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34화 (34/225)

너의 코드가 보여 (34)

챙.

검 뽑히는 소리.

놈이 내 말을 듣자마자 검을 꺼내 든 것이다.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차이점이라면 이번엔 주교의 제재가 없다.

슬쩍 보니 주교가 굳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인 모양인데, 이건 예상외다. 호감도 꽤 쌓았고, 어느 정도 열려 있는 편이라 생각했거늘.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순식간에 정색할 줄도 몰랐다.

뭐, 다짜고짜 공격할 낌새는 아니니 됐나.

“신성모독이다!”

심문관이 내게 검을 겨눴다.

“버러지가 기어코 선을 넘는구나!”

“그거, 그쪽한테 들으니 웃기네요.”

“닥쳐라!”

깜짝이야. 목소리 겁나 크네. 귀청 떨어질 뻔.

진짜 걱정돼서 손가락으로 후벼 보는데, 무시라 생각한 건지 녀석이 흥분했다. 왜 그리 생각했냐면, 놈 주위를 마력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SK-3-27]

전사의 돌진 기술.

순식간에 자세를 잡은 녀석이 앞으로 솟구쳤다.

아니, 사실 모르겠다.

내 눈에는 자세 잡는 순간 사라지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으니까.

지금 수준으론 피하는 게 불가능한 속도.

물론,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의 얘기다. 나는 바로 옆으로 몸을 피했다.

쉬이익.

검이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마력까지 둘려 있네. 늦게 반응했으면 진짜 뒤졌겠는데.

“……마력도 없는 놈이 어떻게?”

돌아보니 놈이 입을 벌린 채 경악하고 있었다.

애새끼 상대로 기습해 놓고 할 말이 저것뿐인가?

“하도 느려서 다 보이던데. 그보다, 본인도 추잡하단 생각 안 들어요?”

“뭐, 뭐?”

“그렇잖아요? 마력도 없는 상대를 기습이라니. 심문관이라면서 긍지도 없나?”

기사도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런 건 상식 밖의 일이다. 모욕이라고 느꼈으면 당당히 결투 신청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말도 없이 공격하는 건, 여기 기준으로도 선 넘었다.

행동이 아가리 신중함의 절반만 따라왔어도 이런 일 없었을 텐데.

이런 문제로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놈을 향해 태연히 입을 열었다.

“게다가, 저는 신성 모독한 기억은 없는데요.”

내 말에 녀석이 정신을 차리고 나를 노려봤다.

“신성 마법을 의심한다는 건, 키탄님을 의심한 것과 같다.”

“그건 아니죠. 키탄님이 힘을 빌려주시는 건 맞지만, 결국 그걸 쓰는 건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을 선택한 것도 키탄님이시다.”

X소리를 예술로 승화시키네.

“좋겠네요. 그쪽은.”

“……무슨 뜻이냐.”

피식 웃은 다음 말을 이었다.

“능력 딸려도 신 핑계 대면 끝이고. 얼마나 편해요?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네놈이 정녕…….”

놈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나도 당할 수만은 없지. 도움이 될 코드를 생각하는데, 내 주위를 무언가 둘러쌌다.

신성보호막.

주교는 아니다. 정면에 있는데, 뭔가 하는 낌새는 없었다.

“적당히 해요. 마력도 없는 사람한테 뭐 하는 거예요?”

아리나다.

견습 주제에 끼어들지 말라는 심문관과 말싸움하는데, 그 모습을 무시하고 보호막을 확인했다.

단단하고, 정교하다.

전에도 느꼈지만, 아무리 봐도 견습 실력은 아닌데…….

단단하고, 정교하다.

신성력의 양도, 신성 마법의 질도 흠잡을 곳 없는 수준. 어지간한 신관보다 나은 정도가 아니라, 그 위. 대사제급이래도 믿겠다.

새싹부터 다르다던가.

재능 있다는 설정은 넣었지만, 상상 이상인데.

힐끗.

주교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개입 없이 보고만 있는데, 역시 신성모독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받아들이긴 힘들겠지. 평생을 그리 살아왔을 테니까.

어쩔 수 없지.

원래는 주교에게 부탁할 생각이었지만, 저 정도면 아리나한테 시켜도 되겠다.

“간단히 증명하면 끝날 일이죠. 신패 내려놔 봐요.”

“네놈이 뭔데 명령을…….”

“내려놔 주실래요?”

“…….”

그제야 놈이 말없이 패를 내려놓았다. 하여간 찌질한 새끼.

“다시 한번 신성 마법으로 확인해 봐요.”

녀석이 다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의외로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이유야 어쨌든, 이러면 나도 편하지.

