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3)
“성공……!”
타냐가 밝게 외치다 입을 다물었다.
리안의 굳은 표정을 본 탓이다. 그제야 정신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리안과 자신은 물론, 방 안의 가구들도 전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뭔가 해냈다는 기쁨도 잠시.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비었다.
그녀도 안다.
자신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호의를 받았다는 것을. 리안이 아니었으면 뒷골목에서 시체로 굴러다니고 있을 거란 것도.
그 호의의 이유도 짐작이 갔다.
‘얼굴이지.’
자존감 낮아졌다고 눈이 안 달린 건 아니다.
적어도 외모에는 자신 있었다. 덮치려 한다는 생각은 착각이었지만, 반한 건 확실했다.
‘눈썰미는 좋아서.’
남장을 꿰뚫어 본 것도 모자라, 얼굴까지 알아보다니.
‘나, 나도 싫은 건 아니지만…….’
여태 도움받은 것과는 별개로, 평상시 행실도 그랬다. 말하는 건 무슨 시정잡배 같은데, 어른스럽고, 섬세했다. 침울해져 있을 때는 말 없이 옆을 지켜 줬고, 쭉 참던 눈물이 터져 나왔을 때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줬다.
모를 때는 전부 연기라 생각했지만, 전부 진짜였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안 돼.’
하지만 자신은 감정대로 행동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다.
제국은 멸망했지만, 3 왕국은 그녀를 발견하는 즉시 살해할 것이다. 남은 신하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결집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마음 편히 연애나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라는 소리다.
그렇다고 리안의 미움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사, 사과해야…….’
타냐가 입을 열려는 순간, 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
“미,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 그건 됐고.”
리안이 남은 한 장의 부적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거 들고 좀 따라와 봐.”
* * *
화르륵!
부적이 타오르며 사람 머리만 한 불꽃이 피어나고, 그 광경을 만들어 낸 타냐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봤다.
아니, 재능 있는 정도가 아니잖아.
처음 부적을 만든 술사가 기절하면 재능 있다고 평한다. 그 정도면 입문 자격은 충분하다.
두 개를 만들고 기절하면 기재라 평한다.
몇 년에 한 번 나오는 재능이다. 세 개를 만들고 기절하면 천재라 평한다. 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다.
타냐에게 세 개의 부적을 만들게 한 건 그런 의도다. 푸른 혈맥이라면, 십 년에 한 번 나올 재능은 될 테니까.
하지만 부적을 전부 만들어도 타냐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고, 재능이 없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부적에 힘이 깃들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세 개로는 기별도 안 간 거라면?
“…….”
‘동방의 마지막 용’ 급의 재능일 수도 있다.
“타냐, 이리 와 봐.”
내가 손짓하자 녀석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아까는 진짜로 미안…….”
“그건 됐다니까.”
“그래도…….”
순해진 건 좋은데, 적응 안 되네. 다시 싸가지 없게 굴라고 할 수도 없고.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 거면 그럴 필요 없어.”
“…….”
“푸른 혈맥은 제국에서도 극소수만 알던 정보라며? 그런 정보까지 아는 놈이 사람을 헷갈려?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치만…….”
“그치만은 무슨. 다시 틱틱댈 필요는 없는데, 너무 눈치 볼 필요도 없다는 소리야.”
“……그거 말고도 있잖아.”
“뭐?”
타냐가 우물쭈물하다 말을 이었다.
“나 더, 덮친다고 착각한 거…….”
“그건 내 잘못이라고 사과했잖아.”
“아니. 내 잘못이야.”
타냐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쪽이 노린 건 푸른 혈맥이고, 푸른 혈맥은 나야. 너는 나를 도우려는 생각이었고.”
“그쪽이 노린 건 나였어.”
“너 푸른 혈맥이야?”
“아니지.”
“그럼 그쪽이 노린 건 나야.”
“…….”
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고집 센 건 그대로다. 여기서 더 강요하는 것도 억지다.
지가 알아서 하겠지 뭐.
“이리 와서 부적이나 더 만들어 봐.”
“아, 알았어.”
귀찮을 법한 요구였는데도, 타냐의 표정은 오히려 밝게 변했다. 뭔가 할 수 있는 게 생겨서 기쁜 거겠지. 가르쳐 준 입장에서도 뿌듯했다.
