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38)
“……혈류석?”
혈류석. 속성석의 일종이다. 정확히는 쇠(金)에서 세분화되어 나온 속성.
일반적으로 칭해지는 오행이니, 사대 원소니 하는 것들보다 훨씬 희귀하다. 희귀도가 있으니 같은 등급의 속성석보다 10배쯤 비싼 녀석이기도 하다.
문제는 몇 안 남은 뱀파이어들이 품앗이해 만든 보물이란 거다.
그것도 있는 살림 없는 살림 쪼들려 만든 보물이라 원작에선 멸망 전까지 아무한테도 안 넘기고 함께 폭사한다. 그런 물건을 나한테 준다고?
“너, 구라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아간다.”
“날 사면 각인도 이전될 텐데 어떻게 그래?”
그 말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그렇긴 한데, 확실히 해야지. 혈류석이 무슨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아니고.
그러자 카트발이 필사적으로 고개 저으며 무죄를 주장했다.
“분명 귀중한 물건이지만, 너한텐 줄 수 있어.”
“왜, 해산물 냄새나서?”
“아니, 운명의 냄새.”
저 운명의 데스티니 타령 좀 그만할 수 없나.
나도 모르게 인상 찌푸려졌는지, 녀석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옛날부터 ‘해방 왕’과 같은 냄새의 사람에게 넘기라 전해지고 있어.”
처음 듣는 소리다.
저런 설정은 넣은 적 없는데. 하긴, 저런 거 하나하나 짜 만들진 않았지.
“그럼 너 안 사도 되는 거 아니냐?”
“어, 어?”
“어차피 줘야 하는 거라며.”
“……어.”
어는 무슨 어.
놈도 그제야 정신 차린 듯 다급히 말을 이었다.
“혈류석은 나밖에 못 가져와. 혈족 중에서도 특별한 혈통만 들어갈 수 있는 곳에 있거든.”
자기 사라는 어필.
이 정도면 처절해지는데.
사실이긴 하다. 성소라는 곳에 있는데, 뱀파이어 왕의 혈족 아닌 놈이 들어가면 터진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폭사했단 건 단어 그대로의 의미다. 아니면 내가 진작 털었지.
그보다, 이천 골드에 따까리 하나랑 혈류석이라. 이득인 거 같기도 하고.
그런 속내를 티 내지 않고 선심 쓰듯 입을 열었다. 마음의 빚은 기회가 될 때 달아 두는 게 좋지.
“좋아, 사 줄게.”
“정말? 고마워.”
“다시 깜방에나 들어가. 문제 만들지 말고.”
“깜빵이 뭔데?”
“네, 운명의 안식처. 지금은 지하 감옥이겠지.”
카트발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가 왜 내 운명의 안식처야?”
“잔말 말고 돌아가 있어. 나중에 선지두부(血豆腐) 해 줄 테니까.”
“그건 또 뭔데?”
“얼른.”
안 가고 버티는 녀석을 밀어냈다.
보안 수준에 걸맞게 여태 탈출한 것도 모르는 거 같지만, 정도가 있다.
슬슬 알아챌 때도 됐지.
녀석이 마지못해 돌아서 그림자에 스며들어 간다. 뱀파이어 전용 기술 그림자 숨기.
직접 보니 감회가 색다르구나.
꿈틀거리며 사라지는 코드를 보고 있으니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제 곧 경매가 시작됩니다. 참가하실 분들은 모두 회장으로 입장해 주세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 녀석 때문에 밥도 못 먹었잖아.
한숨 쉬며 접시를 내려놓고 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에는 고급스러운 개인석이 사방에 놓여 있었다. 대충 아무 데나 골라 앉으니, 진행자가 입장해 이런저런 물건들을 꺼내 놓는다.
“오늘도 경매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불미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만…… 그게 저희들의 소비 욕구를 막을 순 없지요!”
푸하하하. 관중석에 웃음이 터진다.
