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6)
“성-기사.”
“…….”
이 새낀 또 무슨 컨셉이지?
다음 날 라키안을 보고 든 생각이다.
이딴 말버릇을 가진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이것도 설정 오류라고 봐야 하나? 아니면 그냥 원래 저런 새끼인 걸까?
그때, 옆에 있던 아리나가 입을 열었다.
“어제 주교님이 말해 줬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묵언 수행 중에도 저 단어만큼은 말하길 허락받았대요.”
“그럼 묵언 수행이 아니잖아.”
대충 이해는 간다.
입을 열지 못하느니 키탄의 곁으로 가겠다며 자해 쇼라도 한 거겠지. 충분히 그럴 만한 놈이다.
“저라고 뭐 알겠어요? 원래 높으신 분들 결정은 아랫것들이 이해하기 힘든 법이라고요.”
“넌 신관이 대체 왜 그리 세속에 찌든 거냐?”
“요즘은 신관도 현실감각이 필수예요. 키탄님이 음식을 내려 주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 너 잘났다.”
더 얘기하다간 화병 나겠다. 애써 고개 돌리는데 라키안이 입을 열었다.
“성-기.”
“…….”
진짜 이런 새끼들이랑 마녀사냥을 가야 하나?
진지하게 다 때려치울까 고민할 무렵, 문이 열리며 주교가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하오.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리고는 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보며 힐링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게 된다.
“괜찮습니다. 시르케의 위치는 알아내셨습니까?”
“음…….”
침음을 흘린 주교가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지금 그 일을 보고받고 오는 길이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구려.”
“찾지 못했나 보군요.”
“그렇소.”
주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행적이 뚜렷한 편이라 쉽게 찾을 줄 알았소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전혀 찾을 수가 없군.”
바이론에게서 몸을 숨긴 탓이다.
아니면, 이미 마녀사냥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서일 수도 있고.
“해서, 미안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 같소. 양해 부탁드리오.”
아까 때려치울까 고민하기는 했지만, 진짜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이번 일은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다.
바이론이 뭔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으니까.
속전속결이 최선인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무슨 뜻이오?”
“시르케는 제가 찾지요. 저 두 사람을 저한테 붙여 주셨으면 합니다.”
주교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아무래도 전달이 안 됐나 보군. 그녀를 찾은 건 노블레스의 정보 조직이오. 그쪽에서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그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시르케 찾는 걸 제가 직접 하겠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
주교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떻게 말해야 내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 고민한 거겠지. 연륜이라 해야 하나. 나도 저렇게 늙어야 하는데.
“마음은 알겠소만 그녀는 신전과 노블레스, 두 정보 조직에서 모두 찾지 못했소. 시간이 걸리게 되어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방법이 있습니다.”
말을 끊고 얘기했다. 그만큼 확고한 생각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오늘 내로 찾을 방법이.”
“음…….”
주교가 다른 둘을 쳐다봤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들어주고는 싶소만…… 저보단 저 두 사람의 의견이 중요하겠군요.”
“저는 상관없어요.”
아리나가 턱을 괴고는 말했다.
“대신, 밥은 사 주는 거죠? 신전 밥은 공짜라 좋긴 한데, 솔직히 더럽게 맛없단 말이에요.”
“……아리나.”
“왜요? 신관은 사실만을 얘기해야 한다고 한 건 주교님이잖아요.”
“……말투를 말한 게다.”
고생이 많다.
저렇게 늙고 싶다 생각했는데, 생각이 달라진다. 인격자도 그 나름이지. 저런 건 패서 고쳐야 하는데. 나는 할 때는 하는 어른이 되어야지.
그런데 저런 주교조차 밥이 맛없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는 걸 보면…… 생각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긴 한 모양이다.
아무튼, 밥 정도는 얼마든지 사 줘도 문제없다. 사실 돈은 넘치는 상태 아닌가. 라이언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았으니.
“너는 안 따라와도 되는데.”
“밥 사 주는 게 그렇게 아까워요?”
“아니. 옆에 있으면 스트레스받아.”
“그럼 조용히 있을게요. 흡!”
그러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넉살도 좋아.
“후식은 없다.”
“그럼 비싼 거 먹어도 되죠?”
“빨리 먹을 수 있는 거면 상관없어.”
아리나가 ‘오예’ 소리쳤다.
마녀 만나면 분명 후회할 텐데. 본인이 간다고 했으니 내 책임은 없다.
뒤로 돌아 라키안을 바라봤다.
“성기-사.”
병신 새끼.
“음……. 라-키탄-안티그란 경도 괜찮다면 상관은 없소만…….”
