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41화 (41/225)

너의 코드가 보여 (41)

“꺼어억…….”

숨넘어가는 소리.

놈이 배를 움켜잡고 경련했다. 눈에는 흰자위가 아른거린다.

사실 제일 당황한 건 나다.

아니, 막을 거 감안하고 던진 건데 반응도 못 할 줄은 몰랐지.

좀 미안해서 기다려 주는데, 한참이 지나도 일어날 기색이 안 보이길래 다가가 뺨을 살짝 때렸다.

짝!

“크업!”

놈이 이번에는 뺨을 붙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움직이는 거 보니 쌩쌩하다.

역시 뭐든 일단 쳐 보면 고쳐지는 법이군.

“적당히 구르고 일어나요.”

“끄으윽…… 네, 네놈이…….”

“아재, 말 전하러 온 놈이 검을 꺼내 들었어. 나 같으면 뒤질 듯 아파도 억지로 일어날 거 같은데. 진짜 뒤질지도 모르잖아.”

구석에 떨어져 있는 검집을 주우며 말했다.

이것도 흑철석으로 만든 건데 여기저기 구겨져 있다.

새로 만들어야겠네. 더 튼튼한 소재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예비용을 잔뜩 만들어 두던가.

한숨 쉬며 녀석을 보자 검을 지지대 삼아 일어나 있었다.

“마력도 쥐꼬리만 한 놈이 어떻게…….”

“그 레퍼토리도 이제 질리거든요. 꼬맹이가 어쩌고 마력이 어쩌고……. 어디서 멘트 배워 오는 것도 아니고.”

구겨진 검집을 멀리 내던지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전하라 한 말이나 읊어 봐요.”

“……식사 초대다.”

“식사 초대라…….”

피식 웃었다. 대충 무슨 꿍꿍인지 알겠다.

“조건은 동행 없이 단둘이, 장소와 시간은 이쪽 마음대로. 맞죠?”

“……맞다. 대체 어떻게…….”

“그것도 이제 질린다니까.”

“…….”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은지 놈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차분히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바이론의 식사 초대.

플레이어에 대한 경계도가 80 이상으로 올라갔을 때 벌어지는 이벤트다.

생각보다 빠르다.

초반부라 경계심이 강한 건지, 마녀재판이 그 정도로 경각심을 준 건지는 모르겠다. 게임에도 없는 전개였으니까.

조금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왕도’에서 만나자고 전해요.”

“……알겠다.”

“잠깐.”

검을 지팡이 삼아 나가려는 녀석을 붙잡았다. 그러자 놈이 음울한 눈으로 뒤돌아봤다.

“……얼른 죽여라.”

“뭔 헛소리예요?”

공격한 걸 용서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저항의 사람을 베어 버릴 정도로 돌아버린 것도 아니다.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니, 녀석이 되려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내 목을 베고 전달하는 건 머리통 하나면 충분하다고 얘기할 생각 아니었나?”

사람을 무슨 싸이코 살인마로 보나.

“물어볼 게 있어서 부른 것뿐이에요.”

“뭔가?”

입을 열기 전, 조금 망설였다.

이게 필요한 말일지 확신이 안 서서. 하지만 확실히 해야 한다. 게임에는 그와 관련된 묘사가 안 나오니까.

내가 알던 사회 통념과는 거리가 먼 세계.

지구에서는 당연한 일도, 여기서는 아닐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밥값은 당연히 초대자가 내는 거죠?”

카트발 사느라 재산 다 써서 돈이 별로 없다.

* * *

조용한 방 안.

바이론이 의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툭. 툭. 툭.

그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앞에 부복하고 있던 사내의 몸이 떨렸다. 바이론 밑에서 일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저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신중하지만 결단은 빠른 분인데.’

벌써 30분 째다. 저러고 있는 게.

뭔가 고민할 때 보이는 습관인데, 그는 여태까지 저 행동이 10분 넘기는 걸 본 적이 없다.

툭!

이전보다 커진 소리. 사내의 몸이 떨렸다.

“재밌네.”

“…….”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사내는 그냥 침묵했다. 바이론이 되묻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 아는 놈이 그리 순순히 초대에 응하다니……. 멍청한 건 아닐 테고, 꿍꿍이가 있나?”

“…….”

“뭐 상관없지.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

바이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가 질끈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모든 것이 파헤쳐지는 감각.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한참 동안 남자를 바라보던 바이론이 곧이어 눈을 감았다.

뭔가 음미하듯이.

“뭔가 특별한 능력은 있어도 C등급 이길 실력은 아니었는데…… 그새 저만큼 강해졌다고?”

바이론은 그리 중얼거리곤 다시 자리에 앉아 손가락으로 탁자를 치기 시작했다.

“아니. 차라리 실력을 숨겼다는 쪽이 현실성 있겠군. 그 단기간 사이에 저렇게 강해지는 건 불가능하니.”

바이론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교활한 녀석. 나이에 걸맞지 않는 실력에 이런 심계까지. 이것이 적통의 푸른 혈맥이란 말인가.