심문관이 신패에 손을 뻗고, 주문을 중얼거렸다. 신성력이 겉으로 드러나는 수준은 아니다.

코드도 안 보이고.

배부른 소리겠지만, 다른 건 다 보이는 입장에서 불편한데.

곧이어 신패에서 삐 소리와 함께 파란 빛이 떠올랐다.

“다시 확인해도 똑같다. 이건 진품이 확실해.”

의기양양 지껄이는데, 예상했던 일이다.

개의치 않고 아리나에게 손짓했다.

“너도 와서 써 봐.”

“저요?”

“응.”

태연히 고개 끄덕이자, 아리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그거 배운 적 없는데…….”

“어려운 마법도 아니니 대충 외워 봐.”

“……되게 쉽게 말하시네. 신성 마법 알아요?”

너보다 잘 알걸.

견습이 쓸 수준은 아니지만, 얘 정도 재능이면 바로 사용 가능할 거다.

대충 정식 신관이면 다 쓸 수 있으니까.

우리 모습을 보던 심문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견습에게 검증을 시키려는 건가?”

“그런데요.”

“어이가 없군. 그게 얼마나 어려운 줄…….”

“어차피 키탄님이 사람 고르는 거라면서요? 그럼 문제 될 거 없죠. 마법이 써지든가, 안 써지든가 둘 중 하나일 테니.”

녀석은 인상 구기면서도 아무 말 못 했다.

지가 한 말을 반박하진 못하겠지. 아가리 조심히 놀려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자승자박. 본인 말에 본인이 묶이니까.

망설이는 아리나를 재촉하자, 녀석이 잠깐 멈칫하더니, 결국 한숨 쉬며 주문을 외웠다.

“내 앞에 진실만 있으리.”

그 순간.

희미하지만 아리나의 손끝에서 흰빛이 보였다.

신성력 발광. 미친. 대사제급한테나 가능한 게 왜 쟤한테 나와?

심문관한테도 안 보이던 게.

대사제래도 믿겠다가 아니라, 진짜 벌써 대사제급이었나?

황급히 주교와 심문관을 살펴봤다.

눈치챈 기색은 아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좋은 인상 정도만 남길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말도 안 되는 재능. 쟨 내 거야.

그때, 삐 소리와 함께 신패에서 붉은빛이 떠올랐다.

가짜.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특히 심문관의 표정이.

“그, 그럴 리 없다! 견습이 주제에 안 맞는 신성 마법을 쓰니 이러는 거 아닌가!”

“발동이 안 되면 몰라도, 발동된 이상 그건 완벽한 신성 마법이에요. 설마 키탄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겠죠?”

싸늘히 말하자 놈이 당황했다.

“하지만 말이 안 된다! 그 논리라면 모순밖에 안 남아! 내 마법엔 진짜라 나오지 않았나!”

“키탄님이 틀렸을 리는 없으니, 답은 하나뿐이네요.”

태연히 하품하며 말했다.

유물 받고 퉁 쳐 줄 생각이었는데, 저 새낀 안 되겠어. 참교육 한 번 씨게 당해 봐야 정신 차리지.

“그쪽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소리죠.”

“무, 무슨!”

이젠 안색이 하얗다 못해 노란 지경까지 왔다.

“내가 왜 그런 짓을! 아니, 애초에 그건 불가능하다! 두 마법 모두 정상적으로 발동됐어!”

“있잖아요. 빛을 내뿜는 신성 마법.”

“그, 그걸 어떻게…….”

빛을 내뿜는 신성 마법. 진짜 별거 아니다.

라이트로도 못 쓰고, 잠깐 희미한 불빛을 내는 게 전부. 장점이라곤 색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뿐인, 그런 시시한 마법. 그런 만큼 오히려 아는 사람이 적다.

주교나 아리나도 처음 듣는 내용일 것이다.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과연 엘리트네요. 아무도 눈치 못 채게 그런 짓을 벌이다니.”

“아, 아니야. 내가 왜 그런…….”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본인이 아시겠지.”

눈치는 빠르다.

위험한 상황이란 걸 직감했는지, 놈이 절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진작 아가리 조심했으면 나도 이럴 생각 없었는데.

녀석이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래! 소리! 그 마법으로 소리를 내는 건 불가능해!”

삐 소리를 말하는 거다.

저 상태에서도 예리한데. 하긴, 기본 베이스가 있으니까.

“내기에 걸린 유물.”

“그게 뭐…….”

말하다 눈치챘는지, 아니면 내가 알 거라 믿기 싫은 건지 놈이 뒷말을 삼켰다.

