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5)
테이어 테르베로츠에게 요구한 건 두 가지다.
흑철석 갑옷의 수출권과 영멸초.
갑옷을 만든 건 좋은데, 기사 전력 동나 있는 레이튼에서 팔아먹을 물건은 아니다.
3 왕국으로 수출해야 한다는 소리다.
때문에, 노블레스의 도움이 필수.
그걸 공짜나 다름없는 수수료로 해결했다.
“인생은 타이밍이지.”
억지로라도 끼어들어야 하는 일에 보상까지 챙겨 주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구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곤 하지만, 영멸초까지.
“슬슬 마력 수련도 준비해야 하니까.”
영멸초.
자란 후 3일이면 소멸해 버린다고 붙은 이름인데, 용도는 아무도 모른다.
극소량만 자라 구하기가 불가능에 가깝고, 소멸을 막기 위해 운반 시 특수 제작된 보관함을 써야 한다.
즉, 존X 비싸다는 소리다.
진짜 문제는 돈이 있다고 얻을 수 있는 물건도 아니라는 것. 겔리안에서만 자라는데, 거기서도 엘프만 수확이 가능하다.
인간을 배척하는 겔리안.
그중에서도 인간 혐오로 유명한 엘프들과 거래를 터야 한다는 건데, 사실상 지금 내 상황에서 구하기는 불가능하다.
안 그래도 어떻게 얻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이렇게라도 얻으니 다행이지.
운이 좋았다.
용도도 모르는데 특이한 특성 탓에 연구 목적으로 많이 쓰여서 더더욱 구하기 힘드니까.
그 쓰임새를 아는 것은 지금 이 세계에서 나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가져가는 게 맞지 않겠는가?
‘공백의 시대’에 존재하던 영약 레시피.
영멸초와 다른 재료들을 섞어 마력에 속성을 부여하는, 오직 나만 아는 조합법. 그 기틀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
상념을 멈추고 하얀 건물을 바라봤다.
키탄의 신전.
내가 설정한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렇게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감회가 새롭다.
안으로 들어가자 예배 온 신자들이 몇 보였다.
수가 꽤 되기는 하지만, 벨리아 대륙 최대 종교라기에는 현저히 부족한 숫자. 레이튼의 경기불황이 신전에까지 찾아온 건가.
내부를 구경하는데, 신관 복장의 소녀가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성금하러 오셨나요, 헌금하러 오셨나요?”
“……차이점이 있나?”
“성금은 내주신 분에게 감사하며 저희가 사용하고, 헌금은 키탄님에게 감사하며 저희가 사용하죠.”
“둘 다 아닌데.”
“아, 돈 안 되는 일로 오셨구나. 들어온 그대로 나가시면 돼요.”
“…….”
절로 한숨이 나왔다.
‘황금 십자가’ 아리나.
키탄의 유일한 성녀가 되는 캐릭터였다.
* * *
“존X 어이없지 않아요?”
“네가 신관이라는 게 존X 어이없는데.”
“제가 뭐 어때서요? 저는 인생을 날로 먹게 해 주는 키탄님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 생각이 존X 쓰레기 같아.”
“쓰레기…… 뭔가 좋은 말 같아요. 돈이 안 들잖아요.”
“…….”
실제로 보니 더 암담하네. 어쩌다가 이런 캐릭터를 만들었지?
“아무튼, 저는 견습이라고요. 마녀사냥이라니. 그런 돈 안 되는……, 위험한 임무를 맡기다니. 주교님이 돌아 버린 걸까요?”
“입 놀리는 걸 보니 주교가 이참에 널 죽일 생각인 거 아닐까?”
“그럴 리가요! 주교님이 저를 얼마나 예뻐하시는지 몰라서 하는 말이죠?”
“너 같은 녀석도 예뻐한다면 그거야말로 신관의 귀감이긴 하네.”
한숨 쉬며 몸을 풀었다.
벌써부터 피곤하다.
‘황금 십자가’ 아리나 골드베리. 오면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마녀사냥까지 같이 갈 줄이야. 내가 만든 캐릭터를 보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만난 순간에서 끝내고 싶다.
“근데 그쪽은 뭐 하는 사람인데 이런 일을 맡았어요? 저랑 나이 차도 별로 안나 보이는데.”
“그냥 참관인이라고 생각해.”
“날로 먹겠다는 뜻인가요?”
귀신같네.
“애초에 마녀사냥은 신전의 일이잖아. 난 그냥 들러리.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의미로 세워 둔 덤이지.”
