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8)
“성기사-.”
라키안이 몸에 마력을 둘렀다.
황금색 기운이 어른거리고, 마녀에게 검을 겨눈다. 전투태세. 적으로 간주한 거다.
젠장, 좋게 끝나지 않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말 한마디 없이 전투는 생각 못 했는데.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고저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마녀가 말했다.
대화하려나 싶었더니 뭔 소리야.
“뭐가요?”
“습격에 실패한 것도, 위치를 들킨 것도, 마법진을 해제한 것도 전부 네가 한 일이잖아.”
내가 습격당했지, 했냐?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괜히 자극할 필요 없으니까.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
떨리는 목소리에 바라보니 안색이 창백하다.
극도의 불안 상태.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진짜 저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궁지에 몰려서 이성을 놓은 거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일단, 재판은 형식만 갖출 생각이에요.”
“그걸 믿으라고?”
못 믿겠지. 솔직히 나도 못 믿겠다.
“내가 마녀라고 잡혀간 이유, 알아?”
“…….”
알고 있다. 내가 설정한 과거니까.
티를 내진 않았다. 죄책감 때문이다. 현실이 될 줄 알았으면 그런 설정은 안 넣었을 거다.
시르케는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표정 때문이야. 태어났을 때부터 항상 그랬거든. 거기에 마법까지 썼으니 누군들 안 꺼림칙했겠어?”
머리를 꼬며 시르케가 말을 이었다.
“결국 마을 사람 한 명이 신전에 신고했더라고. 이유는 여자에, 마법사, 무표정. 웃기지 않아?”
그리고는 웃었다.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겨우 그 이유로 신전에서 나섰어. 그 정도면 평민 마법사 죽일 이유로는 충분했나 보지?”
시르케가 웃음을 멈추고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신전은 믿을 수 없어. 절대.”
“…….”
역시 무리였나.
그런 경험을 한 사람한테 믿어 달라는 것도 웃기는 소리긴 하다. 근거 없는 추측도 아니고 위에서 변덕만 부려도 바뀔 운명 아닌가.
라키안이 다시 마녀에게 검을 겨눴다.
“성-기사.”
“무슨 생각이었든, 영창 없이 마법을 사용한 순간부터 그냥 넘어갈 순 없다. 라고 기사님이 말했어요.”
아리나도 기도 자세를 취했다.
“저는 그냥 돌아가고 싶긴 하지만요.”
“…….”
완전히 전투 분위기네.
역사상 최강이 될 마녀가 상대에, 예상치 못한 마나포까지. 우위를 점친 건 마녀만을 가정한 결과다.
이렇게 되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언제는 성공할 일만 골라 했나? 이 개떡 같은 세상 오기 전에도, 온 후에도 그런 경험은 없다.
가능하지도 않고.
마력은 없지만, 초인의 신체에 코드를 보는 눈. 이 정도면 차고 넘친다.
해볼 만하다.
흑철석 검을 꺼내 들었다.
“혹시 지금이라도 마음 바꿀 생각 있어요? 무죄는 내가 증명해 줄게요.”
“네가?”
시르케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무슨 수로?”
“방법 있다면 믿을래요?”
“아니.”
그렇겠지.
애초에 말로 풀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다.
원작에서 시르케는 마녀라는 소문이 퍼진 것만으로 수천 명의 인간을 학살한다. 그 후엔 아예 전향해서 흑색 탑을 건설하고, 인류 재앙의 한 축이 돼 버리는 거다.
틀림없는 악역.
그렇지만…….
“그럼 어쩔 수 없죠.”
아직 갱생의 여지는 있다.
“좀 처맞는 수밖에.”
매에는 장사 없으니까.
거인 살해의 검술.
존X 세게 휘두르기.
콰아앙!
* * *
먼지가 피어오르고, 부서진 벽의 파편이 흩날렸다. 그 틈을 타 뒤쪽의 아리나를 바라봤다.
당황한 얼굴.
시간 끌 수는 없다. 재빨리 입을 열었다.
“신성 보호막 사용 가능하지?”
“가, 가능은 한데요…….”
“내가 말할 때마다 나한테 시전 해.”
“네? 자, 잠깐만요!”
무시하고 달렸다.
마나포 하나라도 줄여야 편해진다. 순식간에 근처까지 도달했을 무렵, 구멍 앞에 숫자가 모이는 것이 보였다.
젠장, 조금 더 일찍 움직여야 했는데.
“아리나! 보호막!”
“나, 키탄을 지키는 방패가 되리!”
아리나의 외침이 끝나고, 내 주위를 하얀 기운이 휘덮는 것이 보였다.
신성 보호막.
빠르고, 두껍다. 웬만한 정식 신관보다 낫다는 게 허언은 아닌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포에서 나온 공격이 나를 휩쓸었다.
