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40)
라이놀이 용병 생활 10여 년 동안 닦아 온 본인의 감각을 의심했다.
몇 번이나 그의 목숨을 구해 주며 누구보다 믿고 있던 그 감각. 하지만 감각이 틀린 게 아니라면 저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심법으로 낼 수 있는 출력이 아니야.’
사자 심법이 출력에 치중한 기술은 아니다.
그보다는 안정성과 축적 속도에 집중한 심법이다. 물론 그렇다고 출력이 부족하진 않다.
누가 뭐라 해도, 대륙 제일의 심법 아닌가.
그런 사자 심법조차 저 정도 마력으로 저런 힘을 내지는 못한다.
‘동대륙의 천마 신공도 저런 건 불가능해.’
출력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는 동대륙의 심법.
본 적은 없지만, 알 수 있었다.
아니면 모든 ‘무’의 중심은 동대륙을 기준으로 돌아갔을 테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에게 허용된 기술이 아니다.’
그가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는 와중, 곧이어 리안이 눈을 떴다.
“후우…….”
“끝났어?”
“네, 죄송해요. 오래 기다렸죠?”
“별로.”
어두컴컴하던 바깥이 환해졌지만, 라이놀은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리안의 재능에 정신이 뺏겨 시간 가는 줄 몰랐으니까.
“그 심법 이름이 뭐야?”
“사자 심법이죠, 뭐. 가르쳐 준 데에서 살짝만 바꾼 것뿐이에요.”
“아니. 그건 사자 심법이 아니야.”
라이놀이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거랑 비교하긴 미안하지.”
사자 심법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다.
그냥 사실이 그런 거지. 심법에 자부심은 가지고 있지만, 그게 자만은 아니었다.
저게 사자 심법에서 파생돼 나왔다 해도 둘을 같은 선상에 두기엔 그 차이가 너무나 심했다.
“그러니까, 이름은 네가 정해.”
“음…….”
작명엔 자신 없는데.
리안만 해도 그렇다. ‘리 게임 안 돼요’ 줄임말이라니. 정상적인 작명 센스라고 보긴 무리 아닌가.
커뮤니티에서도 그랬다.
작명은 지인한테 맡기라고.
무료 게임이라 개발자한테 호의적인 분위기였는데도 그랬으니 말 다 했지.
사자 심법에서 파생됐으니 호랑이 심법이라 할까?
기운이 솟아날 것만 같은데.
“혼원공으로 할게요.”
“좋은 이름이네.”
“그럼 다행이고요.”
혼원력 사용하니 혼원공.
딱히 혼원력이 있어야 익힐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둘 다 나만 사용 가능하니 다를 것도 없잖은가.
그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리안이 조심스런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심법은…….”
“가르쳐 줄 필요 없어.”
“……혹시 독심술 익혔어요?”
그런 설정은 없었는데.
“할 말이 뻔했으니까. 내가 가르쳐 준 거니 너도 가르쳐 줘야 한다는 생각이었지?”
“……네.”
“나도 주제는 알아.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정도는 구별할 줄 안다고. 나만의 얘기가 아니라, 인간 중에 그걸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
거인의 힘을 인간 몸에 때려 박는 꼴이다.
아니, 그보다 더하다.
전제 조건이 거인의 신체인데, 놈들은 심법을 익힐 수 없으니까.
신체 능력 받쳐 주는 거인은 심법을 익히는 게 불가능하고, 심법 사용 가능한 인간은 신체 능력이 못 받쳐 준다.
다른 이종족도 마찬가지.
인간보다 약한 엘프는 말할 것도 없고, 피를 이용해 싸우는 뱀파이어나 전투와 거리가 먼 드워프는 말할 것도 없고.
라이놀이 아는 그 어떤 종족도 저걸 익히는 건 불가능했다.
사실상 오직 리안 하나만을 위한 심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도면 질투도 안 생기지.’
경쟁도 급이 맞는 상대와 하는 법.
D등급 용병이 왕국 기사단장을 보며 질투하진 않는다.
굳이 뭔가 느낀다면 선망이나 경외지.
그런 상대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만큼 비참해지는 일도 없다. 다른 세계 인간. 그의 내면에선 정리가 끝났다.
‘그렇다고 포기했다는 건 아니지만.’
라이놀이 팔을 들어 올렸다.
“심법 만들었으면 실험부터 해 봐야지.”
“실험이요?”
“성능 실험. 싫으면 나중에 해도 되고.”
“저야 좋죠.”
