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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35화 (35/225)

너의 코드가 보여 (35)

레이튼에도 아침은 온다. 그리고 아침에 가장 기대되는 건 택배 서비스. 사실 그딴 건 없지만, 비슷한 게 오긴 했다.

“테르베로츠님이 보낸 물품들입니다.”

그러더니 마부가 물건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거의 산더미 같다. 뭐야.

“제가 요구한 건 영멸초 뿐인데요.”

“사죄의 뜻입니다. 부담 갖지 말고 받으시지요.”

더 부담스럽잖아.

그 양반이 보낸 건 받기 찜찜한데. 내심 빚으로 달고 있을 거 같아서.

“테르베로츠님께서 전하시길, 어떤 의도도 없으니 마음 편히 받으라 하셨습니다.”

“대가 없는 호의가 제일 무섭다고 했지요.”

“또 그만큼 단 법이지요.”

마부가 웃으며 말했다.

약간 허름한 정장에, 얼굴에 깃든 주름살. 손의 굳은살.

정말 감쪽같은데?

코드만 안 보였으면 진짜 마부인 줄 알겠다.

“대단하신 분이 손수 마차까지 끌고 오시니 더 부담되는군요.”

“하하 대단은요.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그냥 마부…….”

“제리스 경, 맞죠? 노블레스의 검이라 불리는. 그런 분이 직접 배달한 물건이라 먹다 체할까 지레 걱정부터 듭니다.”

마부. 아니, 제리스가 표정을 굳혔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노려보며 하는 말에 빙긋 웃었다.

“전에 말씀드렸었지요. 냄새.”

“헛소리. 전과는 다르다. 이제는 기척뿐 아니라, 냄새를 지우는 법까지 익혔지.”

“그게 문제입니다. 아무리 신경 써 관리한다 해도, 마부가 아무 냄새 없는 게 말이 됩니까?”

그에 제리스가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까지 반응하면 미안한데.

솔직히 냄새야 아무래도 좋다. 그냥 코드 보고 눈치챈 거지, 마부한테 말똥 냄새나든 개똥 냄새나든 알 게 뭔가? 대충 끼워 맞췄을 뿐이다.

멍하니 생각에 빠진 녀석을 두고 물건들을 살폈다.

[IT-C-344]

[IT-D-1476]

[IT-E-2123]

아이템 C, D, E 등급.

이것저것 많은데, 쓸 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이 무슨 재고 처리. 잡템 떠넘기고 생색내려는 속내가 훤히 보였다.

이런 건 안 받느니만 못하다.

한참을 뒤지고 나서야 내가 찾던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IT-S-12]

영멸초.

고급스런 보관함에 들어 있는데, 내 눈에는 저것도 허접해 보인다. 용도를 알면 저딴 데 보관할 생각은 못 할 텐데. 하긴, 알았으면 나한테 줄 생각도 안 했겠구나.

조심스레 상자를 들어 올렸다.

좀 세게 쥔다고 깨질 보관함은 아니지만, 그만큼 중요하니까.

“원래 받기로 했던 물건만 받겠습니다.”

“그건 또 어떻게…….”

정신 차린 놈이 상자를 보며 황망히 중얼거렸다.

“제가 눈썰미가 좀 좋아서요.”

“아니, 내용물은 보지도 못했잖은가.”

갑자기 말투가 정중해진 기분인데.

“아무나 눈치채는 거면 눈썰미 좋다 말했겠어요?”

“……납득하기 힘드네만.”

“납득 시킬 생각 없으니 상관없죠.”

상자를 품속에 소중히 넣고 몸을 돌렸다.

“테이어님한텐 마음도 안 받겠다고 전해 주세요. 혹시라도 놓고 가진 마시고요. 전부 처분할 거니까.”

“자, 잠깐!”

“또 뭔데요?”

귀찮은 기색을 내비치자, 제리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이거라도 받아 주게. 깨달음을 준 대가일세.”

“……깨달음? 무슨 무협 소설 읽어요?”

“흐, 흠. 그냥 조금 즐기는 정돌세.”

뭐 하는 새끼지 이거.

생각해 보니 은신, 변장. 전부 동대륙 배경에 나오는 얘기였다. 벨리아 대륙에선 찾아보기 힘든 기행인데.

“놀랍지 않은가?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검에서 검기를 내뿜고!”

“……그거 여기 사람들도 전부 할 수 있잖습니까.”

“낭만이 없잖은가 낭만이! 마법이니 마력이니, 전부 겁쟁이들의 전유물일 뿐이야!”

