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36화 (36/225)

너의 코드가 보여 (36)

넣을 재료들을 차례대로 배치했다.

은은한 황금빛 기린석. 끈적이는 액체를 내뿜는 접착초. 식물이면서 혼자 움직이는 괴뢰꽃 등등.

하나같이 본 적 없는 소재들이다.

하긴, 내가 뭔들 직접 봤겠냐마는.

하지만 전부 내가 상상하고 그림까지 그렸던 아이템이다. 실물은 처음이지만, 알아보긴 쉬웠다.

기린석을 들어 맨손으로 꽉 쥐었다.

까드득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부서진다. 같은 일을 몇 번 반복하니 입자가 가루에 가깝게 변했다.

내 생전 돌멩이 먹겠다고 가루를 낼 줄이야.

그것도 맨손으로. 상상도 못 했네.

대충 가루를 모으고, 접착초의 줄기 부분을 쥐어짰다. 거기서 나온 액체를 가루에 발라 동글동글 뭉쳤다.

완성하고 보니 노란 경단 같다.

그 옆에 괴뢰 꽃을 놓았다.

꿈틀거리며 움직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춤이라도 추는 것 같다.

“…….”

응원 같은 건가?

웃기지만 괴뢰 꽃 용도는 저게 끝이다.

내가 넣었지만, 무슨 생각으로 넣은 설정인지 모르겠네.

어쨌든 레시피에 적힌 이상, 하긴 해야지.

나중에 응원 못 받고 기운 딸려 실패했다 하면 뒤져 버릴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로.

열심히 치어리딩하는 괴뢰 꽃을 두고 냄비에 물을 끓였다.

드디어 대망의 영멸초.

과감하게 상자를 열어 재빨리 끓는 물 속에 넣었다. 마나에 노출되는 1초의 시간마저 아까웠다.

거기까지 끝내고, 차분히 앉아 앞을 바라봤다.

“…….”

노란 경단 옆에서 춤추듯 움직이는 꽃 한 송이와 파랗게 발광하는 냄비 속 물. 여기에서 본 광경 중 제일 초현실적이다.

사람이 날아다니며 마법 쓸 때는 오히려 별생각 안 들었는데…….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라.

“냄새까지 판타지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냄새.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그냥 이상한 냄새.

썩은 계란국에 장미와 오트밀을 갈아 넣어 끓이면 비슷한 냄새가 날 거 같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후우…….”

아무튼, 이 정도면 준비는 대강 끝났다.

남은 건 잡다한 재료들을 일정한 비율로 조합하는 것뿐.

부술 건 부수고, 짤 건 짜고, 갈 건 갈았다.

모두 맨손으로.

계량컵을 준비해 놨기 때문에 섞일 염려도 없었다.

곧이어 그걸 전부 섞고, 영멸초가 끓고 있는 물에 넣었다.

치이익.

엄청난 거품이 올라온다.

……이거 진짜 먹어도 괜찮은 건가?

제조법 대로긴 한데, 따지고 보면 돌가루를 처먹는 거잖아.

거기에 이상한 식물을 곁들인.

정말 이상하지만 별수 없다. 이제 와 안 먹을 것도 아니고. 열심히 춤추는 괴뢰 꽃을 치우고, 경단을 끓는 물 속에 넣었다.

부글부글 끓던 물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폭풍 전의 고요.

잠시 뒤, 엄청난 속도로 파란빛 물이 경단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 정도 속도냐면, 잠깐 눈 감았다 뜬 사이에 액체가 전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다.

진짜 판타지 같네. 판타지지만.

노랗던 경단은 이제 무지개색으로 빛나고 있다.

“…….”

진짜 먹기 싫게 생겼다.

탈 나도 갈 병원 없는데.

두 눈 꼭 감고 무지갯빛 경단을 들어 올렸다.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무로 돌아가는 걸까. 먹기 전에 유서 써 두는 편이 좋을지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경단이 입에 침투한 뒤였다.

“오묘한 맛이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적어도 돌가루 씹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보단 젤리 같은 질감에 가까웠다.

그래서 기분이 더 엿 같았다.

그런 식감 날 재료가 없었을 텐데…….

억지로 꿀꺽 삼켰다. 별 느낌 없다. 그릇을 만든 것뿐이니 당연하긴 한데……. 성공한 게 맞긴 한가?

확인차 거울 앞에 섰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모습의 소년이 비친다.

이 얼굴도 슬슬 적응해야 하는데. 본판에 비해 워낙 잘생겨서 그런가. 영 실감이 안 나네.

내 얼굴 빨려고 거울 앞에 선 건 아니다.

거울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SK-1-4]

혼원체(S+)

―모든 기운을 근원의 힘으로 치환한다.

등급에 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짧은 설명.