어릴 때부터 항상 직계의 위대함에 대해 교육받아 왔지만, 믿지는 않았었다.

그야 태양을 화살로 쏴서 맞췄다는 둥, 콧바람으로 산맥을 무너뜨렸다는 둥, 전부 허황된 소리밖에 없었으니까. 방계의 반란에 대비해 꾸며 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전부 진짜일 수도 있겠군.’

독보적인 재능에 교육까지 전부 이수한 그가 전쟁 후 제 한 몸 사리기 바빴다. 그런데 열 살도 되지 않았을 꼬맹이가 레이튼에서 저렇게 성장하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그 어이없는 얘기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말이지…….’

과연 직계는 다르다는 건가?

바이론이 냉소적으로 웃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그 대단하신 분들은 이미 땅 밑에 묻혀 있는걸.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다.

살아남은 놈이 강한 거지.

‘마지막 남은 직계를 죽이면, 방계가 더 뛰어나다는 게 증명된다.’

어릴 때부터 항상 들어왔던 소리.

방계는 직계를 이길 수 없다.

수백 년 동안 이어 온 말이면서, 사실이기도 했다. 실제로 방계는 단 한 번도 직계를 넘어선 적이 없으니까.

‘수백 년이면 슬슬 바뀔 때도 됐지.’

마지막 남은 직계를 죽이고 방계는 직계가 된다. 제국의 재건. 그 신세계의 황제 자리는, 그가 차지할 것이다.

바이론이 피식 웃으며 부복한 사내를 보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친척 만나는데 선물 정도는 챙겨야지, 하고.

* * *

약속 장소로 ‘왕도’를 택한 이유는 세 가지.

하나는 노블레스가 직접 운영하는 곳이라는 거다.

바이론의 숨겨진 힘이야 어쨌든, 세력을 드러낸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니 굳이 노블레스와 대척점 만들진 않을 거란 계산이다.

원작대로라면 크게 위험할 일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좋으니까.

두 번째는 ‘왕도’가 레이튼에서 그나마 가장 치안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

바이론 세력의 주 구성원은 범법자들.

뒤통수 칠 생각으로 사람 모은다 해도 자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먼저 알아챌 수 있다면, 몸 빼내는 정도야 자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바로 음식이다.

“피스트리스 지느러미를 주방장님만의 특제소스로 요리한 음식입니다.”

피스트리스.

북쪽 끝 해안에서 사는 생물로, 마차로 수개월 정도는 떨어진 거리에 있다.

“재료 공수는 어떻게 한 거죠? 보관함 써도 오는 사이 상할 텐데.”

“마차에 전담 마법사가 붙어 한 시간 간격으로 냉각 마법을 사용합니다.”

……마법사 고용 비용이 하루 1골드는 될 텐데 그런 사치라니. 수십 골드짜리 음식이 이해가 간다 해야 하나.

그보다 망한 게 이 정도라면 전에는 대체 어떤 생활을 해 온 거지?

그가 귀족 자리 욕심내는 것도 새삼 이해가 갔다. 실제 생활은 귀족보다 더한데 위치는 그것에 못 미쳤을 테니 말이다.

음식을 떠먹어 보니 샥스핀 맛이다.

먹어 본 적은 없지만, 대충 그렇다 설정했으니 맞겠지, 뭐.

사실 맛에는 별 관심 없었다.

인간이 받아들이기 힘든 맛이라도 꾸역꾸역 집어넣었을 거다. 피스트리스의 지느러미는, 마력을 증진시켜 주는 효과가 있으니까.

여기 주민들도 대부분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곳 세계의 고급 식재료는 이처럼 마력을 머금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알았다면 이 정도 금액으로 끝나지 않았겠지.

흐물흐물한 감촉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미미하지만 마력이 축적되는 게 느껴졌다. 정말 적은 양이지만, 지금 내 입장에선 감지덕지다.

눈을 감고 쌓이는 마력 가늠하고 있으려니 종업원이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네. 맛있네요. 그보다 부탁드릴 일이 좀 있는데,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지배인님께 극진히 모시라 지시 받았거든요.”

“별건 아니고, 곧 동행이 올 텐데 그 전에 음식 좀 전부 내와 주세요.”

종업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불가능하진 않습니다만, 저희 가게는 코스 순서대로 요리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음식의 품질이…….”

“그쪽은 괜찮아요. 음식 전부 내놓은 다음, 근처에 다가오지 마세요.”

“네? 하지만…….”

“동행 성격이 좀 지랄 맞아서요.”

차분하게 말하자, 종업원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 접객 경력이 10년 차입니다. 어떤 진상 손님이라도 문제없죠.”

손님 앞에서 진상이니 뭐니 하는 것부터 접객 자격 미달난 거 아닌가?

뭐라 한마디 더 하려는 순간 입구가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끼이익.

검은 머리에 황금빛 눈동자.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조합을 소화시키는 남자. 설정과 판박이다.

중간 보스 바이론.