“……아, 예.”

“게다가 부적술은 또 어떤가? 흩날리는 부적! 파도치는 물결! 일렁이는 불꽃! 이곳에선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지. 언젠가 단 한 번만이라도 직접 보는 게 내 유일한 소망일세.”

“……그렇습니까?”

일단 타냐랑 못 만나게 해야 한다는 건 알겠다.

“어쨌든, 물건은 받을 생각 없으니 그냥 돌아가세요.”

“기다려 보게. 여기 있는 물건을 주려는 것이 아니니.”

“그럼 뭘 주겠다는 말입니까?”

“이걸세.”

뭔지나 보자 싶어 손을 내미니 제리스가 그 위에 턱 하니 뭔가를 올려놓았다.

“……이 낡아빠진 책은 뭐에요?”

“어허, 낡아빠졌다니! 함부로 말하지 말게! 내 오래전 간신히 구한 절대 비급이니.”

“……절대 비급이요?”

책을 내려다봤다.

코드가 뜨지 않는다. 등급 매기기도 하찮은 물건이란 소린가? 아니, 단순히 코드를 안 매겼을 수도 있긴 한데…….

“어디서 구한 건데요?”

“10년 전 시장일세.”

“읽어는 봤어요?”

“노력은 했지만…… 동대륙 언어를 몰라 읽을 수 없더군. 아는 사람도 찾지 못했고,”

“……얼마 주고 샀는데요?”

“놀라지 말게. 절대 비급이 단돈 1골드! 나와는 연이 닿지 않아 여태 쓸모가 없었지만…… 아무래도 자네와 만날 운명이었던 것 같군.”

“…….”

이 새끼, 사기당한 거잖아.

나는 안쓰러운 눈으로 제리스를 바라봤다.

자이어도 그렇고, 저 녀석도 그렇고. 노블레스에 무슨 마가 꼈나? 왜 하나같이 저 모양이지.

책을 툭툭 털어 제리스에게 건넸다. 별로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소중한 책을 제가 받긴 너무 과분한 것 같군요.”

“사양치 말게. 자네가 준 깨달음이 그만큼 굉장했으니까.”

대체 무슨 깨달음?

“주변 환경과 동화해라. 정말 상상도 못 했네. 단순히 기척 죽이는 것만이 전부라 생각했지.”

냄새가 안 난다 했을 뿐이다.

“게다가 변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베끼라니. 이 또한 처음 듣는 소릴세.”

그런 말 한 적 없다.

이 아저씨,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더니, 정신이 나간 거 아닌가?

상상의 나와 대화한 거 같은데.

더 늦었다가는 꼼짝없이 받는 그림이 될 거 같았다. 억지로라도 책을 돌려주려는 순간, 제리스가 몸을 돌렸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

뭐지? 적인가?

바이론한테 빅 엿을 날렸으니 언제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뭔데?

다시 제리스를 바라보니, 놈은 그 얼굴 그대로 걸었다. 마차로.

“……그만 돌아가겠다.”

절도 있게 올라타더니, 굳이 그늘진 곳에 앉는다. 별로 덥지도 않은데.

“……오늘 본 모습은 잊어라. 어둠을 두려워하고 싶지 않다면.”

또각또각.

멀어지는 마차와 널브러진 물건들을 바라보며 나는 멍하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뭔데 시X…….”

* * *

“저게 다 뭐야?”

“신경 쓰지 마요. 다 버릴 거니까.”

“아니, 멀쩡한 물건을 왜 버려? 그럴 거면 나 줘!”

“그럴래요?”

순순히 넘기자 다린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먹으면 체하는 물건이다.

버리기도 귀찮았는데, 알아서 처리해 주면 나야 좋지.

“……혹시 독극물이야?”

“절 뭘로 보시는 거예요?”

어이가 없네.

“근데 왜 이리 순순히 줘?”

“싫음 말아요. 버릴 거니까.”

“누가 안 받는대?”

다린이 황급히 물건들을 쓸어 모았다.

궁상맞아 보인다. 그런 생각에 조금 미안해졌다. 여태 신세 많이 졌는데 이럼 안 되지.

나도 옆으로 다가가 물건을 따라 주웠다.

한참을 움직이고 나서야 전부 모을 수 있었다.

양 하나는 진심이네.

“근데 이걸 전부 어디에 쓰게요?”

“연구 관련된 건 내가 쓰고, 관련 없는 건 팔아서 연구 물품 살 거야.”

또 그쪽인가.

열정 하나는 알아줘야겠다. 재능까지는 모르겠지만.