어느 부분에서 웃긴 건지 통 모르겠다. 여기 시대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개그 코든가?
개그는 알아서 하라고 하고, 단상 위의 코드를 확인했다.
속성석을 제외하면 별거 없다. 나는 거기서 흥미를 잃고 딴생각에 잠겼다.
물건을 설명하는 소리, 입찰하는 소리 등등.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원래 목표했던 물건이 나왔다.
“다음 물건은 최상급 불의 속성석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돈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죠. 마법사 중에는 연이 닿아야 구할 수 있다 하여, ‘연석’이라 부르는 자들도 있다더군요.”
진행자가 반짝이는 붉은 돌을 들어 올렸다.
‘……저거 사도 대충 돈이 남지 않을까? 그냥 입찰해 버려?’
손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카트발이 커튼 뒤에서 울먹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거 진짜 50 넘은 늙은이 맞나?
인간 나이로 계산해야 맞을 거 같은데.
한숨 쉬며 손을 내렸다. 혈류석 생각해서 봐줬다.
최상급 속성석이 연 닿아야 만날 수 있다 하여 ‘연석’이라 불린다면, 혈류석은 연 닿을 일 없다 하여 환상의 돌 취급 받는다.
오백 골드에 낙찰되는 최상급 속성석을 쓰라린 눈으로 쳐다봤다.
너와는 연이 아닌가 보구나. 다음 생에 만나자.
커튼 뒤로 사라지는 속성석을 일별하는데, 진행자가 박수를 짝짝, 치며 시선을 끌었다.
“드디어 오늘 경매의 하이라이트! 밤의 귀족, 시체들의 왕이라 불리는 뱀파이어입니다! 뭐, 하는 짓거리를 보면 박쥐나 모기 새끼가 더 어울리긴 하지만요. 하하하.”
푸하하하.
좌중들 사이에 웃음보가 터졌다.
이번에도 재미는 없지만,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는 알겠다.
얼핏 보면 자기 상품 깎아내리는 것 같아도, 저건 전략이다.
이종족에 대한 반발심을 상쇄하기 위한 전략.
슬쩍 카트발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 분노한 기색이긴 한데, 심하진 않다. 하긴, 이종족들이 저 취급 받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특히 뱀파이어는 더 하겠지.
세력이 약해서 이종족 연합, 겔리안에서도 기를 못 펴고 다니는 종족 아닌가. 명색이 왕자라는 놈이 노예로 잡혀 온 것만 봐도 그들의 세력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알겠다.
“이종족이 멍청한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특히 이놈은 햇빛 보기 싫다며 도망도 안 가고 관속에 틀어박혀 있었을 정도로 심했다는군요.”
……어쩌면 그냥 저 새끼가 병신이라 그런 걸 수도 있고.
특성상 햇빛 싫어하긴 해도 죽는 건 아니다. 그냥 조금 기분 나쁜 정도지.
그런데 뭐? 햇빛이 싫어서 도망을 못가?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녀석이 얼굴을 푹 숨겼다. 아까 종족 전체가 모욕당할 때 보다 더한 반응.
쪽팔린 건 알아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저런 게 차기 뱀파이어 왕 후보니 불행이라 해야 하나.
“그래도 검사 결과 병 없고 튼튼하니 걱정은 마시지요. 시작가는 500골드입니다!”
“600골드!”
“700골드!”
시작부터 열기가 뜨겁다. 그만큼 보기 드문 광경이긴 했다. 레이튼을 제외한 전 대륙에선 이종족 노예가 금지된 상황이니까.
그래도 불안감은 없었다.
초반은 그냥 재미 삼아 찔러보는 녀석들뿐.
어차피 진짜 사려는 놈은 벌써부터 참가 안 한다.
확실히 1,000골드를 넘어가자 참여자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이제부터가 진짜들의 싸움이다.
“1,200골드.”
웅성웅성.
사람들의 시선이 손을 든 여자에게 향했다. 1,200골드면 아무리 부자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니까.
