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9)
“……이번 재판도 포함된 얘기야?”
“물론이죠.”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싫음 마시고.”
태연히 답하자 시르케가 입술을 깨물었다.
짚을 건 짚고 넘어가야지.
“우리 착각하진 맙시다. 매달려야 하는 게 그쪽인 건 알고 있죠?”
나야 저 녀석 죽는다 해도 재앙 하나 줄었네, 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좋은 변수가 될 만한 것들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죄책감이야 좀 들겠지만, 급한 건 저쪽이라는 소리다.
시르케가 눈을 깔며 답했다.
“……알고 있어.”
“그럼 부탁을 하셔야지. 왜 이리 뻗대실까.”
“……바이론 아저씨가 신패 쓴 건 알아?”
“그것도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재판을 안 받게 할 수 있다고?”
시르케가 숨을 내쉬었다.
“나는…… 절대 신전 못 믿어. 형식적이라는 말도 포함해서.”
“저도 그닥 믿는 편은 아니에요.”
“여기 성기사랑 신관 있는데 말 좀 조심해 주시겠어요?”
옆에 있던 아리나가 말했다. 어차피 별 신경도 안 쓰면서.
“어쨌든, 이번 재판은 걱정하지 마요. 신패를 무력화할 방법이 있으니까.”
“그건 말도 안 돼요.”
아리나의 목소리가 높이 올라갔다.
“신패는, 신패예요.”
“밥은 밥이지.”
“그게 아니라요.”
아리나가 답답한 듯 머리를 헝클였다.
내가 신패에 대해 몰라서 헛소리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신패는 신전에서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주겠다는 증표라고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경우도 많지만, 반대로 그 고고한 신전이 흉내라도 내야 할 정도로 중요시하는 약속이란 말이에요.”
말이 무슨 속사포 같네.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말했을까 봐.”
“그럼 무슨 생각인데요?”
“생각은 있는데, 말해 줄 생각은 없어.”
“지금 저 속 터지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죠.”
어떻게 알았지, 귀신같네.
태연하게 무시하고 뒤로 돌았다. 돈 돈 거리는 신관에, 성기사만 반복하는 성기사. 사실 시르케 상대보다 이쪽이 더 힘들다.
나만 고통받긴 억울하지.
슬쩍 보니 아리나가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보고 기뻐하다가 금세 우울해졌다.
시X, 생각해 보니 나잇값 제대로 못 하는 거 같은데.
“신패로 한 요청이 깨지는 경우는 여태 한 번도 없었다고요.”
“전례는 깨지라고 있는 거지.”
“그런 말 처음 듣는데요.”
“네가 못 들어봤다고 없는 말인 건 아니야.”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는 아리나를 뒤로하고 시르케를 바라봤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요?”
“…….”
시르케는 한참을 고민하는 기색을 비치더니 곧 입을 열었다.
“……마녀랑 연관 안 되고 살 수 있다면 목숨도 줄 수 있어.”
“그럼 해결됐네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마음먹었으면 무조건 성공할 테니까.”
* * *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미쳤어? 자신감도 정도가 있지.”
돌아가는 길, 아리나가 나와 둘만 남았을 때 넌지시 물었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성공해?
설령 가능하다 해도,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사람이 훨씬 멋있다.
“근데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했어요?”
“원래 그게 이끄는 자의 숙명이야. 안 될 일도 되게 하는 거.”
“뭐래.”
“…….”
싸늘한 눈으로 날 보는데, 내 인생 이대로 괜찮은가 고민이 들었다. 얼른 지구 가는 방법부터 찾는 게 낫지 않을까.
“아무튼, 그렇게 호언장담했으면 끝까지 책임져요. 대체 뭘 어떻게 할 건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관심 많네. 그런 성격 아닌 줄 알았는데.”
“저도 일단은 신관이거든요.”
아리나가 두 손을 모았다.
“키탄님, 키탄님. 제발 하늘에서 돈이 내리게 해 주세요.”
“…….”
내용이야 어쨌든, 모습 자체는 정말 신실해 보여서 조금 놀랐다. 단순히 하프 엘프라는 이유만으로 성녀가 되는 건 아니란 소린가.