안됐지만, 나는 저 유물에 대해서 샅샅이 알고 있다. 치명적인 공격을 하루 한 번 막아 주고, 그렇게 발동하거나 사용자가 원할 때 삐 소리를 낸다는 것까지 전부.

주머니에서 작은 흑철석 더미를 꺼내 들었다. 얼마 전부터 챙기고 다니는 내 원거리 무기다.

제정신일 땐 맞추기 불가능하겠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팔을 힘껏 뒤로 제치고, 놈을 향해 던졌다.

삐.

멍한 표정의 녀석 근처에 얇은 막이 형성되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맑고 고운 소리.

반쯤 혼 나간 얼굴로 무릎 꿇는 녀석을 보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일어나요. 제 유물에 먼지 묻잖아요.”

* * *

심문관은 주교의 손에 끌려갔다.

아마 배교 혐의 받고 처형당하지 않을까. 빽이나 실적 있으면 목숨은 건질 수도 있고.

유물까지 받은 거 보면 실적은 꽤 됐을 텐데……. 어쩌면 살아남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이젠 내 손을 떠난 일이다.

관심도 없고. 놈이야 뒤지든 말든 뭔 상관.

바이론의 세뇌에 당했다 해도 본인 마음 안 움직이면 그럴 일 없다.

완전 최면이 아니니까.

나는 속마음이야 어쨌든,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으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놈은 마력에 신성력까지 가졌다. 능력에 저항은 충분히 가능했을 터. 그런데 저 정도로 영향을 받았다는 건, 어차피 언젠가 행동 벌였을 녀석이란 뜻이다.

싹을 미리 뽑았으니 오히려 좋은 일이지.

어찌 됐든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신경 끄고 손거울을 들어 올렸다.

내기로 받은 유물.

성능 좋고, 크기는 작아 보관이 편하다. 이만한 유물 찾기는 정말 힘들다.

개이득.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아리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저, 그쪽 종교로 옮겨도 돼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나 무교야.”

“무교가 뭐예요?”

“믿는 신이 없는 거.”

“그게 말이 돼요? 신이 얼마나 많은데.”

“그냥 그런가 보다 해.”

이해를 못 한 듯, 녀석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신이란 존재가 사도도 직접 임명하는 데다, 가끔 신도들에게 뻘소리 지껄이기도 하니까.

무교란 단어조차 없으니 말 다 했지.

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던 신과는 다르다 여길 뿐이다.

이곳의 신은…… 갑 오브 갑.

거래 관계에 가깝다. 지구에서 생각하는 절대적인 초월자와는 거리가 멀지.

녀석은 고개 갸웃거리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리안교를 창설하면 되죠. 해방왕도 신 됐다는 말이 있던데요?”

“소문뿐이지. 그 양반, 신 되지는 못했어.”

“……되게 아는 사이처럼 얘기하시네.”

“일방적으로 잘 알긴 해.”

“뭐, 동화책부터 자서전까지. 안 읽어 본 사람이 드물 테니까요.”

읽은 정도가 아니라, 두 개 전부 내가 집필한 건데. 말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리안교라…… 그딴 거 만들 생각은 절대 없지만, 저 녀석이 흥미 보이는 건 긍정적이다.

“근데 갑자기 왜 그런 소릴 하는데?”

“이미 클 만큼 큰 키탄님 신전보다 작은 곳에서 같이 으쌰으쌰 하는 것도 매력적인 거 같아서요.”

“본심은?”

“돈이요.”

그럼 그렇지. 당당하니 보기 좋다.

“미안하지만 그딴 거 만들 생각 없어.”

“아쉽네요.”

전혀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아리나가 말했다.

“리안님만 봐도 개종할 가치 있어 보였는데.”

“과대평가는 말고.”

“부끄러워하시네.”

“지랄 마.”

“마녀 탐색부터, 이번 심사까지. 벌인 게 한두 개예요? 자부심 가져도 좋아요.”

두둔하는 말이었지만, 별로 자부심이 생기진 않았다.

솔직히 설정도 다 아는 데다, 코드 능력까지 있는데 이 정도도 못 하면 나가 뒈져야지.

자기비하가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오히려 끌려다닌 느낌마저 있지. 이제 좀 적극적으로 나서도 되지 않을까.

여기도 슬슬 적응된 거 같고.

“종교는 아니어도, 뭐 만들 생각은 있어.”

“뭔데요? 용병단은 아니죠? 일에 비해 벌이가 시원찮다던데…….”

나도 그런 양아치 집단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대범하게 가야지. 자고로 어디든 내가 짱 먹는 곳이 최고인 법이다.

녀석을 보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컴퍼니.”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