보니까 확실히 이 사이에서도 눈에 띄긴 한다. 액세서리가 존X 번쩍거린다는 뜻이다.
“1,500골드.”
회장의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이번엔 남자다.
의외로 번쩍거림은 없었다. 대신, 옆에 이종족 노예 몇을 끼고 있다.
저건 그냥 또라이구나.
“1,550골드.”
“1,600골드!”
“1,650골드!”
“……1,700골드.”
반짝이와 또라이가 서로 노려본다.
“더 돈 없는 거 아는데 포기하시죠?”
“그쪽이야말로 저번 지출이 꽤 큰 걸로 아는데…….”
“아직 이 정도 여유 없진 않죠.”
“나도 그렇소.”
반짝이가 또라이를 한참 노려보다, 힘차게 손을 들어 올렸다.
“……1,710골드.”
“1,720골드.”
“1,730골드.”
“……1,740골드!”
“1,750골드!”
……쟤네 뭐 하냐? 저쯤 되면 자존심 싸움인데.
나는 한숨 쉬며 팔을 들어 올렸다.
더 과열되기 전에 참가해야지, 저러다 끝 모르고 오르겠다.
“2,000골드.”
동시에 회장의 모든 사람들이 내 쪽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여태까지와 비교도 안 되는 주목도.
2,000골드면 노블레스 기준으로도 굉장한 거금. 그걸 듣도 보도 못한 꼬맹이가 제시하니 더 눈에 띄겠지.
어차피 이미 모습 숨기기엔 늦었으니 당당히 고개 들었다.
난 돈이 존X 많다. 그러니 포기해라.
“2,000골드 나왔습니다! 더 입찰하실 분은 안 계십니까?”
진행자가 반짝이와 또라이를 번갈아 보았지만, 놈들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진행자가 조금 더 뜸을 들이다, 결국 손을 뻗는다.
“안 계신다면 이번 경매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낙찰 축하드립니다!”
* * *
시X, 못 살 뻔했네.
남은 잔고를 훑어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옆의 카트발을 바라보니 기분 좋은지 싱글벙글하다.
경매 끝나고 들으니 반짝이는 창관 운영, 또라이는 이종족만 골라 먹는 남색가라던데. 그 사실 알아도 저리 웃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너는 진짜 내가 살려 준 줄 알아라.”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보고 있던 증서를 접었다.
잔고는 텅 비었지만, 아쉽진 않았다.
돈이 아직은 게임머니 같은 기분이 들어서 현실감각이 떨어진다.
이름이 골드가 뭐냐 골드가.
너무 올드하잖아.
“각인 이전 끝났습니다.”
마법사의 말에 손목을 바라보니 단두대가 그려져 있다.
카트발 쪽은 목줄 채워진 인간 형상.
이게 중세의 미적 감각인가. 호러틱한데.
“아시겠지만, 명령이 절대적이진 않습니다. 어겼을 때 끔찍한 고통을 주는 정도죠. 순간적으로 반항할 수도 있으니 충분히 유의해 주세요.”
“네.”
“그 외의 주의사항에 대해 알려드릴까요?”
“필요 없어요.”
건성으로 답하고 뒤돌아 나갔다.
노예로 샀다고 진짜 그렇게 대우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머슴처럼 부리는 정도면 충분하다.
“혈류석 가지고 오는 데 얼마나 걸려?”
“한 달은 걸려. 거리가 꽤 돼서.”
한 달 뒤면 바이론이 내 장기로 젓갈 담그고 있을 거다.
“2주 안에 가져와.”
카트발이 황당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니, 물리적으로 불가능…….”
“성소에 네 누나 있잖아. 연락해서 가지고 오라고 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녀석이 경악했다.
“서, 성소에 대해 알아? 아니, 그 전에 누나가 있는 건 어떻게…….”
“그건 알 거 없고, 중간지점 정하고 가서 바로 받아 와. 그럼 일주일이면 되겠네.”
