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37화 (37/225)

너의 코드가 보여 (37)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불편한 건 없는데,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지요.”

입구에서 따라붙은 안내원에게 물었다.

“저, 어떻게 보입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레이튼의 버러지처럼 보이는지, 아니면 있는 체하는 졸부처럼 보이는지 묻는 겁니다.”

“어……?”

안내원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좀 진상 같았나?

하긴, 나 같아도 대뜸 저런 질문 받으면 뭐 하는 놈인가 싶긴 할 거다.

“뭐 노리고 한 질문은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편히 답해 주세요.”

“음…… 굉장히 고귀하고, 지적이면서도 마치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거기까지만 하죠.”

그래. 안내원한테 물어 봤자 저런 답밖에 더하겠냐. 진상짓 작작 하고 목적에나 충실하자.

“경매 시작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안내원이 본인의 손목을 힐끔거렸다.

마학 시계.

저것도 값이 어마어마한 건데, 일개 종업원에게 줄 물건은 아니다. 돈 지랄이 어지간하구나.

“30분 정도 남았습니다. 자리로 안내해드릴까요?”

“아뇨. 구경 좀 하다 갈게요.”

“알겠습니다. 편히 즐기시지요.”

안내원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함정도 아닌 거 같고, 이제 맘 편히 구경 좀 해야지. 그리 큰 규모의 경매장은 아니지만, 볼거리, 먹을거리는 넘쳐났다.

그것도 전부 무료.

식비 아끼기 좋은 기회다.

먹는 거에 인색하게 굴 재산은 아니지만, 뭐든 공짜로 먹는 게 최고 아닌가.

시끌벅적한 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번쩍거리는 장신구와 옷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고귀해 보이기보단, 졸부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혀를 쯧쯧 차는데, 내 모습을 보니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이 정도면 패셔니스타지, 암.

그제야 참가자들이 다르게 보인다. 패션의 선두를 이끄는 자들. 이곳이 중세의 패션쇼장인 거였군.

……여기 나가면 바로 옷부터 갈아입자.

조금 무시당하고 말지, 내가 쪽팔려서 안 되겠다.

대충 음식 가져다 먹는데, 주위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 소년은 처음 보는군. 아는 사람 있소?”

“쉽게 잊힐 얼굴이 아닌데 이상하네요…… 칩거하고 있다던 베니스 경의 아들인가?”

“나도 노블레스 소속 대부분은 안다 생각했지만 본 적 없는 소년이군.”

X됐네.

워낙 스무스해서 함정 가능성만 고려하고, 본래 위장은 생각 못 했다. 이런 불찰을. 최대한 눈에 띄지 말아야 했는데.

걸린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테르베로츠와 친분도 있고, 애초에 여긴 그리 기밀 시설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런 일로 테이어 테르베로츠 앞에 끌려가는 것은 참기 힘들다. 그냥 죽고 말지.

재빨리 얼굴을 숨기는데, 그 전에 사람들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몸에서 절로 고귀함을 내뿜는 걸 보니 테르베로츠님의 숨겨둔 자식인가 보군.”

“베니스 경의 아들이 워낙 흉측한 몰골이라 숨긴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금 보니 정반대였네요.”

“내가 아직 모르는 소속원도 있었군. 정진해야겠소.”

……진심인가?

다들 제정신 아닌 거 같은데. 아니면 눈이 삐었거나. 얘네는 왜 정상이 없지?

이런 놈들 이끄는 테이어 테르베로츠에게 존경심이 솟구칠 지경이다.

그보다 테르베로츠 자식이라 한 놈은 얼굴 기억해 둬야지. 밤길에 만나면 뒤통수 갈길 거다.

이 외모를 어따 비벼?

어쨌든 저런 반응이면 걱정할 필요 없겠다.

하긴, 침입해 놓고 태연히 음식 먹는 놈을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애초에 침입도 아니었지만.

안심하는 순간. 웬 꼬맹이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너, 노블레스 아니지?”

말을 건 녀석을 쳐다봤다.

끽해야 10대 초반. 지금 내 몸보다도 한참 어리단 소리다. 가정교육을 판타지로 받았나, 어디서 반말이야?

“꼬마야, 존중과 배려란 말을 아니?”

“들어는 봤어.”

“그 안에 연장자에 대한 존대가 포함된 건 모르나 보구나.”

“그런 말은 못 들어 봤는데.”

“그럼 지금 배워.”

퉁명스레 말하자 꼬마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런데 생김새가 뭔가 낯익다. 금발에 빨간 눈. 흔한 얼굴은 아닌데…….

혹시 주요 인물인가?

노블레스에는 테이어, 제리스, 자이어 제외하면 네임드 없을 텐데. 슬쩍 코드를 확인하려는 순간, 녀석이 인상 풀고 입을 열었다.