쿠웅!
“씨X…….”
뒤질 뻔했네.
허리를 매만지며 일어났다. 보호막이 없었으면 분명히 죽었다.
라키안과 싸우고 있는 시르케를 바라보니, 놀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나포를 알아본 게 충격인가 본데, 내 쪽이 더 놀랐다. 대체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야?
“괜찮아요?”
“괜찮아. 보호막 몇 번이나 더 쓸 수 있어?”
“다섯 번이요!”
“좋아. 앞으로도 계속해.”
앞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마나포의 충전 시간은 180초. 그 시간까지 한 개를 부수지 못하면 패배다. 충전을 반복하는 공격에 샌드백 신세가 될 테니까.
속으로 시간을 세었다.
35초, 충분하다.
충전 중인 마나포 근처에 도달한 순간, 왼쪽에 숫자가 모이는 게 보였다.
“보호막!”
“나, 키탄을 지키는 방패가 되리!”
쿠웅!
“…….”
진짜 존X 팰 거다.
“어…… 괜찮아요?”
“아니. 뒤질 거 같아.”
쑤시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보호막과 초인의 신체로도 버티기 힘든 충격. 시간은 90초. 빠듯하다.
예상보다 너무 강했다.
다음 공격을 받으면 몇 초일까. 160초? 170초? 10, 20초 안에 부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대책이 필요했다.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라키안은 시르케와 전투 중으로 도움을 줄 여력이 없었다. 보호막을 시전 해야 하는 아리나도 제외. 내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지금 내가 가진 게 뭐가 있지?
흑철석 검, 중력 장갑, 초인의 신체, 거인 살해의 검술. 어느 것이든 당장 써먹긴 힘들다.
남은 건 코드뿐.
생각은 빨랐고, 고민은 짧았다.
“잠깐 비켜 봐.”
주위의 파편을 집어 들고 중력 장갑으로 무게를 더했다. 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 팔을 뒤로 당기고, 세차게 내 뻗는다.
170초.
쉬이이익.
날아가는 파편을 보며 생각했다.
‘크기 코드 S를 L로.’
[크기 변경에 100포인트가 소모됩니다.]
[변경하시겠습니까?]
‘변경!’
[변경이 완료되었습니다.]
생각을 마침과 동시에 파편이 수십 배로 커졌다. 이미 마나포 근처까지 도달한 상태.
175초.
시르케가 반응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180초.
콰앙!
굉음에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한 개가 무력화됐다.
“후우…….”
작게 한숨 쉬었다. 존X 빠듯했네 진짜.
“지, 지금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목소리에 돌아보니 아리나가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갑자기 커진 거요!”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리나가 말을 이었다.
“마녀였어요?”
“개소린 말고.”
뭐만 하면 마녀, 마녀 거리니까 쟤가 저러는 거 아니야. 진짜 마녀 맞지만.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닌 거 같아 차분히 말을 이었다.
“설명은 나중에 할게.”
그리고 빠르게 달려가 남은 두 개의 마나포를 정리했다. 두 개 모두 충전도 안 끝난 시점. 부수는 건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다.
“이제야 좀 개운하네.”
부서진 마나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온몸이 쑤신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면 존X 평화로운 게임 만들어야지. 농사짓고, 동물 기르는 그런 거. 이계의 괴물이나 인류의 재앙 같은 건 안 나오는 걸로.
쾅!
소리가 난 곳을 보니 시르케가 마법을 난사 중이었다. 내가 합류하기 전에 빨리 해치우려 한 모양인데, 그게 맘대로 되겠나?
3급 성기사 상대로.
날아오는 마법을 우직하게 맞고 있는 라키안에게 외쳤다.
“라키안! 오른쪽으로 꺾어요!”
라키안이 주춤하더니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마법이 작렬했다.
“성기-사.”
시르케의 표정이 굳어지고, 라키안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리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투항하면 받아 줄게요.”
* * *
“그냥 죽여.”
“그럴 생각 없는데요.”
제압된 시르케를 보며 말했다.
투항은 무슨, 온갖 발악을 다 하는 걸 겨우 이겼다. 발현 전에 봐도 피할 수 없는 마법도 많았으니까. 라키안이야 그냥 마력으로 버티면 되는데, 나랑 아리나는 존X 튀다가 보호막으로 막는 수밖에 없었다.
억울해서 마력 쌓아야지.
“성-기사.”
“마녀는 즉결 처형. 이라고 기사님이 말하셨어요.”
“……대충 지껄이는 거 맞냐?”
이 정도면 거의 번역기 수준 아닌가?
“원래 기사란 족속은 단순해서 하는 말이 뻔해요.”
“너 그러다 칼 맞는다.”
그냥 앞담을 까 버리네.
힐끗 라키안을 바라보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네가 납득하면 안 되지.
