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2)
도시로 돌아오고 며칠이 지났다.
마녀는 당분간 몸을 숨긴다며 사라졌고, 바이론은 아직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놈은 얼핏 보면 막가파로 느끼기 쉽지만, 굉장히 신중한 편이다. 그런 전력으로도 패배한 이유를 알아내기 전에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즉, 운동할 시간이 생겼다는 소리다.
“읏차.”
흑철석으로 만든 아령을 들어 올렸다.
팔에 느껴지는 뻐근한 감각. 장갑의 능력까지 동원했는데, 벌써 익숙해진 느낌이다.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걸 새로 만들어야 하나…….
지구였으면 ‘3대 2,000 밑으로 운동한다 말하지 마라.’ 같은 영상으로 어그로 오지게 끌었을 텐데. 1,000만 구독자 달성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아니, 해부당하는 게 먼저였으려나.
“…….”
지구를 생각하니 조금 울적해졌다.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마음 여린 내가 견디기에는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탓이다.
하다못해 3 왕국에서라도 태어나게 해 주지.
최소한의 치안은 잡혀 있잖아. 2부 주인공을 찾아볼 수도 있고.
시X. 왜 하필 레이튼이냐.
“후우…….”
숨을 내쉬며 아령을 내려놨다.
상체는 얼추 마쳤으니 이제 하체 운동해야지. 몸을 풀려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저기…….”
“응?”
뒤돌아보니 타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해받은 일도 있다 보니 한동안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저 녀석 쪽에서 먼저 말을 거는 건 처음이다.
“무슨 일이야?”
“할 얘기가 있어서…….”
“뭔데?”
내 물음에도 타냐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눈을 깔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초인 특성 없었으면 못 들었겠다.
“여기서 얘기하기는 좀…….”
“음…… 그럼 다른 데로 갈까?”
“아, 아니야. 나중에 내가 방으로 갈게.”
“방으로? 뭐, 그래라.”
녀석은 답을 듣자마자 쪼르르 사라졌다.
대체 뭔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빌드업을 하지? 사람 불안하게.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기에, 다시 하체 운동을 시작했다. 해 봐야 또 집 나간다는 가출 선언 정도겠지.
태평하게 생각하자.
그리고 저녁. 타냐가 방에 찾아왔을 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 카디안 제국의 황녀야.”
“어…….”
존X 당황스럽네.
그걸 나한테 왜 얘기하냐?
* * *
“그러니까, 네가 황녀다. 이 말이지?”
“……응.”
“음…….”
안다. 아는데, 그걸 왜 얘기하냐? 본인 목숨보다 중요한 정보를.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자, 타냐가 움찔거렸다.
“미, 믿기 힘든 거 알아. 하지만 너한텐 얘기해야만 했어.”
“왜?”
오해한 게 미안하면 사과하면 그만이다. 내 멋대로 착각하고 끌고 간 것이 기분 나쁘면, 화를 내면 그만이다.
대체 황녀이면서, 푸른 혈맥이란 걸 밝힐 필요가 뭐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의문을 담아 쳐다보자, 타냐가 눈길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 나를 찾는 게 맞을 거야.”
“뭐?”
“푸른 혈맥은…… 나니까.”
아.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알겠다.
“푸른 혈맥은 황족 중에서도 일부만 물려받는 특성이야. 나, 나는 아무 능력도 없지만…….”
타냐는 말하기 괴로운지,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제국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기밀 정보고, 남은 건 나 하나뿐이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랑 널 착각한 거 같아.”
“…….”
이걸 뭐라 해야 하지.
착각한 건 맞는데, 쟤랑 나를 착각한 건 아니다. 바이론 그 새끼 혼자 뻘짓 하는 거지. 굳이 따지고 들자면, 오히려 날벼락 맞은 건 저 녀석 쪽. 아직 걸리지도 않았는데 내 옆에 있다 처맞은 꼴이다.
“음…….”
뭐, 상관없나.
어차피 스토리 진행대로라면 바이론에게 걸려 사망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 새끼 혼자 뻘짓 하는 게 내 잘못은 아니지.
그렇게 납득하는데, 타냐가 문에 기대앉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나갈게.”
“뭐?”
“바이론이라는 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푸른 혈맥이라고 밝힐 거야.”
“하이고.”
나도 모르게 노친네 같은 소리가 튀어 나갔다.
“너, 바이론이 뭐 하는 새끼인 줄은 알아?”
“몰라. 모르지만, 내 책임은 내가…….”
“변태 새낀 것도 모른단 소리네.”