“그럼 존대해야 하는 건 너네.”

어이없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한숨 쉬었다.

꼬맹이가 뭐래.

지구 나이까지 끌고 올 필요도 없이, 지금 기준으로도 난 중고딩, 쟨 초딩. 하늘 땅 만큼 차이가 난다.

나 때는 고학년 오면 운동장 비켜드리는 게 예의였어, 인마.

“헛소리 말고 가라 꼬마야. 형 밥 먹는 거 안 보이니? 배려에는 입에 뭔가 처넣고 있는 사람은 귀찮게 하면 안 되는 것도 포함된단다.”

“나 50살 넘었어.”

“……뭐?”

“50살 넘었다고.”

지구였으면 장난치지 말라며 꿀밤 때리고 넘기겠지만, 여기선 허투루 흘릴 수 없는 소리였다.

안 그래도 꺼림칙하던 참 아닌가.

여기 기준으로도 흔치 않은 생김샌데, 뭔가 익숙한 기분이라.

슬며시 코드를 보고, 황당해져서 중얼거렸다.

“……너 왜 여기 있냐?”

“나라고 이런 데 있고 싶었겠어? 그보다, 노블레스 아닌 거 아니까 부탁 좀 들어줘.”

내가 가타부타 답하기도 전에, 녀석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좀 사 줘.”

[NPC-1-34-2]

카트발.

이종족 중에서도 극히 드문, 뱀파이어의 왕자였다.

* * *

벨리아 대륙에는 노예가 없다.

아니, 공식적으론 거의 없다가 맞겠지.

정식 등록된 노예의 수가 1,000명 내외일 테니까.

전 대륙을 포함했을 때 얘기니, 저 정도 숫자면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할 거다.

중세치곤 인도적이지 않나 싶겠지만, 이건 결코 인권 같은 물렁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수지가 안 맞기 때문이지.

기본적으로 이곳에서 노예란 각인이 찍힌 자를 뜻한다.

최소 6성급의 노예 각인.

당연히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어가고, 별 능력 없는 노예에게 새기기엔 너무 과한 투자다.

자연스레 노예 각인은 희소한 ‘고가치 상품’에만 새기고, 널려 있는 ‘저가치 상품’에는 새기지 않는다. 강제로 끌려가도 공식적으론 노예가 아니란 소리다.

웃기지만 그랬다.

그 과정에 자의나 자유가 없음에도.

“그래서, 네가 모기의 일종이라고?”

“종족차별 발언은 그만둬.”

꼬마…… 아니, 카트발이 인상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래 봤자 꼬맹이라 귀여울 뿐이다. 근데 저 면상에 50살 늙은이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좀 거북해지는데.

저 얼굴 그대로에 주름살을 덧붙인 상상을 하는 와중, 카트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존중과 배려.”

“뭐.”

“네가 말해 놓고 지키지 않고 있어.”

“…….”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네.

가벼운 조크였는데. 일단 사과하고 보자. 듣는 사람 기분 나빴으면 잘못이지.

살짝 고개 숙이며 입을 열었다.

“종족차별 발언은 미안했어.”

“그거 말고.”

“그럼 또 뭐.”

슬슬 귀찮아져서 마주 인상 찌푸렸다.

잘못한 게 또 있나? 없는 거 같은데.

“존대.”

“…….”

“연장자에 대한 존댓말.”

“…….”

지금, 겉모습 초딩인 녀석한테 존댓말을 하라고? 가능은 한데……. 나이 상관없이 존대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하지만 내가 반말 듣는 입장에선 아니다.

완전히 상하 관계 아닌가.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켰다. 이런저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동방예의지국, 장유유서…….

시X, 도움 안 되잖아.

그래도 필사적으로 대가리 굴린 결과, 상황을 타개할 만한 비책이 떠올랐다.

“뱀파이어는 300살까지 살지?”

“응.”

“인간은 60살까지 살아.”

“그런데?”

“너는 인간 나이로 환산하면 15살도 안 됐단 소리지.”

“……그게 무슨 개소리야?”

모르지. 개소린 맞고. 지구에선 개 나이를 그렇게 세니까.

“내가 너한테 존대할 필욘 없단 소리야.”

“무슨 말도 안 되는…….”

“꼬우면 인간으로 태어나든가. 어른 대접해 줄 테니까.”

“…….”

황당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녀석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나를 살 수 있느냐, 없느냐지.”

“말 나온 김에 묻자. 너, 오늘 경매로 나오는 거 맞지?”

“맞아.”

“근데 왜 여기 있냐?”

주위를 가리켰다.

넓은 홀, 화려한 장식, 차려진 만찬. 아무리 봐도 노예가 있을 곳은 아니다.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이 움직이던 녀석이 덤덤히 답했다.

