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33)
“네놈이 그럴 자격은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기 좀 하는데 자격은 무슨. 쫄리면 마시든가요.”
“누가 버러지 아니랄까 봐 말투가 매우 저열하기 그지없군.”
“고상한 말투 쓴다고 고상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러면서 힐끗, 심문관을 흘겨봤다.
본인한테 하는 말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네놈이 정말 죽고 싶은가 보구나.”
“글쎄, 죽고 싶은 건 그쪽 같던데. 뭘 믿고 주교님 앞에서 깝쳐요? 바로 꼬리 말 거면서.”
말하면서 허공에 꼬리 만 강아지 그림을 그렸다. 아까 미친 개가 짖는 모습만 보인다는 말과 연관시킨 것이다.
알아들을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심문관이라 해야 하나. 바로 이해한 듯 다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버러지가…….”
제대로 열 받았는지 검을 든 손이 움찔거린다.
혹시라도 진짜 검 내려칠까 봐 긴장하는데, 거기까지 정신 나가진 않았나 보다. 조금 심호흡하더니 겉으로나마 진정된 모습을 보였다.
아니, 정신이 멀쩡해서가 아니라 옆에 있는 주교 때문이군.
놈이 힐끗힐끗 눈치 보다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내기 내용은 뭐냐.”
“뭐 지금 할 만한 게 또 있겠어요? 당연히 신패 진위 여부죠.”
“네놈은 신패가 가짜라는 거에 걸고?”
새끼, 꼼꼼하네.
정작 내기했더니 내가 신패가 진짜라는 것에 거는 걸 경계하는 거다.
본인은 분명 진짜라고 믿을 테니까.
“그쪽이나 가짜에 걸지 마세요.”
“……재밌는 소릴 하는군.”
재밌다면서 표정은 굳어 있다. 저게 놈의 웃음 표현 방식인 걸까.
“하지만 내기는 서로 대등한 물건을 내놓을 수 있을 때의 얘기다. 네놈은 뭘 걸 수 있지?”
“천 골드. 그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요.”
“……푸하하!”
심문관의 얼굴이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는 분노가 아니라, 비웃음 탓이다.
붉어졌다, 하얘졌다. 붉어졌다, 하얘졌다.
누가 보면 고혈압인 줄 알겠네.
“골드 본 적도 없을 놈이…… 천 골드? 버러지가 허언증까지 있군.”
“제가 레이튼 출신도 맞고, 고아도 맞는데 돈이 없진 않거든요.”
“큭. 그럼 나도 본 적 없는 금액을 네놈이 무슨 수로 가지고 있다는 거냐?”
지도 인류 신, 키탄의 신도면서 왜 이리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지?
돈을 얻은 경위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 대신,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건 뭐냐?”
“확인증이요.”
“……확인증?”
처음 듣는지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를 만도 하다. 이건 노블레스가 제국 멸망 이후 시행한 제도니까.
노블레스는 원래 대륙 제일을 다투던 상인 집단인데, 본거지인 제국이 망하면서 레이튼에 꽁 박혔다.
망했다는 뜻이다.
레이튼에서는 나름 어깨에 힘주고 다니지만, 대륙에 대한 통제권은 거의 잃은 상황. 조금만 보완하면 은행을 대체할 좋은 제돈데, 그런 이유로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있다.
“노블레스에서 재산을 맡아 두고 있다는 증서예요.”
“……돈을 주고 종이 쪼가리를 받았다고?”
“뭐, 그렇게 되네요.”
“정말……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멍청하군. 살면서 그런 황당한 소리는 처음 듣는다. 사기당한 자각조차 없다니.”
다시 얼굴이 붉어져선 큭큭 비웃더니, 내가 내민 종이를 가리켰다.
“게다가 천 골드? 이 정도면 멍청한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갔군. 그런 종이 쪼가리 사는 데 얼마나 들었지? 가지고 있으면 천 골드로 돌려준다던가?”
놈이 웃으며 증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딱 봐도 무시하는 게 보이는데, 사실 이해 못 할 관점은 아니다.