“만들고 있다는 건 잘 돼 가요?”

“흐흐흐…….”

“……뭐예요?”

기분 나쁘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천재인 것 같아. 처음부터 전투 마법사는 내 길이 아니었던 거지.”

“잘돼 가나 봐요?”

“그 정도가 아니야!”

다린이 모아 놨던 물건들을 흩뿌리며 일어났다. 다시 담기 귀찮은데…….

“첫 작이 최고 역작이라는 말, 들어 봤어?”

“아니요.”

첫 끗발이 개끗발이란 말은 아는데.

“완성만 되면 온 대륙의 마법사가 내 이름을 외치고 다닐걸? 다린 님! 다린 님! 하고.”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리 말했지만 별로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다. 다린을 외치며 행진하는 마법사들이라니, 디스토피아 같은 거 아닌가?

사이비 종교에 잠식당한 벨리아 대륙.

구호는 연구의, 연구에 의한, 연구를 위한. 이계 침략에 먹히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기대해. 완성되면 너한테도 도움 될 거거든.”

“대체 뭘 만드는 건데요?”

“비밀이라고 했잖아.”

“대강이라도요.”

“싫은데!”

“…….”

주먹이 운다. 참자. 참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어릴 때부터 배우지 않았나. 져 주는 게 이기는 거라고.

그래.

릴랙스…… 릴랙스…… 발, 져 주는 게 왜 이기는 거야, 그냥 쳐 발린 거지.

“……완성되면 알려 줘요.”

하지만 참았다.

저걸 이겨서 뭐 하겠나. 내 정신연령만 떨어지지.

이겨도 병신 져도 병신이면 승리한 병신이 되라 하지만, 수준이 맞을 때의 얘기다.

초딩 상대로 이긴 병신은 진 병신만 못하다.

그래서 답은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스트레스만 받을 거 같아서. 영멸초 정제나 해야지.

상자를 조심히 껴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툭.

“시X 뭐야.”

안에 들어서자 품속에서 아까 받았던 책이 떨어졌다.

분명 잡템 사이에 섞어 버렸는데 이게 왜 여깄어? 아까 다린이 일어나며 물건 흩뿌릴 때 들어갔나?

책을 조심히 들어 구석에 던져 버렸다.

뭔가 오염될 거 같아서.

책 쪽을 일별하고 상자를 내려놓았다.

잘 될까. 망치면 또 언제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만드는 과정은 전부 꿰고 있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만큼 귀한 재료니까.

간단히 심호흡했다.

살다 보니 느낀 건데, 될까 안 될까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된다 생각하는 게 더 도움 되더라.

속으로 마인드 컨트롤하며 재료들을 늘어놨다.

이번에 만들 것은 그릇.

몸이 마력 속성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간에겐 불가능한 영역.

마력은 오직 존재할 뿐이다. 절대 변하지 않는 순수한 힘. 이게 현재 널리 퍼져 있는 이론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인간뿐 아니라, 어떤 종족도 마력에 속성을 부여하지는 못하니까.

아니, 사실이라고 해야겠다.

영멸초의 영약도 정확히 말하면 마력에 속성을 부여하는 건 아니니까.

영멸초.

자라고 3일 만에 사라진다고 붙은 이름이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마나에 동화되었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극히 높은 마나 친화력!

그것이 사람들이 모르는 영멸초의 능력이었다.

혹시나 알아차려도 별 소용없다.

마나에 동화되는데 뭐 어쩌라고? 어차피 널린 게 마난데.

대기의 마나를 몸에 쌓는 게 마력이지만, 둘의 성질은 전혀 다르다.

마나는 마력과 달리 속성 변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속성 마법이 주를 이루지 않던가.

화염 마법, 바람 마법 등등.

‘공백의 시대’에 만들어진 제조법은 영멸초가 마나에 동화하려는 성질을 이용한다.

신체에 쌓이는 마력을 마나로 동화시키는 것!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영멸초를 삼키면 그냥 소화되고 말 뿐이니까.

수많은 시도가 실행됐지만, 실제 그 끝에 만들어진 제조법은 실패였다.

아니, 예상과 전혀 달랐다고 해야 하나.

학자들이 바란 건 마력을 마나로 바꾸는 것이었는데, 나온 결과물은 전혀 달랐으니까.

마나와 마력의 성질을 모두 갖는 새로운 힘.

‘공백의 시대’ 사람들이 부르길, ‘진정한 근원’.

“혼원력.”

그것이 내가 얻을 힘의 이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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