하지만 실망하진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저 한 줄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으니까.

* * *

“평민. 경매장에 간다고 했나?”

“그래. 오늘 열리지?”

“맞긴 하다만…….”

자이어 테르베로츠가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 건가?”

“주최가 너희 노블레스잖아. 편하게 보고 싶으니 귀빈석에 안내 좀 해 줘.”

“……너무 당당하니 되려 할 말이 없군.”

그러더니 푹 한숨을 내쉬었다. 땅 꺼지겠네. 그 모습을 일별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노블레스 거리.

이곳에서 제일 레이튼 다우면서 레이튼 답지 않은 곳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전쟁 이전 제국 수도 모습 그대로면서, 전쟁 이후 몰락한 모습과는 동떨어졌다는 뜻이다.

귀족들이 살던 거리를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수리한 건데, 둘러보면 돈 지랄이란 지랄은 다 했구나, 딱 느낄 수 있었다.

일단 바닥이 황금색으로 빛나는데, 내가 영약 만들 때 사용했던 기린석을 깔았기 때문이다.

상당히 비싼 재룐데, 그걸 바닥에 깔아 버린 건 전 대륙에서 여기뿐이다.

솔직히 영약 만들기 전에 조금 고민했다.

그냥 여기 바닥 조금 떼어다 쓸까 하고.

남이 밟고 다니던 걸 먹을 자신이 없어 포기했지만.

“겨우 경매 좀 편히 보겠다고 나를 부른 건가? 나는 너와 달리 바쁜 몸이다.”

“네가 뭘 하는데 바빠?”

“수련이다.”

“네가 무슨 수련?”

개소리한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게임에서도 꽤 노력하는 놈이었다. 재능도 있고. 주변이 워낙 괴수 천지라 묻힌 거지.

“무슨 수련?”

“당연히 마력 수련 말고 더 있나? 이상한 소릴 하는군.”

하긴 신체 단련하진 않겠지.

운동 극혐하는 세계니까.

그 이상은 별 관심 없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려는데, 자이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평민은 모를 수도 있겠군.”

“무슨 뜻이야?”

“마력 패스. 30도 안 나오지 않았나.”

그 말에 한참을 생각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160 몇이었던 거 같은데. 차이가 너무 나지 않나? 그러다 생각이 났다.

87 나왔다고 신난 것 같길래 대충 넘겼었지 참.

솔직히 말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믿지도 않을 테고, 꼬맹이한테 뻐겨서 뭐 하겠나.

“뭐 그렇긴 한데.”

“그 정도면 마력 쌓을 시간에 신체 단련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어차피 마력 수련해도 대성하지 못할 거 아닌가? 평생 아랫물에 머물겠지.”

“그러게 말이다, 개새끼야.”

“아니, 사람이 걱정해서 말했는데 왜 욕을 하나? 그게 평민들의 예절인가?”

얜 진짜 자기 문제점을 모르는 건가?

“넌 어디 가면 아가리 다물고 있는 게 낫지 않겠냐?”

“평민이 할 말은 아니군. 말을 곱게 쓰는 게 좋을 거 같다.”

“곱게 싸가지 없는 것보단 그냥 대놓고 말하는 게 낫지.”

“내가 말하는 게 그렇다는 말인가?”

“뭐가 잘못인지 모르겠으면 말하기 전에 속으로 질문해 봐. 내가 지금 아가릴 놀려도 될까요? 하고.”

자이어가 눈을 감았다.

진짜 고민하는 모양이다. 정말 다행이다. 이걸로 여기저기 어그로 끄는 일은 막을 수 있겠군.

“질문했다.”

“그래. 뭐라디?”

“내겐 문제가 없다는군.”

“그럼 그냥 그러고 살아라.”

“그러지.”

이 정도면 그냥 천성이다.

잘못된 걸 알아야 고치지, 본인이 멀쩡하다는데 어떻게 고치나?

“어쨌든, 진짜 부탁은 따로 있어.”

“뭔가?”

“비밀 경매 있지? 나도 거기 좀 들어가자.”

일명 VIP 전용 경매.

개나 소나 참여하는 일반 경매와 달리, 노블레스만 참여할 수 있다. 진귀한 물건은 지들끼리 꿀꺽하겠다는 심산이다.

내가 못 들어가면 꼽지만, 들어갈 땐 당연한 권리 같은 프리미엄 서비스.

“그건 또 어떻게…….”

“내가 귀가 좀 밝아서.”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모르던 암살 계획을 먼저 알고 있었지. 혹시 평민들의 비밀 결사 같은 건가?”

“소설을 너무 봤네.”

아무래도 제리스 영향 같은데.

“그게 아니면 대체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었나?”

“그건 알 거 없고, 가능한지나 말해 줘.”