한숨 쉬는데, 시르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대로 해. 난 끌려갈 생각 없으니까.”
“성기-사.”
라키안이 진짜 칼을 뽑아 들었다.
재판은 마녀인지 확실치 않을 때 하는 것.
성기사 자의적 판단에 따라 즉결 처형도 가능하다. 굳이 레이튼이 아니더라도 개 같은 세계관이니까.
나는 그걸 손을 들어 막았다.
“성기사?”
“왜 막는 것이냐! 라고 기사님이 말했어요.”
“아닌 거 같은데.”
“어조만 다르지 뜻은 비슷할걸요?”
그런가 보다 해야지. 나만 스트레스받는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시르케를 가리켰다.
“일단, 저 사람은 마녀가 아닙니다.”
내 말에 모두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심지어 시르케도 포함해서.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영창 없이 마법 사용하는 거 모두 다 봤는데.”
“나도 영창 없이 물건 크기 키웠는데, 나도 마녀야?”
“안 그래도 의심 중이에요.”
“…….”
진짜 때릴까.
꾹 참고 품속에서 준비해 온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게 뭐예요?”
“부적.”
“……그, 동대륙에서 사용한다는 그거요?”
“맞아.”
종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잠들기 직전 생각난 방법이다. 영창 없이 마법 주문? 그거 완전 부적술 아니냐? 실제로는 많이 다르긴 한데, 어차피 아는 놈도 없잖은가.
“요즘 레이튼에 몇 개 풀렸거든. 그래서 알아보는 중이었어. 나도 이쪽에 관심 있어서.”
“그게 지금 이 일이랑 무슨 관계인데요?”
“기다려 봐.”
눈을 감고 부적을 사용한다는 의지를 발산했다. 곧이어 부적이 타오르며 불꽃을 피워 냈다.
“봤지? 부적은 영창 없이도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어. 저쪽이 쓴 것도, 아까 내가 물건을 키운 것도, 전부 부적으로 한 거지.”
“어쩐지. 들러리니 뭐니 하더니 적극적으로 나설 때부터 뭔가 있구나, 했어요.”
아리나가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당황스럽네. 이렇게 쉽게 납득한다고? 아직 준비한 변명이 열 개는 더 되는데.
“동방의 신비는 어쩔 수 없죠. 전 이해했어요.”
“……그래.”
뭔가 꺼림칙하지만,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저 녀석이 그리 생각한다고 재판이 취소되진 않겠지만, 현장에 있던 신관의 의견을 중히 여기는 것도 사실. 나중에 도움이 되겠지.
남은 건 라키안 뿐인데.
“성기-사.”
“납득할 수 없다. 라고 기사님이 말했어요.”
“성-기사.”
“부적 같은 걸 꺼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라고 기사님이…… 그런데 이거 계속해야 해요?”
다행히 준비해 온 변명이다. 부적을 꺼내 벽에 붙이며 말을 이었다.
“부적은 벽에 설치해 사용도 가능합니다. 미리 힘만 불어넣으면 상관없죠.”
곧바로 벽에 붙여 둔 부적이 타오르고 허공에서 물이 생성됐다.
모두 그걸 보고 놀라는 틈을 타 처음 부쉈던 벽 쪽으로 다가갔다. 안쪽에 손을 넣고, 옷소매에 감춰 둔 부적을 쥐며 빼냈다.
“벽 안쪽에 미리 설치해 둔 겁니다. 마법진이 부서질 것까지 염두에 둔 거죠.”
“……성기사-.”
라키안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거의 다 넘어온 거 같은데.
“성기사…….”
“하지만 그렇다면 왜 설명하지 않고 공격부터 한 것이냐. 라고 기사님이 말했어요.”
“라키안 경도 전투 경험이 있을 겁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전투를 마친 사람들이 불안감에 과민 반응하는 것도 보셨겠지요. 제가 알기로, 마녀재판은 그에 못지않은 걸로 압니다만…….”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전쟁, 고문 등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 발생하는 정신병이다.
증상은 공격적 성향, 과민반응 등. 이론으로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경험으로 어렴풋이 이해는 하고 있을 그런 병.
라키안도 재판 과정은 알고 있을 거다.
마녀가 그걸 통과하는 게 불가능한 일인 것도 알 터.
과연,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사-.”
“기사님도 일단 알겠대요. 결국 판단은 신전에서 하는 거지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살짝 고개 숙이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르케에게 다가갔다.
“……무슨 목적이야.”
작은 목소리.
제 목숨이 나한테 달린 건 아나 보지? 마나포에 당한 거 생각하면 때려 주고 싶은데, 대인배인 내가 참는다.
“나중에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내 말에 시르케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무감정이라기엔 표정이 너무 풍부하지 않나.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대신, 앞으로 평생 재판 걱정은 없게 해 줄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