이게 효력을 발휘하려면 신용이 필수.
그런 점에서 노블레스를 믿을 수 있냐면…… 조금. 아니, 많이 애매하지.
나부터 인장 없이 물건 돌려받은 입장 아닌가.
큰 금액에 그런 경우는 처음이라지만, 가능하다는 점만으로도 문제가 된다.
나도 레이튼 치안 믿느니 노블레스가 낫겠다 싶은 심정에 맡긴 거지, 대안 있으면 그쪽 택했을 거다.
21세기에도 은행 파산하면 돈 잃는 판국에, 걔네 뭘 믿고?
아무튼, 내 행동은 여기 사람들 눈에 충분히 병신 같아 보일 수 있다는 소리다. 그런 사정 다 아는 판국에, 아무리 저 새끼 X같아도 미개하다며 무시할 순 없었다.
그건 내 수준을 떨어뜨리는 일이니까.
그런데 나도 사람인지라, 비아냥대지 않고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저 새끼, 어마어마하게 비호감이니까.
어찌할까 고민하는데, 옆에서 증서를 훔쳐본 아리나가 적혀 있는 숫자를 가리켰다.
들고 있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2,364 GOLD]
“저, 저거 진짜예요?”
“밑에 찍힌 인장 확인해 봐. 마법으로 찍은 거니까.”
“……부자 아니라면서요?”
“고아랬지, 돈 없다고 한 적은 없는데.”
믿기지 않는 듯 아리나가 입을 벌렸다.
보니까 쟤도 나 거지라 생각한 거 같은데, ‘왕도’ 가서 밥까지 사 줬는데도 저러다니.
……내 옷차림이 진짜 그 정돈가?
그제야 조금 자괴감이 들었다.
조금 허름하긴 해도, 나름 무난하다 생각했는데, 내 눈썰미가 중세인들보다 못하다고?
입은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아리나의 반응을 본 심문관이 표정을 굳혔다.
“이깟 종이 쪼가리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신관마저 멍청하기 짝이 없군.”
“그 소년의 말이 맞소.”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교가 끼어들었다.
“그 종이를 가져다주면 돈을 내주지. 내가 보증하오.”
“……주교님까지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이런 종이 쪼가리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돈을 내주겠습니까?”
“레이튼에선 그렇소. 내 말마저 멍청히 들린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 그럴 리가요.”
놈의 안색이 하얘졌다.
주교의 말에도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지만, 아까처럼 개길 용기는 나지 않는 모양이다.
녀석은 그 상태로 안절부절못하다, 곧이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금액을 조금 낮추지.”
“왜요? 자신 있다더니.”
“……자신과 별개의 문제다. 나는…… 그 정도의 돈이 없다.”
놈이 고개 숙여 답했다.
신중하다고 해야 하나, 추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처음부터 돈 내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엘리트래 봤자 결국 월급쟁이.
벼룩 간 빼먹어 봤자 기별도 안 가지.
“돈으로 줄 필요 없어요.”
“물건으로도 천 골드는…….”
“‘아지프의 약속’이면 충분해요.”
“그, 그걸 어떻게……?”
놈이 당황했는지 주머니를 뒤졌다.
어떻게 알긴. 보이니까 알지.
[AF-145]
아지프의 약속.
하루 한 번 치명적인 공격을 막아 주는 ‘공백의 시대’ 유물이다. 자동요격마법을 물건에 담아 뒀다고 보면 된다.
심문관 중에서도 공을 세운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건데…….
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거 하나면 천 골드 가치는 넘는다.
일단 ‘공백의 시대’ 유물이면 기본적으로 500골드는 깔고 시작한다.
언제였더라?
지금 시기보다 약 5년 전 정도에 ‘코가 먹먹할 때 시원하게 해 주는, 시원할 땐 먹먹하게 해 주는 돌멩이’라는 병신같은 유물이 500골드에 팔려 나갔었다.