“가능은 하다만…….”

녀석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뭔가 기분 나쁜데.

“그런 옷차림으론 불가능하다.”

“내 옷이 뭐.”

“정말 몰라서 묻나? 옷에 평민 전용이라고 적혀 있는데도?”

……설마 진짜 적혀 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아는데, 일단 확인부터 했다. 옷차림 지적이 음식점, 심문관에 이어 벌써 세 번째다.

솔직히 내 눈엔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지들끼리 보이는 뭔가 있나 보다.

한참을 훑어봤지만, 문제는 없었다.

깨끗하고, 평민 전용이라고 적혀 있지도 않았다.

“……경매장도 복장 따지냐?”

“경매장뿐 아니라 이 거리 어딜 가도 그렇다. 지키지 않는 자가 무식한 거지.”

“…….”

순간 음식점 ‘왕도’의 지배인이 생각났다.

그쪽은 일 성실히 잘한 거구나. 왜 그리 깐깐한 것인지 이해가 안 갔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게 순리. 병신은 나였던 모양이다.

속으로 사죄했다.

공짜 밥 맛있게 먹었습니다.

“일단 옷부터 사지. 우리 집 하인도 그렇겐 안 입을 거다.”

“……음.”

“하는 김에 머리도 다듬는 게 낫겠군. 얼른 따라오게 평민. 경매 시간 놓치고 싶지 않으면.”

도와준다는데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잠자코 녀석 뒤를 따라갔다.

* * *

“정말 훨씬 낫군.”

“비슷한 거 같은데…….”

거울을 봐도 내 눈엔 크게 달라진 거 없어 보인다. 옷이 조금 고급스러워지고, 정리 안 된 머리가 단정해진 정도?

조금 졸부 같기도 하고.

“눈이 삔 건가? 아까와 비교하면 평민과 노블레스 정도의 차이가 난다.”

“별 차이 없다는 거네.”

“정신이 나갔군.”

“어쨌든, 이제 들어갈 수 있는 거지?”

“그 정도면 나 없이도 입장 가능할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비밀 경매는 노블레스만 들어갈 수 있다.

옷 좀 바꿔 입고 머리 좀 다듬었다고 들여보내 줄 리가 있나.

“진심이다. 지금 평민은 누가 봐도 노블레스처럼 보인다.”

“입구에서 검사할 거 아니야.”

“검사하는 건 없어 보이는 놈들뿐이다.”

“…….”

“못 믿겠다면 입구까진 따라가 주지.”

“……부탁한다.”

이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나이 처먹고 부모님한테 회사 야유회 따라와 달라고 하는 느낌?

쪽팔렸지만 어쩔 수 없다. 옷 좀 갈아입었다고 사람이 그리 극적으로 변할 리가.

앞장서는 자이어의 뒤를 따라가자 곧이어 한 건물이 나왔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 건물인데, 앞에 경비가 두 명이나 서 있다.

“여기다. 그럼 나는 돌아가지.”

“잠깐. 어디 가게?”

“바래다주지 않았나. 나머진 알아서 해라.”

“통과 못 하면 같이 들어가 줘야지. 진짜 중요한 물건이란 말이야.”

“정말 끈질기군. 걱정할 거 없다지 않았나.”

“걱정이 안 되게 생겼냐? 끝날 때까지 옆에 좀 있어 줘.”

“……하아.”

자이어가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시X 자존심 상해.

하지만 지금 자존심은 뒷전이다. 안 보는 새 도망갈까 봐 자이어를 힐끔거리며 경비에게 다가갔다.

“……왜 여기 있어요?”

“……저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만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왕도’에서 나 입구 컷 냈던 문지기다. 아마 짤리고 여기 왔나 본데, 이 새끼 재취업 왜 이리 빨라.

“……저 몰라요?”

“처음 뵙습니다만…….”

“…….”

눈이 삐었나?

어떻게 보면 내가 해고의 원인인데. 그보다 ‘왕도’ 갔을 때와는 대우가 너무 다르다.

진짜 그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믿기지 않아 우물쭈물하는데, 상대가 먼저 덤덤히 입을 열었다.

“비밀 경매에 참여하러 오신 겁니까?”

“……그런데요.”

“환영합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그러더니 정중히 문까지 열어 준다.

……이거 들어가도 되는 건가? 함정 같은데.

바이론한테 세뇌당한 거 아니야? 불안해져서 자이어 쪽을 힐끗 봤는데, 없다.

개새끼.

“……뭔가 필요하신 거라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망설여 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다. 크게 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쿵.

문이 닫히자마자 주위를 경계했다.

올 테면 와라.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습격은 없었다.

닫힌 문을 보며 황망히 중얼거렸다.

“이게 뭔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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