리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성능 실험? 이쪽에서 부탁하고 싶던 참이다. 아까부터 힘쓰고 싶다 근질거리는 몸을 달래느라 고생이었으니까.
설정에 없는 EX급 스킬이 어느 정도 성능을 낼지도 궁금했다.
“루트는 사자 심법이랑 같지?”
“네. 오른팔부터요.”
“가능한 것도?”
“아직 오른팔뿐이에요.”
“방금 입문한 놈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어이없지만…….”
라이놀이 리안의 마력에 맞춰서 오른팔에 힘을 불어넣었다.
“방법은 알아?”
“해방왕 전기에서 읽었어요.”
“그럼 설명할 필욘 없겠네.”
라이놀과 리안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 서로의 우정을 가꾸는 데 쓰이던 기술은, 현재 힘겨루기 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
“그럼 바로 간다.”
“네. 오세요.”
쾅!
둘의 주먹이 부딪치며 굉음을 만들어 냈다.
수천 년 전에도 존재했을 이 전통은, 그냥 주먹질이다.
* * *
“팔은 괜찮아요?”
“문제없어.”
문제 있어 보이는데.
다시 맞추긴 했지만, 팔이 꺾였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로.
덜렁거리는 팔을 보고 얼른 신전 가자 했더니, 그냥 슬쩍 보곤 혼자 끼워 맞춰 버렸다.
라이놀이 이렇게 터프한 성격이었나?
앞으로 깝치지 말아야지. 관우가 재림한 줄 알았다.
“……죄송해요.”
“내가 하자고 한 건데 뭐.”
“그래도요.”
동일한 마력으로 심법 힘을 겨루는 이 유구한 전통은, 신체 능력에 대한 계산이 빠져 있었다.
마력 앞에 먼지 같은 신체가 무슨 영향을 끼치겠냐는 생각이었나 본데, 덕분에 사람 하나 골로 보낼 뻔했네.
“신체 능력 때문만은 아니야.”
라이놀이 피범벅 된 팔에 붕대를 두르며 말을 이었다.
“직전에 힘 뺐지?”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용병 생활이 몇 년인데. 감각 하나는 자신 있어. 뭐, 이런 일도 그렇고.”
그러면서 팔을 슬쩍 들어 올렸다. 이런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란 뜻이다.
“직전에 힘을 뺐는데도 이 정도 격차야. 단순히 신체 능력 때문이라고 볼 순 없지.”
“마력도 조금 차이 났다는 건가요?”
“조금이 아니야. 압도적으로 차이 났어.”
라이놀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비교도 안 될 만큼.”
“…….”
사실 나도 느꼈다.
힘을 조금 뺀 것도 아니다. 거의 절반은 뺐는데 이 정도 차이다.
신체 능력 외의 조건은 동일했다.
그럼에도 팔이 저 정도로 아작 났다는 건, 마력의 힘에서 그만큼 차이가 났다는 뜻이다.
라이놀이 피식 웃었다.
“내 눈치 볼 필요 없어. 괜찮으니까.”
“신전 꼭 들러요. 검사는 팔이 생명인데.”
“안 그래도 갈 거야. 어차피 거기 가도 팔부터 맞추고 치료받는 건 똑같으니 미리 한 거지.”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나? 진짜 관우도 아니고.
밖으로 나가는 라이놀을 보며 한숨 쉬었다.
그래. 팔 안 날아간 게 어디냐.
절단은 주교급한테 치료받아야 하는데, 알고 있는 유일한 주교는 심문관 이송하느라 레이튼을 떠난 상태다.
라이놀의 코드가 멀어지는 걸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슬슬 나오시죠?”
만화에서나 보던 대사를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렇다고 다른 대사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기다려도 안 나오기에 벽 뒤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NPC-1-MC-C]
용병 C등급.
예전에 만났던 스캐빈져와 같은 등급이다.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수준.
계속해서 쳐다보니, 상대가 마지못한 기색으로 나왔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데자뷴가?
이상한 아저씨 하나 생각나네.
“그건 알 거 없고, 바이론이 보냈어요?”
“맞다. 네 녀석 목을 광장에 효시하라더군.”
그 말에 코웃음 쳤다.
뭣도 없던 우리한테 A등급 둘을 보낼 정도로 신중한 바이론이다. 이제 와 C등급 하나 보내며 목 따 오라 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무슨 꿍꿍이인지 떠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글쎄.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전에 당한 건 잊었나 봐요?”
“그쪽은 이미 조사 끝났다.”
놈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답했다.