“그럼 바로 시작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시오. 다만, 도중에 돌아와도 괜찮으니 무리는 하지 마시오.”
“걱정 마시지요.”
그럴 일 없으니까.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신전을 빠져나갔다.
* * *
“저는 저 집이 좋아요.”
“……저기?”
아리나가 가리킨 장소를 쳐다봤다.
허름하진 않지만, 화려하지도 않은 평범한 음식점. 비싼 거 먹겠다고 해 놓고 갈 만한 곳은 아니다.
“비싼 거 먹겠다며?”
“네, 비싼 거. 저기 한 끼 가격이 5코퍼나 해요.”
물가가 워낙 다르니 환산하긴 어렵지만, 한국 돈으로 5천 원쯤 하지 않을까?
내 설정엔 그랬다.
저 정도는 레이튼의 음식점 중에서도 비싼 편은 아니다. 사 달라 해 놓고 눈치 볼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진짜 저걸 비싸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직 어려서 그릇이 작구나.
“고기 요리 좋아하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얼굴에 쓰여 있어. 라키안 경도 고기, 괜찮으시겠습니까?”
“성기사.”
고개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한 후,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음식점은 제가 안내하죠.”
“저는 저 집이 좋은데……. 레이튼에서 몇 안 되는 고깃집이란 말이에요.”
“고기 먹으러 갈 거니까 걱정 마라.”
“네? 다른 곳은 엄청 비싼 곳뿐 인데…… 혹시 부자예요?”
부자긴 하지. 벼락부자.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이 돈이라지만, 흑철석 갑옷으로 들어올 수입까지 생각하면 밥 먹을 돈 아낄 정도는 아니다. 이 세계 오고 한 달도 안 돼 이렇게 된 걸 보면 은근 운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어디 갈 건데요? 노래하는 여행자? 길 안내를 위한 지침서?”
“……그게 음식점 이름이야?”
뭘 파는 곳인지 짐작도 안 가네.
김밥천국, 할매국밥. 얼마나 좋아. 음식 종류 딱 보이고.
“네. 가격이 무려 실버 단위로 시작하는 곳이에요. 원래 비싼 가게들은 있어 보이게 이름 짓는다고요.”
“아무튼, 둘 다 아니야.”
“그럼 근처에 남은 곳이 없는데……. 혹시 여관에서 고기 없는 고기 수프 사 주려는 거 아니죠?”
그게 왜 고기 수프냐고 묻지 않고 걸었다.
얼마 안 남았으니까.
아리나가 뚱한 표정으로 따라왔다. 고기 없는 고기 수프 먹으러 간다고 생각했나 보다.
대체 그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 레이튼에서 대표적인 음식점 정도는 설정해 뒀다.
노블레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운영하는 ‘왕도’.
이쪽도 뭐 파는지 알아먹을 이름은 아니다.
정확히는 그럴 필요가 없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식당이니까. 그만큼 비싸긴 한데, 어차피 뇌물도 먹여야 하는 신세니 미리 점수 좀 따 두면 좋지 뭐.
조금 걷다 보니 목적지가 보였다.
유명세에 비해 눈에 띄는 외관은 아니다. 그냥 깔끔한 건물에, ‘왕도’가 적힌 간판 하나.
자신감이 엿보인다고 해야 하나.
“어디까지 갈 건데요? 여관은 저쪽이에요.”
“다 왔어.”
“네? 어디요?”
“저기.”
‘왕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아리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저기 아무나 가는 곳 아니에요. 가격이 골드 단위로 시작한다고요.”
“괜찮아.”
아리나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도, 도, 돈으로 절 꼬실 생각이면 소, 소용없어요.”
“개소리 말고.”
일행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를 지키던 남자가 팔을 들어 막았다.
“꺼져라. 아무나 들어오는 곳 아니다.”
“…….”
이건 또 무슨 흔한 시추에이션이야.
너무 전형적이라 말문이 막혀 있는데, 아리나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냥 고기 없는 고기 수프 먹을래요.”
얜 갑자기 왜 이리 소시민적이냐.
한숨 쉬고 품속에서 패를 꺼내 들었다.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대행을 의미하는 패.
임무 맡으면서 받아 왔다. 그 소유의 음식점에서 일하면서 못 알아볼 리 없겠지. 이런 사소한 일에 드잡이질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대충 먹고 마녀나 찾아야지.
문제는 놈이 그걸 보고도 멀뚱히 보고만 있다는 거다.
“뭐 어쩌라는 거냐?”
“……이 패 몰라요?”
“관심 없다, 꼬맹아. 가서 고기 없는 고기 수프나 처먹어.”