나와 눈이 마주치고, 놈이 희미하게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예상보다 빠르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한숨 쉬며 종업원에게 말했다.

“음식 나오면 오지 말고 그냥 저 불러요. 알아서 가져갈 테니까.”

“예? 아무리 그래도…….”

“전 괜찮으니까요.”

손짓으로 종업원을 무르자, 이해 안 간단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돌아섰다.

말을 들어야 할 텐데.

“이런, 이미 식사 중이었군. 내가 너무 늦게 왔나?”

고개 돌리니 바이론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고개만 까딱였다.

“오히려 너무 빠르죠. 저녁 약속 잡았는데 왜 점심에 나와요? 할 일이 없으신가.”

“상대방이 점심부터 나와 기다린다는데 내버려 두면 그건 예의가 아니지.”

살짝 눈살이 찌푸려졌다.

감시 중인 건 알았지만, 여기 들어오는 것까지 잡아냈을 줄은 몰랐는데.

“예의라…… 저 죽이려고 계속 용병 보내던 사람 입에서 그런 말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네요.”

심드렁히 말하자, 바이론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마주 앉았다.

마치 이웃 형 같은 분위기.

“그건 오해가 있어.”

“두 번 오해하면 사람을 어떻게 만드시려고.”

“내가 널 죽이려 했다는 게 착각이란 거야. 나는 그런 명령 내린 적 없어.”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꼬리 자르기……. 윗사람들 그거 참 좋아해, 안 그래요? 부하 관리 하나 못 하는데, 리더 자격이 있나?”

일부러 비꼬며 말했는데, 바이론은 태연하기만 했다.

“꼬리 자르기.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거 인정하지. 하지만 사실이야.”

“디노는 뭐, 사고였다 쳐요. 우연히 만난 거니까. 하지만 시르케랑 그…… 미크레?”

“번개의 미켈슨 말이군.”

그걸 어떻게 기억해.

“미크레든 맥크리든. 그 둘 보낸 것도 그쪽이잖아요.”

“보낸 건 맞지만, 죽이라고 보내진 않았어. 정중히 모시라 했지.”

“팔다리 뜯겨도 상관없으니 살려만 오라는 게 언제부터 정중이 됐죠?”

“내 입장에선 엄청나게 정중한 표현이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네.”

사지 뜯어 납치하는 게 정중이면 패드립은 성인들 고언쯤 되시겠다.

어이없어서 쳐다보고 있으려니, 바이론이 아래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쪽은 견해 차이가 있겠지만, 이번 일은 정말 오해였어.”

“이번 일?”

“식사 초대 보낸 용병. 멋대로 칼질을 했던데.”

아, 그거. 너무 허무하게 이겨 잊었는데, 확실히 혼원력 쌓기 전이면 위험했을 수도 있겠다.

“그 아재 말로는 댁이 시켰다던데.”

“그럴 리가. 나는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면 ‘인사’만 전하고 오라 했을 뿐이야.”

“오해할 만한 어투로 했겠죠.”

보진 않았지만, 확실하다.

바이론의 재능 중엔 ‘선동가’의 자질도 있다. 본인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 그런 식으로 사람 부리는 일은 흔하다.

바이론이 덤덤히 답했다.

“멋대로 오해하는 것까지 내가 조절할 순 없지.”

“어련하실까.”

퉁명스레 답하자, 바이론이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기분 나쁜 거 이해하지. 부하 잘못은 어느 정도 내 잘못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사과의 선물을 가지고 왔어.”

그리고는 바이론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겨우 조금 열린 상태에서도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비릿한 피의 향기.

이내 상자가 전부 열리고, 물체를 보기 전 먼저 코드부터 확인했다.

[IT-1-254]

코드의 의미는, 성인 남성의 머리.

“으아아악!”

갑자기 들린 비명에 고개를 드니, 아까의 종업원이 음식이 든 접시를 내팽개친 채 넘어져 있었다.

“여긴 직원 교육이 제대로 안 돼 있네. 손님 상 앞에서 저런 추태라니.”

내 얼굴을 살피던 바이론이 그 모습을 보고 인상 찌푸렸다. 하지만 곧이어 뭔가 재밌는 걸 생각해 낸 듯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죄책감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어.”

“으아…… 아?”

그 말과 함께 비명 지르던 종업원의 표정이 멍해진다. 그리고는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내밀어 다무는 동작을 했다.

나는 재빨리 손을 집어넣어 막았다.

털썩.

쓰러지는 몸을 살포시 내려놓으니 바이론이 웃었다.

“아, 미안. 식사 자리에서 피 보는 건 조금 불쾌하긴 하지.”

그리고는 머리를 집어 종업원 근처.

그러니까, 그를 부축하고 있는 내 앞으로 던졌다.

“이것도 사과의 의미로 가져온 건데…… 선택을 잘못한 것 같네. 거기 놔둬. 일어나면 치우라 할 테니.”

바이론이 상자의 모서리 부분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웃었다.

“그러니까, 너는 다시 앉아. 우린 대화를 해야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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