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30)
주교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벌써 몇 번짼지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땅 꺼지겠네.
“적격자가 아니라……. 왜 그리 생각하시오?”
“네.”
적격자.
신패 사용을 허가받은 사람을 뜻한다. 신패가 도둑맞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으니까. 강도라도 훔쳐 쓰면 신전 꼴이 우스워지지 않는가.
신패가 있더라도, 사용은 인증된 사람만 가능하다는 소리다.
“적격 심사는 신패가 제출되었을 때 이미 끝났소. 그는 적격자가 맞소.”
“그 심사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오류……?”
“제출된 신패는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교가 인상을 찌푸렸다.
심사를 맡는 건 심문관의 몫. 그리고 심문관은 교단에서 고르고 고른 엘리트 인재다.
차후 주교 자리에 내정된 자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놈이 그건 틀렸다고 말하니 어이가 없겠지.
“심사에 대해서는 아는데, 심문관에 대해서는 모르시나 보군.”
“압니다. 교단의 최정예 인력들이죠.”
“이런 조사에 특화되어 있다는 것도 아시오?”
“물론입니다.”
“……허면, 신패를 직접 보았소?”
혹시나 싶은 눈으로 주교가 나를 바라봤다.
마녀를 찾은 성과에 기대하나 본데, 내가 신패 볼 일이 뭐가 있나?
“없습니다.”
“…….”
나를 바라보는 주교의 눈빛에 실망이 서렸다. 입만 산 후배 놈 보던 내 표정이 저랬을 거 같다.
생각보다 상천데.
후배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 새낀 욕먹을 만했어.
“미안하지만, 솔직히 무슨 생각으로 말하는지 모르겠구려. 아무 근거 없이 심문관을 비방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소. 이번은 넘어갈 테니 다른 곳에선 얘기하지 마시오.”
“신패는 보지 못했지만, 바이론에 대해서는 조금 압니다.”
“신패를 제출한 자 말이오?”
주교가 둥그러진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자에 대해 신전에서도 조사했소. 듣도 보도 못한 자니까. 신패의 적격자는 그자가 확실하오.”
“그 정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겁니다.”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 신패는 가짜입니다.”
“…….”
주교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옆에 있던 아리나가 입을 열었다.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한 번 믿어 보는 건 어때요? 어차피 손해 볼 것도 없잖아요.”
“이미 끝난 심사를 다시 요청하는 게 쉬운 줄 아느냐?”
“노블레스랑 신전에서 못 찾은 사람을 하루 만에 데려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다만.”
아리나가 책상에 턱을 괴고는 나를 가리켰다.
“신전에서 해야 할 일을 저쪽이 다 했는데, 이럼 신전 꼴이 뭐가 돼요?”
“……네가 언제부터 신전 체면을 신경 썼느냐?”
“전 항상 그랬어요.”
“말은…….”
주교가 한숨 쉬었다.
“붙임성 좋은 듯 보여도 사실 경계심이 많은 아인데……. 하루 만에 꼬드긴 비결이 뭐요?”
고기 들어 있는 고기 수프의 힘이다.
“말씀이 이상하십니다, 주교님. 그냥, 신관님께서도 제 진심을 알아 주신 거겠지요.”
“…….”
주교가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 후배가 꼭 지같은 친구 데리고 왔을 때 내가 저랬는데.
“……신전에서 그대에게 빚을 진 것도 사실이긴 하지.”
주교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득도 없는 일에 나서는 마음씨를 믿어 보겠소. 교황청에 재심사를 요청해 보지.”
“감사합니다.”
대답하면서 양심이 좀 찔렸다.
난 이득 없는 일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계산은 이미 끝났다.
얻을 수 있는 건 전부 얻어야지.
“심문관이 다시 파견되어 오려면 며칠 걸릴 것이오.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소.”
“기다리겠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신전을 떠났다.
* * *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
아령을 들어 올리며 숫자를 셌다.
확실히 초인을 처음 얻었을 때에 비해 육체 성능이 많이 올라왔다. 정말 오우거랑 팔씨름해도 지진 않을 거 같은데…….
쿵!
살짝 내려놓았는데도 굉음이 울린다.
이 정도면 그냥 살인 병기다. 검 말고 아령 들고 다닐까? 생각해 보니 검보다 아령 든 횟수가 훨씬 많기는 했다. 익숙한 무기 쓰는 게 최고라던데, 진짜 해 봐?