그러니까 시X 그게 대체 뭐냐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테이어 테르베로츠님 대행을 뜻하는 패예요.”
“테이어 테르베로츠?”
남자가 코웃음 쳤다.
“꼬맹이가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그분 이름을 함부로 말해? 여기가 노블레스 소유인 건 알고 하는 소리냐?”
“허어…….”
그렇게 자부심 넘치면서 이걸 못 알아봐?
신참인가?
지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군상이다.
단체에 과한 소속감을 가진 유형. 적당하면 나쁘지 않은데, 언제나 과한 게 문제다.
지가 노블레스도 아니면서. 난 그 후계자랑 말까는 사인데.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뒤지기 싫으면.”
“아재, 후회하지 말고 안에서 지배인 불러와요.”
“뭐? 이 꼬맹이가 돌았나…….”
“성-기사.”
남자가 때릴 듯 다가오자 라키안이 앞을 막아섰다. 남자는 인상 찌푸렸지만, 더 다가오지는 못했다.
반응 다른 거 보소.
억울해서 얼른 몸 키우든가 해야지.
그 상태로 얼마나 대치했을까. 가게 안에서 중년인 하나가 나왔다.
“무슨 일이냐?”
“지, 지배인님.”
남자가 재빨리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웬 떨거지들이 들어온다고 설쳐대서…….”
“떨거지?”
지배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쪽이 아니라, 말한 사내를 향해서.
“그걸 누가 판단하랬지?”
“예?”
“일주일 된 자네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
“그, 그건…….”
“이 일은 추후 문책하도록 하지.”
그러고는 우리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야 말 통하는 사람이 나왔네.
“그럼 이제 들어가 봐도 되죠?”
“아니. 판단할 사람이 잘못된 거지, 판단 자체는 옳은 것 같군. 여긴 레이튼의 버러지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
2절 에반데…….
한숨을 내쉬고 다시 패를 꺼내 들었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지배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 * *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그만 됐어요.”
“음식값은 안 받을 테니 부디…….”
“테이어님에게 말하지 말라는 거죠? 좋아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원하는 만큼 드십시오!”
연신 허리를 숙이던 지배인이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공짜로 먹는 건 좋은데, 여전히 기분은 나빴다.
약속은 테이어 테르베로츠에게 말하지 않는 것. 자이어한테 말하는 건 상관없겠지. 녀석이 그대로 아버지한테 얘기하는 건 나와 상관없는 일 아닌가. 약속대로 테이어 테르베로츠한테 말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됐으니 눈치 보지 말고 먹고 싶은 만큼 시켜요.”
“지, 진짜 괜찮아요?”
“공짜라는데 뭐.”
아리나가 떨리는 눈으로 메뉴판을 바라봤다.
“메뉴를 봐도 뭔지 모르겠어요.”
“고기만 있는 걸로 싹 가져오라 하면 되지.”
“그런 방법이!”
고개 끄덕이는 녀석을 뒤로하고 라키안을 바라봤다.
“라키안 경은 뭘로 드시겠습니까?”
“성기-사.”
“……그냥 전부 가져오라 하면 되겠군요.”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마치자, 아리나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주교님이 말해 줬어요?”
“뭘?”
“저 야채 잘 못 먹는 거요.”
“아니. 얼굴에 쓰여 있다니까.”
“진짜 그게 티 나나?”
아리나가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게 티가 나겠냐?
“어릴 때부터 식물만 먹었다 하면 구역질했거든요. 주교님이 편식한다고 많이 혼냈는데.”
“육식이 맞는 체질인가 보지.”
“……그렇게 말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아리나가 턱을 괴었다.
“만날 편식한다며 잔소리만 하고. 몸에 안 받는 걸 어떡해요?”
“요즘도 그래? 구역질.”
“요즘은 안 그래요. 아니면 굶어 죽었죠. 매끼 고기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한숨을 쉰 아리나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먹기는 힘들어요. 억지로 넣는 거지. 그래서 저는 돈 많이 벌고 매끼 고기만 먹을 거예요.”
돈에 집착한다는 설정은 넣었지만, 저런 목적은 처음 듣는데. 소박하다고 하긴 힘들겠다. 실제로 매끼 고기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은 세계니까.
“어쨌든, 그런 식으로 말해 줘서 고마워요. 한 끼 사 주고 말 사이라 대충 말한 건 알지만.”
“아니. 난 진짜 이해해.”
“네?”
의아한 듯 되묻는 아리나를 내버려 두고 생각에 잠겼다.
‘하프 엘프.’
엘프와 인간의 혼혈.
아직 본인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육식인 엘프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채식이 힘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입도 못 대는 것보다는 낫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