그에 반해 저건 이름까지 붙은 네임드 유물. 못해도 수천 골드는 넘을 거다.
“이, 이건 안 된다. 내기 따위에 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본인 조사에 확신이 없으신가 봐. 그렇게 자신 있어 하더니.”
“그리 도발해도 소용없다. 이건 내기에 걸지 않아. 애초에 내 물건도 아니다.”
아가리도 저만큼 신중했으면 찍힐 일 없었을 텐데.
“교단에서 나갈 때 반납해야 한다.”
“알고 있어요. 그때까지 제가 대여하는 조건이면 공평할 거 같은데.”
“……잘 알고 있군. 지나칠 정도로.”
“그냥 좀 주워들은 게 있는 편이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놈이 의심하지 않도록. 괜히 뻐기다 내기 취소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대여에 천 골드 내기면 제 쪽이 훨씬 손해인데…… 싫으면 마시죠. 신전 봉급이 꽤 센가 봐. 천 골드도 마다하고.”
“……하지.”
“네? 뭐라고요?”
“하겠다고 말했다.”
내뱉듯 하는 말에 몰래 웃었다.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그 규칙에는 허점이 있다.
대여는 무슨.
유물 하나 공짜로 얻었네.
* * *
“이것이 제출된 신패다.”
확인을 위해 방을 옮기자, 놈이 품에서 조각 하나를 꺼내 들었다.
“겉에 새겨진 번호도, 안에 깃든 신성력도 전부 문제없다. 신성력을 감지나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만.”
심란한 곳을 찌르네.
저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마력 코드가 보였을 때, 당연히 신성력도 그럴 거라 생각했었으니까.
당장 신성력 감지는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파고들 건 신성력 쪽이 아니었다.
“번호도 확인해 봤어요?”
“물론. 교단에서 74번째로 제작한 신패다. 신성 마법으로 적격자임도 확인했지.”
“그럼 74번 신패를 제일 처음 받은 사람이 누군지도 알고 있어요?”
“패왕검 테오도르.”
놈이 그리 답하고는 피식, 비웃었다.
“설마 그가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나? 바이론은 패왕검이 아니라서? 주워들은 게 좀 있다더니, 결국 그 수준이군. 신패의 자격은 적격자 본인이 원한다면 언제든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다.”
비아냥대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74번. 패왕검의 신패.
게임 스토리대로다. 아무래도 설정과 달라진 점이 많다 보니, 다른 신패가 아닐까 조금 걱정했었다. 뭐든 밝혀낼 자신은 있었지만, 번거로워지니까.
“양도 가능한 건 저도 알아요.”
“그럼 가짜라는 이유가 뭐냐. 새겨진 번호도, 깃든 신성력도 전부 신성 마법으로 만든 것. 오류가 있을 리가…… 설마, 신성 마법을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놈이 표정을 굳혔다.
심지어 옆에 있던 주교도 마찬가지.
신관 앞에서 신성 마법 의심하는 건 자살행위다. 쟤들한텐 그게 신을 X으로 본다는 소리라.
지들끼린 신성력으로 등급까지 매기면서, 외부 평가는 신성모독으로 모는 내로남불 정치!
그래도 그 정도면 무난하다.
물론, 벨리아 대륙 기준으로. 적어도 신앙심의 발로 아닌가.
신관이 신앙심 가진 게 뭐가 나빠. 진짜 문제는 저기, 아리나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별 반응도 없다.
쟨 진짜 왜 신관이냐?
“대답해라. 지금, 신성 마법을 의심하는 거냐 물었다.”
딴생각에 정신 팔린 사이 놈이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강약약강 개 쩌네.
아깐 그리 신중하더니, 조금 기분 상했다고 저 지랄이다.
여태 만난 사람 중 신관 같은 건 주교뿐인 거 같은데. 주신 키탄의 신도들부터 이 모양이니 대륙이 안 망하고 배기겠나.
망하기 전에 귀환해야 하는데.
앞날 걱정에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신성 마법이 잘못됐다 말하는 거 맞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