“몇 개나 만들어?”
“만들 수 있는 만큼.”
“응.”
그러고는 조용히 글씨 쓰는 걸 지켜봤다.
부적이 다섯 개가 되는 시점에서 힘든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고, 부적이 아홉 개가 되는 시점에서 기절하듯 쓰러졌다.
아까 만든 세 개를 합하면 총합 열두 개.
“…….”
온갖 설정을 다 꿰고 있는 나지만, 처음부터 열두 개의 부적을 만드는 캐릭터는 들은 적도 없다. 확실하게 라이놀과 ‘동방의 마지막 용’ 에 버금가는 재능.
쓰러진 타냐를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띠링! 하고 경쾌한 알람 소리가 들렸다.
[스토리 분기! / 제국의 마지막 핏줄]
[포인트 +1,000]
제국의 마지막 황녀 ‘타냐 스트라우드’가 오랜 기다림 끝에 재능을 개화했습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포인트 1,000점이 주어집니다.
……이거 게임 장르가 다마고치 키우기였나?
* * *
“그게 무슨 수련이야?”
“원래 동대륙에선 다 그렇게 해.”
“……진짜?”
그럼 내가 거짓말 쳐서 뭐 하겠냐?
다음날, 깨어난 타냐에게 가르쳐 준 방법은 간단했다.
새벽에 일어나 명상할 것, 고기는 금하고 야채만 먹을 것.
일단 두 가지.
한창 자랄 청소년에게 채식주의 식단을 권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쩌겠나 원래 그런 수련인걸.
“새벽에 명상하는 건 이해가 돼. 검사들도 그런다고 들었으니까. 근데 고기는 왜?”
“영혼에 불순물이 생겨.”
“불순물?”
“남은 잔재 영혼이 섭취자의 영혼을 오염시킨다나 뭐라나. 진짠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실제로 채식하는 술사들이 더 강하긴 하니까. 꼭 지킬 필요는 없어.”
“안 먹을게.”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타냐의 표정이 밝았다.
고기 싫어하나? 잘만 먹던데.
“왜 기분 좋아 보이냐?”
“그 말대로면 귀쟁이들 영혼은 엄청 더럽다는 소리잖아.”
“아…….”
그러고 보니 얘 제국인, 그것도 황족이었지?
귀쟁이.
엘프를 멸시하는 말로, 제국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대륙에서 이종족 혐오가 제일 심한 게 제국이고, 황실에선 심지어 이종족 출입 금지령까지 내렸었으니까.
유저들이 부르길, 세계수탕스, 미트테리언.
언젠가는 만나야 할 텐데, 만나기 싫다……. 만나면 개 피곤할 것 같아서. 어쨌든 지금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나도 고기 많이 먹는데.”
“너, 너는…….”
타냐가 당황하며 한참을 망설였다.
“히, 힘이 세니까 괜찮아.”
“영혼이 구더기여도?”
“……그 정돈 아닐 거야.”
“네가 어떻게 알아? 영혼이라도 보이나?”
“그, 그건.”
“농담이야.”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부적도 틈날 때마다 만들어 둬. 나중에 종류 몇 가지 더 알려 줄게. 이제 할 줄 아는 거 생겼다고 운동 빼먹을 생각 말고.”
“……저기.”
“왜? 술사도 어차피 체력은 필요해.”
“아니, 그게 아니고…… 그, 고마워.”
그리고는 꾸벅. 고개 숙였다.
“처음에 나 구해 준 것도, 신관을 불러 준 것도, 이것저것 가르쳐 준 것도, 지켜 준 것도, 이런 기술을 알려 준 것까지 전부.”
황녀라는 걸 알고 도와준 거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감사 인사를 받으니 뿌듯하긴 했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도 틱틱대던 녀석이 하는 말 아닌가. 흐뭇하게 고개 숙인 모습을 바라보는데, 타냐가 곧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네 마음을 받아 줄 순 없어.”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정신이 확 드네.
“미, 미안해. 네가 싫다거나 하는 게 아니고, 아까 말했듯이 나는 황녀니까…… 그런 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내가, 널, 좋아한다고?”
“……아니야?”
“미쳤냐?”
벨리아 대륙 전적.
0고백 1차임. 그것도 10대 꼬맹이 상대로. 실화냐?
“아, 알겠어. 넘어가고 싶으면 그렇게 할게.”
