 전쟁의 전조를 느끼고 있었을 텐데도 말이야.”
바이론이 음식을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는 군대 절반을 해산시켰어. 평시에 해도 미친 짓인데, 전쟁이 거의 다가온 시기에 말이야.”
“…….”
“그러니까 진 이유는 알아. 하지만 지려고 한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그리고는 놈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분명 웃는 얼굴인데, 어째선지 뱀을 연상시키는 미소.
‘부동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스킬의 보조를 받고도 이 정돈데, 없었으면 어땠을지 상상도 힘들다.
바이론이 나이프를 내 쪽으로 향했다.
“그게 네가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야. 적통이라면 답을 알 거라 생각했거든.”
“…….”
바이론이 피식 웃었다.
“묵비권. 나쁘지 않지. 나도 수수께끼 푸는 거 좋아하거든. 너무 길어지면 짜증 나긴 하지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입을 열자, 바이론이 환히 웃었다.
“아, 드디어 말을 하네. 벙어린가 했잖아. 그래. 무슨 얘긴데?”
“당신은 제국이 패배한 이유를 알 필요가 없어요.”
“흠…… 어째서?”
나는 나이프를 들어 음식을 자르며 바이론을 덤덤히 쳐다봤다.
“어차피 그 전에 죽을 테니까.”
“…….”
바이론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이내 입꼬리마저 내려가며 완전한 무표정이 되었다.
“나는 지금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야. 얘기하면 고통 없는 죽음을 약속하지.”
“제가 아직 한창때라 장례 계획은 없거든요. 장래 계획은 있지만.”
바이론이 처음으로 인상을 구겼다.
“너한테 선택권은 없어. 그럼 남는 게 고통스런 죽음뿐이니까.”
“전 그리 생각 안 해서.”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네. 혹시 몇 방 먹였다고 내가 우스워 보여?”
나는 음식을 입에 넣으며 피식 웃었다.
“네. 솔직히, 조금 그러네요.”
“…….”
바이론이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굳이 어려운 길로 가겠다면 어쩔 수 없지. 인생 선배로서 가르침을 주는 수밖에.”
끼이익.
기름칠로 매끄러운 문에서, 마치 굉음이 울리는 거 같다.
“식사 맛있게 해. 최후의 만찬일 수도 있잖아.”
쿵.
“후…….”
완전히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 푹 늘어져 앉았다.
“하여간 연출은…….”
효과적이란 건 인정해야겠다. 살면서 몇 번 해 보지도 않은 긴장이란 긴장은 다 한 기분이니까. ‘부동심’ 안 배워 뒀으면 어찌 됐을지…….
“그래도 얻은 건 있네.”
아직 나를 푸른 혈맥이라 착각한다는 것.
나와 타냐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 생각했는데, 일부만 들은 모양이다. 전부 확인했다면 아직도 나를 황족이라 착각할 이유가 없으니까.
하긴, 사역마가 그렇게 가까이 다가왔으면 내가 눈치챘겠지. 그나마 다행이다. 타냐 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 같으니.
거기까지 생각하고 식당 내부를 바라봤다. 아직 쓰러진 채인 직원과 그 옆의 머리통.
“…….”
한숨 쉬며 직원과 머리통을 옮기고, 음식들을 가져왔다. 하나같이 마력을 포함한 최고급 식재료들. 흡수된 마력이 혼원력으로 변환되는 걸 느끼며, 자리에 앉아 그것들을 입속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 * *
바이론은 문을 닫고 나오며 얼굴을 굳혔다.
‘동요가 거의 없다.’
그의 능력은 마음의 빈틈을 파고 들어가는 기술. 미세한 틈이라도 보이면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발동 가능하지만, 반대로 틈이 없으면 갓난아기 상대로도 사용이 불가능하다.
‘……정신적으로 저만큼 완성된 경우는 처음 보는데.’
상대는 다 자라지도 못한 애송이. 여태까지의 일이나 혈통을 고려해 과소평가하지 않았는데……그것도 부족했나?