“일주일은 무리야! 2주도 빠듯하단 말이야.”
“좋아. 열흘. 내가 네 주인 될 운명 맞나 봐. 사람이 이렇게 친절할 수가 있나?”
“…….”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꾹 참는 얼굴이다. 후임이 까일 때 꼭 저런 표정이었는데.
“뭐 해? 시간 간다. 너무 여유롭게 줬나, 일주…….”
“바로 갈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카트발을 바라봤다.
제법 빠른데, 닷새로 할 걸 그랬나.
어쨌든 속성석은 일단 해결이다. 이제 마력 좀 쌓아야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너 누구야?”
“장난치지 마요.”
“아니, 진짜로.”
라이놀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진심인 거 같다.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리안이요.”
“……리안?”
라이놀은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얼굴은 그대로긴 한데…….”
“나머지도 비슷해요. 그보다, 심법 진전은 좀 어때요?”
길어질 것 같아 말을 돌리자 통한 듯 라이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추 가르칠 수준 된 거 같긴 해. 겉핥기나마 이해했거든.”
“그럼 바로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난 상관없는데…… 괜찮겠어?”
라이놀이 밖을 가리켰다. 완전한 어둠. 훈련하기 너무 늦은 시간이긴 하다.
“전 괜찮아요. 라이놀이야말로 왜 안 자고 있었어요?”
“난 뭐…….”
라이놀이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안 봐도 뻔했다. 여태 수련하고 있었구나. 요즘 하는 일이라곤 그거뿐이었으니까.
얼굴에 다크서클이 선명하다.
마력은 신체를 원상태로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다. 자연히 피로 쌓이는 것도 일반인과는 비교 불가 수준이다. 5급 기사 마력에 저리 되려면 대체 며칠을 밤새야 하는 거지.
그 모습을 보며 한숨 쉬고 말을 이었다.
“무작정 노력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에요. 휴식도 수련의 일종이라 생각해야지.”
“한밤중에 심법 가르쳐 달라는 사람이 할 소린 아니네.”
라이놀이 피식 웃으며 옷을 털고 일어났다.
“네가 괜찮다면 나도 상관없어. 마침 집중 잘 될 시간이기도 하고.”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자세를 잡아 주기 시작했다.
가부좌 자세.
“원래는 마력 통하는 패스를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지만…… 너는 그럴 필요 없지?”
“네.”
내 눈엔 마력이 코드로 보이니까.
그냥 라이놀이 심법 운용하면 그대로 따라 하면 끝이다. 내가 생각해도 진짜 사기적인 능력이네.
“그럼 먼저 내가 마력 운용할 테니 보고 이해 안 되는 거 있으면 얘기해.”
“알겠어요.”
라이놀이 나와 같은 자세로 마주 앉았다.
그리곤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그 즉시 몸 안을 헤엄치는 코드들이 보였다.
그 속도가 무슨 계곡 물살을 보는 것 같다.
벌써 저 정도 숙련도라니, 재능충. 뭐가 겉핥기야. 보통 몇 년은 수련해야 도달할 걸 몇 주 만에 이뤄 놓고.
사실 저번에 의기소침한 게 보여서 조금 마음 쓰였었는데, 지금 보니 걱정한 내가 바보 같다.
저 재능 가지고 징징거리면 나가 죽어야지.
어쨌든 나한테도 잘된 일이다. 좋은 교본이 있으면 배우기도 수월한 법.
잡생각 버리고 눈으로 코드를 따라갔다.
0101110101…….
무수한 숫자의 향연.
처음에는 숙련도 높다고 좋아했는데, 보다 보니 눈 빠지겠다.
속도가 워낙 빨라서.
그래도 조금 지나니 금세 익숙해져 왔다. 그리고 곧이어 숫자에서 이상한 위화감을 발견했다.
01200102011……
중간중간 보이는 숫자 2.
0과1로 이루어진 이진법 코드에 존재할 리 없는 숫자였다.
저것이 뜻하는 바는, 오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