“산맥에 가디언이 있을 거라곤 아무도 상상 못 했지. 어떻게 눈치챘는지 몰라도, 거기까지 유인한 계책은 칭찬해 주마.”
“…….”
지가 유인한 것도 아니면서 왜 지가 뻐긴대?
어이없어하는데,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한 명은 배신까지 했지. B등급 둘과 가디언의 협공. 제아무리 번개의 미켈슨님이라도 못 버티는 게 당연하다.”
“……그 남자 이름이 번개의 미켈슨이예요?”
시르케랑 같이 왔던 용병.
칭호가 번개였나? 엑스트라한테 너무 거창한 거 아닌가 싶었다. 번개같이 뒤지긴 했는데.
상대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설마 그분 성함도 기억 못 하는 건가? 생각보다 머리 나쁜 놈이로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요.”
“그럼 생각이 없는 놈이로군.”
“…….”
곧 죽을 놈 이름 알아 뭐 하겠냐는 심정이었을 뿐이다.
네임드도 아니었고.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 대신, 궁금한 걸 물었다.
“마녀가 배신한 이유. 싸우다 져서라고는 생각 안 해요?”
“그럴 리가. 시르케, 그년은 예전부터 바이론님을 잘 따르는 편은 아니었다. 갑자기 배신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배신 때렸다고요?”
“뜬금없는 타이밍은 아니다. 7성급 가디언이 상대면 A등급 용병도 상당한 부상을 각오해야 하니.”
아, 뭔지 알겠다.
“아재, 버림 패구나.”
싸움 장면 봤다면 저런 소린 못 했을 거다. 그리고 바이론이 그걸 모를 린 없었다. 놈은 ‘푸른 혈맥’ 정보까지 알고 있는 놈이다.
그런데도 저놈이 모른다는 건, 그냥 알려 주지 않았다는 말밖에 더 되는가?
감시역 또는 버림 패.
이놈은 후자겠지.
바이론이면 내가 사람 귀신같이 잘 찾는단 것도 알아냈을 테니까. 사람 막 다루는 건 설정과 똑같군.
놈이 인상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나는 버림 패가 아니다.”
“버려질 걸 아는 버림 패가 어딨어요?”
“하하, 아직 모르나 보군.”
놈이 훗. 하고 웃었다.
당당한 표정.
뭐지? 두뇌형 책사 같은 건가?
설정에 그런 인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달라진 게 워낙 많으니 새로운 인물 등장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조금 긴장하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다른 코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 뭔데? 놈을 바라보니, 다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C등급이다. 소모품으로 활용될 인재가 아니지.”
“…….”
그냥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C등급이면 어디 가도 무시당할 급은 아니지만, 으스댈 정도도 아니다. 애초에 바이론은 A등급도 소모품처럼 쓰는 놈 아닌가.
잠시나마 긴장했던 게 무색하게 됐다.
한숨 내쉬며 몸을 풀었다.
“전하라 한 말이나 읊어 봐요.”
“……그걸 어떻게 안 거지?”
“그게 녀석 방식이니까요.”
“…….”
녀석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너무 잘 아니 이제 와 불안한 모양이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더니, 갑자기 스르륵 검을 뽑아 들었다.
“……검사는 검으로 얘기한다. 이런 건 아니죠?”
“멍청한 소리. 검으로 대화를 어떻게 하나?”
그렇긴 하지.
“그럼 그 칼은 뭔데요?”
“말 전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녀석이 뽑아 든 검을 내게 향했다.
“너는 여기서 죽을 테니까.”
“……전하란 말이 그런 건 아닐 텐데.”
“네 말이 맞을 수도 있으니까.”
녀석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오기 전에 바이론님께서 하신 말이 있지. 기회가 보인다면 죽여도 좋다.”
“그거랑 제 말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버림 패로 쓰겠다 마음먹으셨다면, 다시 내 쓸모를 증명하겠다.
꼬맹이 하나 무력 제압하는 게 무슨 쓸모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보다 수십 배는 많은 양.
그 모습을 보며 내심 반성했다. 해변의 모래처럼 차이는 C등급이 저 정도다.
스킬 하나 얻었다고 우쭐댈 때가 아닌데.
마음을 다잡고 오른팔에 모든 혼원력을 불어 넣었다.
상대는 C등급.
나는 그보다 마력도 부족하고, 검술 실력도 부족하다.
승부는 한 방.
오른손으로 검집을 들어 올리고 놈에게 내던졌다.
피잉.
소리가 조금 뒤늦게 따라붙고.
“커억!”
놈이 벽까지 날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