……관두자. 상상해 보니 꼴이 존X 우습다.
“후우…….”
숨을 내쉬며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번에 깨달은 게 많다.
여기는 내가 만든 게임 세계지만, 아니기도 했다.
본편에는 나오지도 않던 캐릭터가 동대륙에 다녀왔고, 자이어 테르베로츠는 오만에 가득 찬 멍청이가 아니었으며, 아리나 골드베리는 돈만 밝히는 돈 귀신이 아니었다.
설정과 다른 부분 때문만은 아니다.
조연들도 살아 움직인다.
아이들은 절망에 차 있지만, 내일을 꿈꾸고 어른들은 호시탐탐 행인의 뒷주머니를 노리지만, 각각의 삶을 살아간다. 적어도 내가 만든 0과1의 코드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
상념을 멈췄다. 달라진 건 없다. 주의해야 할 것만 늘었을 뿐.
그보다 중요한 건 마력 수련이다.
최대한 늦출 생각이었지만, 며칠 되지 않아 뒤질 뻔하지 않았나. 초인 얻을 때와 상황이 같다.
아끼다 똥 된다.
그렇게 미루다가 억! 죽으면 웃음도 안 나올 일이다.
슬슬 마력을 쌓긴 해야 하는데…….
심사가 끝날 때쯤이면 영멸초도 얻을 테고, 타이밍은 나쁘지 않다. 마음을 먹자 해야 할 일이 분명해졌다.
라이놀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심법을 배우겠다고?”
라이놀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곧 죽어도 운동만 할 것 같더니,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신체 단련도 계속할 거예요. 효율이 조금 떨어지긴 하겠지만.”
“보통은 반대로 생각하지만…… 뭐 어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저 신체 능력에도 계속 운동만 하는 걸 보며 얼마나 답답했던가!
사람들이 신체 단련을 등한시하는 건 시간 때문이다. 9년 운동하고 1년 마력 쌓느니 10년 마력 쌓는 게 더 강하니까.
하지만 이미 10년…… 아니, 수십 년을 단련해도 가능할까 싶은 신체가 있다면?
이건 이제 효율이 문제가 아니다.
그냥 미친 짓이지. 효율이고 뭐고 무조건 마력만 쌓아야 한단 말이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운동만 하고 있으니 내심 속이 탔었다.
“잘 생각했어. 안 그래도 요즘 수련에 진전이 있었거든. 지금 배우면 반년 안에는 마력을 쌓을 수 있을 거야.”
“라이놀은 얼마나 걸렸는데요?”
“3일?”
“……”
리안이 황당한 눈으로 라이놀을 바라봤다. 누군 반년 걸린다면서, 자기는 3일?
뭐지? 자기과시?
그 눈빛을 받은 라이놀이 어색하게 웃었다.
“보통 반년 정도 걸리거든. 처음 마력을 느끼는 데 좀 오래 걸릴 거야.”
“그걸 라이놀은 3일 만에 했다는 소리네요.”
“뭐…… 그렇게 되지.”
라이놀이 머리를 긁적였다.
본인이 말하면서도 재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나? 거짓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그런 점에서는 당당했다.
“나야 심법 배우기 전부터 자연스레 쌓인 마력이 있으니까 비교적 쉬웠지.”
“저도 반년이나 걸릴 생각은 없어요.”
“마음가짐은 좋은데, 이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야.”
반년도 짧게 잡은 편이다.
애초에 그가 리안에게 기대한 건 마력 펑펑 모으고 무쌍 찍는 게 아니었다. 적은 양이나마 모아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강해지는 거였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해야 하는 거지.”
“음…….”
라이놀이 말꼬리를 흐렸다.
열정은 좋지만, 조급한 건 좋지 않은데. 갑자기 마력을 쌓겠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충고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리안은 어리지만, 성숙했으니까. 그런 상대에게 하는 충고는 이미 잔소리다.
……근데 또 생각해 보니 조언 정도는 괜찮지 않나, 싶었다.
“갑자기 그렇게 서두르는 이유라도 있어?”
“……그냥, 조금 태평했구나 싶어서요.”
“태평이라…….”
그리 말하기엔 너무 바삐 산 것 같은데.