“벼, 변태, 뭐?”
타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뭔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그쪽 아니다.
“그 새낀 다른 사람 고통을 즐기는 변태 새끼야. 아마 너 잡히면 매달아 놓고 손가락부터 뽑아 버릴걸?”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무 겁줬나? 아니, 사실은 이것도 엄청나게 순화해서 말한 거다.
“그, 그래도 내가…….”
“됐고, 그냥 가만히 있어. 어차피 바이론과는 끝을 내야 하니까. 네가 가서 ‘착각하셨으니 저로 봐주세요.’ 이러면 끝날 거 같아? 우린 저쪽 부하도 죽여 버렸는데?”
“…….”
타냐는 한참을 바닥만 쳐다보다 울먹거렸다.
“미, 미안…… 미안해…….”
“…….”
“그래도…… 그러면, 나는 어떡해야 해? 나는…… 나, 아무것도 못 하는데…….”
그러고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문제는 저거다. 바이론도, 모자란 재능도 아닌, 낮은 자존감.
푸른 혈맥인 시점에서 재능이 없을 리가 없지만, 없다 해도 별문제는 아니다. 저 녀석 신분만 해도 어딘가.
미친개 아이언의 양딸, 제국의 마지막 황녀.
현재 시점에서 이만큼 중요한 존재가 있나 싶을 정도다. 무려 1부 주인공과 제국 기사들의 연결 고리니까.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하며 이끌어 줘야 하는데, 저러고 있으면 곤란했다.
“잠깐 기다려 봐.”
그렇게 말하고 책상으로 다가가자 녀석이 눈만 빼꼼 내밀고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을 무시하고, 서랍을 뒤져 찾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구한 지는 꽤 됐는데, 혹시 여기도 재능 없으면 자존감 나락으로 떨어질까 봐 건네주지 않고 있던 물건.
그걸 집어 들고 타냐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도(道)에 대해 알아?”
* * *
동대륙.
존X게 멀어서 거의 단절된 수준이지만, 교류가 없는 건 아니다.
‘해방 왕’의 동료 중에는 동대륙의 인간도 있고, 제국의 기사들도 거기 있는 상태 아닌가.
그럼 교류가 많으냐?
그렇진 않다.
사실상 저게 교류의 전부라. 서로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긴 하다.
즉, 대충 어떻게 산다더라, 어떤 기술을 쓴다더라, 같은 대략적인 정보만 알고 있을 뿐이다.
게임에 등장하는 지역도 아니다.
설정으로만 쑤셔 넣었지.
그렇다고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무협지 세계관이다. 검기 날리고, 요괴 나오고, 뭐 그런 동네.
안 그래도 서로 아는 게 적은데, 더 마이너 쪽으로 가면 ‘부적술’이 나온다.
여기서는 ‘와! 동양의 신비!’ 정도.
동대륙 사람은 개나 소나 쓰는 기술인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동대륙에서도 극소수만 익히는 기술로, 거길 가도 배우기는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연이 닿지 않는 이상, 재능이 있어도 배우는 게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본고장인 동대륙에서도 그런데, 여기서 배우는 게 가능할 리 없다.
물론, 내가 없을 때의 얘기다.
나는 게임에 별로 등장하지도 않는 부적술 설정을 하나하나 짜 넣은 극한의 설정충이니까.
“거기는 조금 더 힘 있게.”
“……이렇게?”
“좋아. 잘하고 있어.”
타냐가 부적을 만드는 것을 바라봤다.
진짜 단순한 칭찬이었는데, 상기된 표정을 숨기려 애쓴다.
짠하다 그냥.
저 외모에, 저 성격에 불쌍해 보이는 것도 능력이다.
불쌍한 것과 별개로, 필체가 좋기는 했다.
마법은 ‘언어’로, 부적술은 ‘문자’로 힘을 발휘하니 글을 잘 쓰는 건 굉장한 장점이다.
진짜 재능 있을 수도 있겠는데?
얘가 뭐 흉내라도 내는 건 처음 봐서 나도 슬며시 기대감이 들었다.
쓰는 사람 보기 힘들고, 가르쳐 주는 사람 찾기는 더더욱 힘들지만, 일단 배워 두기만 하면 대인전에선 마법보다 낫다.
영창이 필요 없으니까.
게다가 푸른 혈맥의 능력은 재능이 개화할 때 발전한다. 무슨 능력이 생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엇이든 플러스알파인데 나쁠 거 없다.
“그건 글자 틀렸어. 이거 보고 따라 써 봐.”