한참을 고민하던 바이론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급한 일부터 해결해야지.’
건방진 적통을 해치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급한 건 신전이다. 신패 도용 문제로 화가 단단히 났으니까. 심문관이 매수당하는 건 신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정작 당사자는 능력에 당해 자각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신전에서도 이 문제를 숨기기 급급하다는 것. 신패 도용부터 심문관 매수까지. 그들의 신용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공개적인 보복은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다. 어떤 식으로든 압박이 들어오겠지.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이렇게나 손해를 입고 정작 목표했던 시르케는 손도 못 댔다는 거다.
‘……생각해 보니 이것도 전부 그 녀석 탓이군.’
시르케의 배신은 리안이 그녀의 모든 공격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을 끌지 못했다면 승리는 그의 몫이었겠지.
그가 자신을 드러내면서까지 시르케를 죽이려 한 이유도 그놈 때문. 웬 꼬맹이 하나와 푸른 혈맥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시르케가 엿들었으니까.
그 계획이 실패한 것마저 리안의 탓이었다. 노블레스와 연을 맺고 와선 신전에 영향력까지 뻗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최근 그가 실패한 일들의 근원을 따라가 보면, 꼭 그 적통이 연관돼 있었다.
‘……역시 그 녀석부터 정리할까?’
고민하는 순간. 그의 옆에 한 사내가 다가왔다.
“어떻게 할까요?”
바이론이 고개를 돌렸다. 가벼운 옷차림에, 어째선지 조류가 연상되는 생김새. A등급 스캐빈져, 개럿이었다.
“지금은 내버려 둬. 저기 건드리면 노블레스와 싸워야 하니까. 시기상조야.”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개럿이 높이 뛰어올라 사라졌다. 바이론이 그 모습을 보며 인상 찌푸렸다.
‘아직 말 안 끝났는데.’
숨어서 기회 보다 해치우라 할 생각이었는데 놓쳐 버렸다.
한숨을 내쉬며 바이론이 발걸음을 옮겼다.
미켈슨이 약하긴 해도, 그나마 똑똑하긴 했다. 그 녀석 말고 저 새대가리 놈 보낼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긴, 매복을 귀신같이 눈치채긴 했지.’
어제 죽인 용병의 기억을 다시 상기해 봤다. 분명 마력 탐지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용병이 숨은 곳을 귀신같이 알던 모습. 그 역시 푸른 혈맥의 능력 중 하나일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적통의 힘이 신체 강화뿐이란 게 더 우습긴 했다.
암살은 틀렸다. 상대할 수 없는 놈을 보낸다면 숨을 것이고, 아니라면 죽이겠지. 그의 전력만 깎아 먹는 꼴이다.
정면승부밖에 답이 없단 뜻인데, 그게 쉬운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인맥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집을 습격하자니 노블레스 구역이고, 도시 내부는 신전의 영역. 그리고 놈은 그 둘 모두와 친분이 있다.
노블레스 수장인 테이어 테르베로츠와는 집을 소개받을 정도로 긴밀한 사이고, 신전에는 이번 일로 크게 빚을 지워 둔 상태.
그 둘은 안 그래도 그를 제치려고 벼르고 있으니, 놈을 공격했다는 핑계로 그들이 전면전을 선포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는 걸 노리자니 전의 가디언이 문제다. 7성급 대마법사가 만든 물건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니까.
“……까다롭긴 하군.”
찾아냈을 때 확실히 끝장내야 했는데. 후회는 항상 늦다던가.
바이론이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 상황은 원래 계획과 너무 어긋났다.
숨겼어야 할 모습이 드러났고, 사방엔 적뿐. 겉으론 여유를 가장하고 다녔지만, 사실 상당히 궁지에 몰린 상태다.
하지만 바이론의 얼굴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판이 어긋났으면 엎으면 될 일.’
그가 수년간 쌓아 온 것들도 사라지겠지만,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그는 무언가 가지고 시작한 적이 없었으니까.
레이튼. 대륙의 쓰레기통이라 불리던 이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처리장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간 처리장.
바이론이 비릿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