이윽고, 손을 내린 아리나가 나를 쳐다봤다.
장난기는 사라지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이다.
“저도 마음에 안 들어요.”
“뭐가?”
“지금 신전의 방식이요.”
신관이 해서는 안 될 말.
신전에 고발한다면 그대로 퇴출당할 수도 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데, 아리나는 그냥 덤덤히 말을 이었다.
“마녀를 잡는 건 좋아요. 하지만, 그 사이의 무관한 사람들은요?”
“…….”
“수천이 학살당하는 걸 막는다는 이유로 무고한 수백을 죽이는 거. 옳고 그름은 둘째 치고 만인을 품겠다는 신전이 할 일은 아니죠.”
“…….”
조금…… 아니, 많이 놀랐다.
게임에서는 돈밖에 안 찾는 캐릭터였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내가 만든 설정이 아니다.
“내가 신전 가서 얘기하면 어쩌려고 그런 소릴 해?”
“그럴 리가요. 저흰 이제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잖아요.”
“무슨 말이야?”
아리나가 해맑게 웃었다.
“부적이요. 거짓말이잖아요.”
“…….”
어쩐지 너무 쉽게 넘어간다 했다.
“어떻게 알았어?”
“그거 주교님한텐 말하지 마요. 젊으실 때 동대륙 다녀오셨거든요.”
“……운도 지지리 없네.”
그 드물다는 동대륙 경험자에, 거기서도 드문 부적술에 대해 아는 자. 게다가 마침 그런 사람을 관계자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세상이 원래 요지경이다.
“뭐 때문에 눈치챈 거야?”
“아무나 부적을 쓸 수 있다는 거요.”
“……주교님이 거기까지 아신다고?”
진짜 상상도 못 했네.
술사들 사이에서도 기밀로 취급되는 정본데.
“동대륙에서 사귄 연인이 술사였대요. 주교님도 ‘증표’를 받았다고 얘기해 줬어요.”
“허…….”
“술사는 평생 단 한 명에게만 증표를 부여할 수 있고, 부적은 술사 본인과 증표의 소유자만 사용할 수 있죠. 어릴 때 주교님이 말해 줬어요.”
“…….”
이쯤 되면 내 눈이 동태 눈깔 아닌지 의심해 봐야겠다. 주교에게 예쁨받는다는 것도 진짜인가 보다.
“그러면 시르케가 진짜 마녀란 것도 알 텐데…….”
“마녀는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놔줘도 되는 거냐, 묻기 전에 아리나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한순간의 충동만으로 일을 저지르곤 하죠. 수백 번 좋은 일을 해도 단 한 번의 충동 때문에 전부 망치는 거예요.”
아리나가 다시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키탄님도, 신전도, 그래서 마녀를 치우려 해요.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그리곤 눈을 뜨고, 앞에 걸어가는 시르케를 바라봤다.
“하지만 단지 영창 생략을 이유로 사람을 마녀로 몰고 싶진 않아요. 이미 재판도 통과했고, 그 이후로도 한참을 별일 없이 지냈잖아요.”
그러더니 싱겁게 웃었다.
“뭐, 어차피 견습이 입만 놀리는 거라 대안은 없지만요.”
“…….”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곤 눈빛이 살아 있다.
의지 깃든 눈. 말만 그렇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뭔가 저지를 눈인데, 그럼 모순이 발생한다. 게임에서 아리나는 딱히 하는 게 없는데.
물론 활약이야 하지만, 저런 쪽은 아니었다.
아리나의 설정을 짠 건 나다.
하지만 스토리를 진행한 건 다른 사람. 그때쯤 나는 손을 놓았으니 진행상에서 벌어진 일과 연관이 있는 걸까? 아니면, 커 가면서 돈만 밝히는 성격으로 변한 건가?
“음…….”
모르겠다.
캐릭터들 어린 시절 하나하나 세심히 짜 두진 않았으니까.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아리나가 실없이 웃었다.
“너무 심각해지진 말고요. 그냥 해 본 말이니까. 신전에는 이런 얘기 나눌 사람이 없거든요.”
“……그래.”