“인생 편히 살아서 부럽네요.”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다.”
키탄 덕분에 인생을 날로 먹니 뭐니 하던 애가 할 말인가? 나는 이 개떡 같은 곳에 떨어졌음에도 나름 열심히 살고 있다 자부한다.
아리나가 손에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주교님은 진짜 무슨 생각인 걸까요? 견습 신관, 들러리. 혹시 그쪽도 테이어 테르베로츠라는 사람한테 미움 샀어요?”
“주교한테 예쁨받는다며?”
“이렇게 되면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죠. 지금 신을 갈아타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무슨 직장이라도 바꾸듯 말하고 있다.
키탄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없잖아. 그냥 돈 되는 신이면 다 괜찮다는 거다.
아무리 급해도 이런 걸 성녀로 만드는 건 무리수 아니냐? 대답하지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신관은 할 생각 없어 보였으니까.
내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리나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느 신한테 갈지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들어왔다.
아리나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주교님! 정말 저를 죽일 생각이신가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게냐.”
“마녀사냥이라뇨! 제가 미운 게 아니라면 어찌 그러겠어요? 저, 가이아 신전으로 옮길까 고민 중이에요.”
노인이 크게 한숨 쉬었다.
고생하는 게 훤히 보이는데.
“이미 얘기해 봤는데, 안 받아준다더구나.”
“진짜 저를 보낼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이 얘기는 그만하자.”
노인이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아무리 봐도 예쁨받는 거 같지는 않은데, 그게 너무 다행이었다. 적어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가졌다는 거니까.
“부끄러운 꼴을 보여드렸소. 레이튼에서 주교 자리를 맡고 있는 주신, 키탄님의 종이오.”
“리안이라고 합니다. 테이어 테르베로츠 가주님의 임무를 받아 왔습니다.”
성호를 그으며 말하는 노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답례했다. 나는 신도가 아니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
“감사한 일이오. 키탄님의 가호가 있기를.”
노인이 다시 성호를 그으며 기도했다.
“힘든 발걸음을 해 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이번 임무는 할 일이 별로 없을게요.”
“왜요?”
가만히 듣고 있던 아리나가 물었다.
“이번에 지목받은 시르케는 이미 마녀재판을 통과한 자. 대체 왜 이런 일에 신패를 사용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끔찍한 재판을 다시 받게 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씀이세요?”
“신패가 나온 이상 교단에서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한다. 재판을 치르는 척, 한 달 정도 숨겨 둘 게야. 너는 사정을 설명하고 데려오면 된단다.”
“아, 뭐야. 간단한 일이잖아요. 저는 주교님이 저를 버리신 거 아닐까 걱정했다고요.”
그 말에 노인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버리고 싶다는 얼굴 같은데. 설마 진짜 버림 패로 쓰려는 건 아니겠지?
불안해져서 물었다.
“시르케의 위치는 파악된 상태입니까?”
“음…… 그게 문제요. 사실, 며칠 전부터 마녀 사냥꾼과의 연락이 끊겼소.”
며칠 전이면 나를 습격한 이후다. 당분간 몸을 숨긴다며 사라졌을 때.
“지금 신전의 성기사가 다른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오. 아마 내일이면 돌아올 텐데……. 그전까지는 알아보도록 하겠소.”
“흠…….”
마녀사냥은 신관과 성기사, 2인 1조가 기본. 시늉이라도 겉보기는 맞춘다는 건가.
그보다, 지금 레이튼 신전에 있을 성기사가 누구지?
아무리 내가 개발했지만, 본편에 등장하지도 않는 시점의 설정을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짜지는 않았다.
“성기사님 성함을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소. 성기사의 이름은 라-키탄-안티그란이오.”
“…….”
라키안, 그 수다쟁이 새끼?
황금 십자가에, 수다쟁이. 이 신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다만, 그는 현재 묵언 수행 중이니 혹여나 만나더라도 오해치 않았으면 좋겠소.”
“묵언 수행…… 말입니까?”
“그렇소. 레이튼에 오기 전부터 하고 있었다더군. 요즘은 하는 자가 드문 수행인데, 매우 신실한 기사요.”
“……그렇군요.”
놈이 자진해서 그런 짓을 벌였을 리는 없고, 아마 전에 있던 신전에서 아가리 좀 싸 물라고 강제시킨 게 아닐까? 그리곤 레이튼에 투척. 개연성 완벽하다.
성기사마저 짬 처리되는 도시.