스캐빈져 습격에, 보물고 탈환, A급 용병 상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고, 몇 가진 목숨을 담보로 했던 일이다. 그것들을 제해도 리안은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운동이든 뭐든.
그런데 갑자기 저런 생각을 한다는 건…….
“어디서 맞고 왔어?”
“…….”
침묵하는 리안을 보며 라이놀이 생각했다. 맞았구나.
“저번 전투 때는 아닐 테고…… 그게 얼마나 됐다고 또 싸워?”
“제가 얼마나 싸웠다고 그래요?”
“싸움밖에 안 했지.”
“레이튼이 엿 같은 게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여기 주민들이 전부 싸움만 하진 않는데?”
“…….”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라이놀이 피식 웃었다.
“싸운 게 잘못이란 소리는 아니야, 리안. 네가 그랬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잘못이 없진 않아.”
“뭔데요?”
“도움을 청했어야지.”
“네?”
라이놀이 리안을 똑바로 바라봤다.
“너는 아직 애야. 애들은 어른한테 도움받는 게 당연한 거고.”
“라이놀도 저랑 나이 차이 크게 안 나잖아요.”
“적어도 몸은 다 자랐지.”
라이놀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고, 몸도 충분히 강한 건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어른은 아니지. 적어도 다 자라기 전까진 의지해 줬으면 좋겠다."
“…….”
침묵하는 리안을 보고 라이놀이 어색하게 웃었다.
“꼰대 같은 소리 해서 미안. 의지가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의지할 생각은 없다.
진짜 애가 된 것도 아니고. 하지만 리안은 라이놀이 꼰대 같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뿐이었지.
라이놀이 머쓱한 듯 콧등을 문질렀다.
“얘기가 길어졌네. 어쨌든, 마력 심법을 배우고 싶다는 거지?”
“네.”
“아까는 반년이라 했지만, 확실히 네 노력 여하에 따라 좀 짧아질 수도 있지. 5개월 정도로 가능할지도 몰라.”
“5개월…….”
마력을 느끼고 처음 쌓아 올리는 건 마력 패스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오직 개인 재능의 영역.
초인의 신체를 가진 리안이라고 해도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5개월이 너무 늦다는 건 알겠다.
“더 빠른 방법은 없어요?”
“없어. 이것도 여유 있게 잡은 거야.”
“음…….”
“혹시나 재능 있으면 더 빠를 수도 있고.”
그리 말하면서도 라이놀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마력을 느끼는 데 어떤 재능이 관여하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 역시 신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중론이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마력 패스는 넓었지만…….’
74.
라이놀이 들었던 리안의 마력 패스 수치다.
신체 능력을 생각하면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의 숫자. 하지만 마력까지 잘 느낄 거라 생각하긴 힘들었다.
두 가진 어디까지나 별개의 문제니까.
“결국, 일단 해 봐야 안다는 소리네요.”
“그렇지.”
“그럼 바로 시작하죠.”
라이놀이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배우는 자세가 돼 있다니까.
“마력을 쌓는 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어. 자연스레 축적되는 경우와 심법으로 수련하는 방법.”
눈을 감으며 라이놀이 말을 이었다.
“심법을 얻기 전 내가 마력을 쌓은 방법이 전자였지. 이건 사실 개인 재능에 따라 저절로 쌓이는 거라 방법이라 하기도 뭐해. 효율도 엄청나게 떨어지고.”
그 효율 엄청 떨어지는 방법으로 짱 먹은 주인공이 생각났지만, 리안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쪽은 논외지.
“거기에 심법 종류도 수백 개가 넘어. 심지어 그중 몇 개는 자연스레 쌓는 게 더 효율 높을 정도로 효과가 떨어진다더군. 하지만 이거 하나는 장담할 수 있어.”
라이놀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자부심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표정.
“마력 심법은 우리 가문이 최고였어.”
“…….”
리안도 인정하는 바다.
라이언 가문은 제국에서도 손꼽던 무가. 그중에서도 검술과 심법으로 유명한 검술 명가였으니까.
라이놀이 쓰게 웃으며 마력을 담아 손을 휘둘렀다.
“서론이 길었지만, 일단 마력을 느끼는 게 출발선이야. 가만히 앉아서 명상하다 보면…….”
“……보여요.”
“뭐가?”
의아하게 되묻자, 리안이 라이놀의 손을 가리켰다.
“마력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