“알았어.”
내가 쓴 걸 보이자 잠자코 따라 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전에는 강요해야 따라오는 느낌이었다면, 이젠 자진해서 따른다. 며칠 전 자해 협박하던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모습.
다마고치 키울 때 딱 이런 기분이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부적들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좋아. 이쪽은 불을 발사하는 부적이고, 저쪽은 물을 만들어 내는 부적. 그리고 이거는 신체를 강화시켜 주는 부적. 혹시 글자 쓴 다음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 없었어?”
“그런 건…… 없었는데.”
녀석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부적술에 대해 아는 건 아니겠지만, 마법은 알아서 나오는 반응이다. 보통 마법을 쓰면 몸에서 에너지가 빠지는 기분이라고 표현하니까.
또 자존감 떨어질까 봐 태연스레 입을 열었다.
“괜찮아, 부적술은 원래 그래.”
그러기는 개뿔.
재능 있는 놈이 처음 부적을 쓰면 최소 기절이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라나.
그런 점에서, 녀석이 부적 세 개를 멀쩡히 썼을 때부터 희망은 버렸다.
부적술도 아니구나…….
아직 동대륙의 모든 기술을 실험해 본 건 아니지만, 지금 시점에서 준비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다.
다른 것들은 3 왕국은 가야 구하지, 레이튼에는 없다. 3 왕국에서 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전까지 저 녀석 멘탈이 버틸지도 의문이다.
“고생했고. 일단, 늦었으니 돌아가서 쉬어. 내일 다시 얘기하자.”
결국 시간 끄는 거 말곤 할 게 없다는 소리다. 내일부터 운동 개빡세게 시켜서 다른 생각 할 틈도 없게 만들어야지.
기지개 켜며 일어나려는데, 녀석이 소리쳤다.
“지금 써 보고 싶어!”
그러고는 제 목소리에 지가 놀랐는지 고개 숙이고 말을 이었다.
“아, 안 돼……?”
“안 될 거야 없는데…….”
기대하는 눈빛을 보니 안 된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과는 궤가 다른 기술인 데다, 본인도 뭔가 되는 기분이 든 걸까. 저렇게 적극적인 건 처음 본다.
“정 그러면…… 이거라도 써 볼래?”
그리고는 신체 강화의 부적을 넘겼다. 방 안에서도 실험하기 적당한 능력이다.
“……어떻게 쓰는 거야?”
“아, 그냥 부적을 손에 들고 사용한다는 의지를…….”
화르륵!
“…….”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타냐의 손에 있던 부적이 불타며 사라져 버렸다.
뭐지? 진짜 재능 있는 건가?
일단 사용이 된 시점에서 재능 있다는 소리긴 한데…….
깜짝 놀라 손을 터는 녀석을 바라봤다.
“뭔가 바뀐 기분이 들어?”
“잘 모르겠는데…….”
“나 한 번 때려 봐.”
“어?”
팔을 내밀며 얘기하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대체 왜……?”
“얼마나 세졌나 보려고.”
“아…….”
“……뭔 생각했냐?”
“아, 아무것도.”
“바른대로 말해.”
목소리를 깔자 녀석이 몸을 움츠리고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 아까 변태라고…….”
“……바이론?”
그 새끼 이름이 지금 왜 나와.
“……괴롭히면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괴롭힘 받으면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게 난 줄 알았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참을 인을 새겼다.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지 않나. 이 정도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
“됐으니까 얼른 쳐 봐.”
“……진짜?”
“그럼 가짜로 하게? 얼른 쳐.”
내 말에도 한참을 망설이더니 이윽고 결심했는지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퍽!
“괘, 괜찮아?”
“음…….”
강해진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냥 별 느낌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내 몸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것도 웃겼다. 칼도 잘 안 들어가는 몸뚱인데, 스쿼트 10번에 뻗는 녀석 주먹에 아픈 게 더 이상하지.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저걸로 실험해 보자.”
물을 만들어 내는 부적 쪽을 가리켰다.
방 젖는 게 싫어서 미뤘는데, 저 수준 부적이면 물 한 컵 정도. 그 정도면 금방 마르겠지, 뭐.
“이것도 같은 방식으로 쓰면 돼?”
“그래. 가구 젖으면 안 되니까 저기 바닥 쪽으로.”
“알았어.”
타냐가 바닥 쪽으로 부적을 겨눴다.
곧이어 부적이 타오르고…….
쏴아아!
엄청난 양의 물이 온 방을 휩쓸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