진짜 얼른 뜨든가 해야 하는데. 다행이긴 하다. 적어도 내 귀는 보호받을 수 있을 테니까.
“사실 이런 임무에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내지. 아, 오해는 마시오. 귀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그분 실력이 굉장한가 보군요.”
“무려 3급의 성기사니 말이오. 그런 기사를 보내 준 교황청에 감사할 뿐이오.”
“…….”
묵언 수행이 끝난 후에도 그런 소리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개막장 레이튼의 주교인데, 황금 십자가와 수다쟁이까지. 동정심이 생긴다.
그때 손에 턱을 괴고 있던 아리나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기사님 조금 이상해요. 만날 이상한 말만 중얼거린단 말이야.”
……묵언 수행 중이라지 않았나?
내가 물으려는 순간, 주교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버릇없는 말은 그만두어라. 견습 신관이 함부로 얘기할 분이 아니다.”
주교의 말에 아리나가 찔끔거렸다.
“……그치만, 기사님도 말 걸어 주면 좋아하는걸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인사할 때마다 용돈 준단 말이에요.”
주교가 이마를 짚었다.
“너는…… 되었다. 말한다고 듣지도 않을 터이니.”
한숨을 내쉰 주교가 내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사정이라, 미안하지만 내일 다시 와 줄 수 있겠소?”
“물론이지요. 그럼, 내일 찾아오겠습니다.”
“키탄의 가호가 있기를.”
“내일 봐요!”
인사하는 둘에게 마주 꾸벅여 인사하고, 집으로 향했다.
* * *
“친구랑 놀다 오는 거야?”
다린이 천연덕스럽게 물어 온다.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 한숨이 나온다.
“다린, 왜 사람을 아무나 막 들여요?”
“응? 친구 아니었어?”
“…….”
묵비권을 행사했다.
꼬맹이랑 친구라고 하긴 자존심 상하고, 아니라고 하기엔 이미 말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친구보다는 따까리 정도로 표현해 줬으면 좋겠다.
“근데 어딜 다녀오는 거야?”
“잠시 신전에 좀요.”
“……신전?”
다린의 몸이 굳었다.
“……무슨 신전?”
“키탄의 신전에요.”
“어…….”
고개를 저은 다린이 말을 이었다.
“제가, 혹시 뭔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든가…….”
“무슨 마음의 준비요?”
“정체를 밝힐 생각인 게……?”
“밝힐 정체 없는데요.”
“아…… 아직 아니구나.”
아직이고 자시고 진짜 밝힐 정체가 없는데.
“아무튼, 아무나 막 들이지 마요. 가뜩이나 세상 흉흉한데. 암살자라도 오면 어쩌려고.”
“……허락받고 들어오는 암살자가 어디 있어?”
있으니까 말하지.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고 대충 인사한 후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녀사냥.
노블레스는 물론, 신전에서도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지만, 글쎄……. 바이론의 능력을 아는 나로서는 그리 생각하기 힘들었다.
마녀가 푸른 혈맥을 알아챈 경위 그리고 그걸 알아챈 바이론의 대응까지. 처음 들었을 때는 의아했는데, 이제는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사전 지식이 있으면, 벌어진 일들을 되짚어가는 건 간단하니까.
‘마녀의 트라우마…….’
사람 감정을 가지고 노는 녀석이니까, 일을 꾸민다면 그쪽이겠지. 시르케가 아직 마녀사냥에 대해 모른다면 쉽겠지만, 바이론이 개입된 이상 그럴 확률은 낮다.
간단한 일이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전투가 벌어질 확률이 높다는 소리다.
성녀 되기 전인 아리나의 전력은 논외로 치더라도, 3급 성기사와 내 능력이면 지지는 않겠지.
문제는 해명이다.
허울뿐인 마녀사냥이지만, 공격당한다면 장난으로 끝나진 않을 거다. 찔리는 게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진짜 재판을 재개하든가, 그 자리에서 죽이든가.
둘 중 하나려나?
‘아리나는 돈으로 매수하면 되고.’
문제는 라키안인데…….
말이 많은 것과는 별개로, 신앙심은 투철하니까. 이쪽을 설득할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시르케는 본편 시점에서 8성급 마녀인 동시에 마법의 발현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자. 말이 마녀지, 사실상 8성급 무영창 마법사를 이런 곳에서 잃을 수는 없다.
‘겸사겸사 내 편으로 만들면 더 좋고.’
내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곧 잠에 빠져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