“탈출했어.”

“그럼 알아서 튀어. 여기 보안 병신이더라.”

“불가능해.”

“왜?”

녀석은 대답하지 않고 소매를 살짝 걷어 팔 한쪽을 가리켰다.

괴상한 모양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MG-4-7]

7성급 노예 각인.

그걸 보고 눈살 찌푸렸다.

보통은 6성급으로 끝내는데, 단단히 준비했군. 7성급이면 ‘마법사의 황혼’도 안 통한다.

어차피 남은 것도 없지만.

카트발이 소매를 내리며 말을 이었다.

“이 건물을 떠나지 못하도록 명령이 내려져 있어.”

“……내가 노블레스 아닌 건 어떻게 알았냐?”

“피 냄새가 달라.”

카트발이 입맛을 다시며 홀을 가리켰다.

거기엔 만찬을 즐기며 춤추는 사람들이 산재해 있었다.

“저놈들에게선 진한 돼지 냄새가 나. 탐욕에 젖은, 썩은 인간의 냄새.”

“돼지랑 인간은 다른데.”

“피 냄새는 비슷해. 정도의 차이만 있지, 하나같이 돼지 냄새가 풀풀 풍겨.”

종족차별 발언은 지가 하고 있네.

뱀파이어라고 탐욕 없는 것도 아니면서. 바라는 종류가 다를 뿐이지.

반박할까 생각하는데, 녀석이 나를 가리켰다.

“너는 달라. 나도 처음 맡아 보는 냄새야.”

“해산물 냄새라도 나디?”

먹고 있던 생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요리사가 뭔 짓을 했는지 ‘초인’의 신체임에도 냄새를 거의 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완전히 없애진 못해서, 약간 비릿한 향이 나긴 한다.

반쯤 농담 삼아 물은 건데, 카트발은 정색하고 고개 저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드네. 하지만 아버지에게 비슷한 냄새를 풍기던 사람에 대해 들은 적 있어.”

“누군데?”

“문을 닫은 자.”

그 말에 순간 몸이 굳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라. 그래, 이종족들은 놈을 그렇게 부르지.

카트발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그를 ‘해방 왕’이라 부른다던데.”

“……나 황족 아니다.”

걘 집에 있지.

“피 냄새 비슷하다고 자손이라는 뜻은 아니야. 그보단 ‘운명’에 가깝지.”

“운명?”

“그와 비슷한 업적을 이룬다든가, 아니면 더한…….”

“그렇게 운명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런 데 노예로 잡혀 계시나?”

말이 끊긴 카트발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다 좋은데 아무리 급해도 아부가 너무 심하잖아. 나는 방법 생기면 바로 여기 뜰 생각뿐, 업적 같은 건 관심 밖이다.

“……이 또한 운명인 거겠지.”

“아, 그러셔.”

기본적으로 나는 운명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도 그랬는데, 여기 오고 더해졌다.

내가 여기 있는 게 빌어먹을 운명 탓 같아서.

그러니 나가는 말이 퉁명스러워질 수밖에.

“그럼 고생하고. 좋은 주인님 만날 운명이길 빌게.”

“자, 잠깐! 나를 살 생각 아니었어?”

“그런 생각 없었는데?”

카트발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불쌍하지도 않아?”

“지 입으로 말하긴. 50 넘었으면서.”

“인간 나이론 15살도 안 됐다며!”

“그딴 게 어딨냐? 50년 살았으면 50살 처먹은 거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카트발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녀석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뒤돌아봤다.

“왜 이리 운명에 순응 못 하고 구질구질하게 굴어?”

“원하는 게 뭐야?”

“네가 운명에 순응하는 거.”

“……그러지 말고.”

반쯤 울상인 모습으로 카트발이 말했다.

내용물이야 어쨌든, 생긴 건 꼬맹이 모습이니 불쌍하긴 하다. 결국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나라고 너 사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야.”

“그럼?”

“돈이 없어.”

‘고가치 상품’이 괜히 ‘고가치’가 아니다.

그만큼 비싸니까 각인까지 박아 넣지. 게다가 6성급도 아닌 7성급 각인. 경매로 사려면 수천 골드는 필요할 거다.

전 재산 투자하면 가능은 하겠지만, 문제는 여기 온 이유가 따로 있다는 점이다.

최상급 불의 속성석.

분명 설정대로라면 나온다.

내 마력에 순도 높은 불꽃을 피워 줄 물건. 그거 사고 나면 나도 돈이 부족할 거다.

“그런 이유로 안녕.”

“기다려!”

“또 왜.”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한 거 같은데.

내 얼굴에 깃든 짜증을 엿본 건지, 카트발이 간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풀어 주면 혈류석 줄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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