“어쨌든, 저는 얘기할 생각 없으니 걱정 말라는 소리예요. 기사님한테도 대충 둘러댔어요.”
그리고는 나른하게 기지개 켜며 하품했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래.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잘 풀렸음 됐지.
“다음에 또 밥이나 먹자.”
“저 견습이라 사비 없어요.”
“내가 살게.”
“그럼 당연히 좋죠. 근데 다음에는 다른 음식점 가요. 비싸긴 더럽게 비싸면서 손님 대하는 태도는 꽝이더만.”
“고기 없는 고기 수프 먹으러 가지 뭐.”
“그건 빼고요…….”
그런 시시한 대화를 나누며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대체 어떻게 찾은 거요?”
“죄송하지만, 사적인 비밀이라 알려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음……. 사과하지. 강요한 것은 아니오.”
“괜찮습니다.”
주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신전에서도, 노블레스에서도 못 찾은 걸 하루도 안 되어 찾아내다니……. 솔직히 탐이 나는구려.”
나를 보며 하는 말에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어느 쪽으로도 반응하기 힘든 칭찬 아닌가.
“주교님! 저도 엄청 고생했어요. 내일은 고기반찬 좀 내주면 안 돼요?”
“그냥 데리고 온 게 다면서 뭔 고생을 했다는 게냐? 찾는 것도 저분이 다 하신걸.”
그 말에 찔끔해서 라키안을 쳐다봤다.
주교한테 싸움 없이 순순히 따라왔다고 얘기해서다. 허튼 소리하면 어쩌나 했는데, 조용히 입만 다물고 있다.
생각해 보니 지껄여 봤자 성기사구나.
“걷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제 연약한 다리가 안 보이세요?”
“무 다리만 보이는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
덮어 주는 건 좋은데, 들을 가치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말이 길어지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주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미안하구려. 말씀하시오.”
“마녀재판에 관한 얘기입니다.”
“재판이라…….”
주교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런 표정은 처음 본다.
어제 처음 만났지만.
“무엇이오?”
“재판을 취소했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주교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불가능하오. 다른 것도 아니고 신패가 얽힌 일이니까.”
“시르케가 극심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주교님도 재판 과정은 아실 테죠.”
“…….”
마녀재판은 신전의 치부다.
하긴 하는데, 알려지고 싶진 않은 치부.
신도들은 물론, 일반 신관들에게도 알려 주지 않는 비밀이란 소리다. 하지만 주교급이 모를 만한 얘기도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교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 과정을 어떻게 아는진 모르겠지만, 그런 것까지 안다면 신패에 대해서도 아시겠지. 일단 제출됐다면,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하오.”
“알고 있습니다.”
그리 답하면서도 주교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재판에 대한 그의 견해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나와 눈 마주치던 주교는, 잠시 후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도 그 재판에는 회의적이오. 너무…… 너무도 비인도적이지. 그녀의 반응도 이해하는 바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재판은 형식적으로 진행할 거라는 것밖에 없소.”
“그 또한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신패의 사용자가 항의한다면 교황청에서 말을 바꿀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장담할 수는 없군.”
회의적인 표정으로 주교가 답했다.
확률은 낮지만, 제로는 아니다. 근처에 동대륙 다녀오고 술사 여친 사귄 사람 있을 확률보다는 높겠지.
난 운이 X같이 없으니까, 이번 일도 대충 넘겼다가 X될 수 있다.
몇 가지 잘 풀리기는 했지만 사실 난데없이 여기 떨어진 것부터 내 운을 평하기엔 충분하지 않나?
생각을 마치고 주교의 얼굴을 바라보니 10년은 늙어 보였다.
죄책감과 책임감.
두 가지가 그의 세월을 짓누르는 것이다.
“…….”
라키안과 아리나를 견디는 것만 봐도 인격자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본인과 연관 없는 사람 일에도 저런 모습을 보일 줄이야. 내가 생각하던 성직자 모습 그대로다.
감동스러울 정도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받을 텐데 저런 사람에게 짐을 더할 순 없지. 다행히 이건 내가 덜어 줄 수 있는 문제였다.
“그 신패는 무용합니다. 왜냐하면.”
주교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바이론은 적격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