“넘어가긴 뭘 넘어가? 나 너 안 좋아한다고.”
“응. 알았어…….”
“아니, 말로만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 너. 안 좋아한다고.”
“응…… 그런 걸로 할게.”
“미치겠네.”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참을 인을 새겼다.
세 번이면 살인도 막아준다더니, 두 번째부터 고비가 온다.
“그, 그래도 나중에 어쩌면…….”
“계속 헛소리할 거면 방에 가서 부적이라도 써.”
“……미안. 나도 받아 주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 가라고!”
녀석이 고개 숙인 채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한숨 쉬었다.
개 스트레스받네.
쟨 왜 계속 되도 않는 착각이지? 그렇게 자신 있나? 자신이 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후우…….”
기분이라도 환기시켜야지.
‘콘솔 창.’
[명령어를 입력하세요.]
[현재 포인트: 2,000]
오랜만에 보는 콘솔 창.
포인트를 보니 절로 뿌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힐링 되네.
항상 포인트를 1,000 정도는 남겨 둘 생각이었는데, 이번에 여유가 생겼으니 쓸 수 있겠다.
바이론 그 새끼가 언제 발작할지 모르는 상태니까 대비도 필요하긴 하다.
‘SK-2-25 획득.’
[SK-2-25의 획득에는 2,000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창을 닫아 버렸다.
SK-2-25, B등급 스킬 부동심.
바이론과 싸울 때 필수 스킬이다. 마침 소모 포인트가 보유 포인트랑 같기는 한데, 다 쓰긴 아깝다. 무엇보다 아끼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그랬다.
‘SK-2-14 획득.’
[SK-2-14의 획득에는 500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획득한다.’
SK-2-14, C등급 스킬 냉철함. 부동심의 하위 스킬이다.
‘SK-2-14를 SK-2-25로 변경.’
[코드의 변경에 500포인트가 소모됩니다.]
[변경 완료되었습니다]
[현재 포인트: 1,000]
「부동심(B)」
―소유자가 원할 경우,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한다.
간단하지만, 확실한 효과.
그래. 이거면 참을 인도 필요 없지. 세 번째까지 인내심이 버틸지 나도 확신 못 할 상황이었으니까, 타이밍도 딱 맞다.
“평민!”
개운하게 기지개 켜는데,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겠지.
훈련장에서 들릴 목소리도 아니었을뿐더러, 오늘은 더 이상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하는데, 끝내 목소리가 날 붙잡았다.
“평민. 귀도 안 좋은가?”
“……네가 왜 여기 있냐?”
“친우의 집에 찾아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평민.”
“집 안에서 보게 되는 건 이상한 일이지. 여긴 사유지야.”
존X 어이없네.
여기는 무단침입 처벌 안 하나? 그러고 보니 안 하는구나. 레이튼에 뭘 바라냐.
“사람을 범죄자처럼 보지 마라, 평민. 분명하게 허락을 받고 들어왔다.”
“누구한테?”
“다린이라는 하녀였다.”
“그쪽이 집주인이다. 그리고, 왜 허락을 하녀한테 받아?”
“무슨 소린가, 평민. 당연히 아랫것에게 받지. 주인이 문지기 노릇을 한단 말인가?”
“…….”
귀족의 관점은 알 수가 없네.
이런 쪽까지 설정하진 않았으니까. 아니, 애초에 귀족도 아니잖아. 그냥 돈 많은 상인이지.
자이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쪽이 집주인이라고? 궁핍하게 생긴 것이 하녀를 빼다 박아 놓은 모습이었는데…….”
다린이 들었으면 바로 마법을 날려 버렸을 텐데.
“그건 됐고, 왜 온 건데?”
“친우의 집에 용건이 있어야만 찾아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용건 없으면 들어간다.”
“자, 잠깐 기다려라, 평민!”
몸을 돌리자 자이어 테르베로츠가 급히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건 뭔데?”
“용병 일도 한다고 들었다.”
“내가 아니고 집주인 쪽. 난 용병 패도 없어.”
“그건…… 이상하군. 아버지가 분명 평민에게 전달하라 하였는데.”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내게 의뢰를? 어째 안 좋은 예감밖에 안 드는데.
“무슨 일인데?”
“마녀사냥이다.”
……부동심 익혀 두길 잘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