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1)
땅이 부서지고, 숫자들이 사라졌다.
마법이 작용할 대상이 온전한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힘이 세다 수준이 아니잖아, 아저씨…….”
마녀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얼굴에 웃음기 없는 거 보면 연기도 아니다. 저쪽이 진짜 감정을 드러내는 건 드문데.
“아니, 마도구의 힘인가? 그거 능력이 뭐야?”
내가 그걸 왜 알려 주냐?
한마디 하려다 라이놀 쪽을 힐끗 보고 입을 열었다.
“무게를 더해 주는 마도구예요.”
“무게? 애매한데, 얼마나?”
“물건마다 달라서 뭐라 못 하겠네요. 지금 건 150킬로 정도?”
“능력은 보태기만 했다는 소리네. 마력도 감지 안 되는데, 진짜 순수한 힘이란 말이야?”
“그런 반응 너무 봐서 이젠 슬슬 질리네요.”
“으음. 그럼 이건 어때?”
마녀가 웃는 얼굴을 되찾았다.
“너, 마법이 형성되기 전에 감지할 수 있지?”
“…….”
아픈 곳을 찌르네.
애초에 그걸 노리고 저지른 일이긴 하다만.
“처음 두 번은 우연이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땅을 공격하는 건 말도 안 되잖아. 그치?”
“지렁이 찾을 생각이었다면 믿어 줄래요?”
“안 믿지.”
그래 주면 고맙고. 흥미 끄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슬슬 시간 됐다.
“그보다 어떻게 할래요?”
“응? 뭐를?”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녀에게 라이놀 쪽을 가리켰다.
“저쪽, 우리가 이겼는데.”
그곳에는 동상의 빔에 사망한 흉터남의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질문에 일일이 답변해 주고, 흥미를 끈 이유가 이거다.
시간 끌기.
“……아차. 깜빡했다.”
마녀가 놀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웃는 표정에 덤덤한 말투라 사람 놀리는 거 같다는 게 문제지만.
“으음…… 어떡하지.”
그러고는 고민하듯 고개를 숙였다.
녀석이 마녀의 능력을 드러내면 우리는 전멸이다.
‘덤덤’을 포함해도 이기는 건 불가능.
현재 시점에서 전력을 비교하는 게 우스운 수준이다. 하지만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살아 나갈 확률이 제로는 아니니까.
마녀인 걸 들킬 가능성이 1프로라도 있다면 녀석은 절대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설정이 달라졌을 가능성도 없다.
아까 내가 마녀를 언급한 건 그걸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보인 반응을 볼 때, 마녀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대로다.
과연, 마녀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음…… 투항하면 봐줄래?”
“그러죠, 뭐.”
“그럼 항복.”
긴장한 얼굴로 다가오는 라이놀과 다린을 보며 한숨 쉬었다.
드디어 레이튼 입단식이 끝났다.
* * *
“그래서, 저쪽 말이 사실이야?”
다린이 양손이 묶인 채 걷는 마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손을 못 쓴다고 영창을 못 하는 건 아니기에, 그냥 형식적인 절차다.
“뭐가요.”
“마법 형성 전에 감지할 수 있다는 거.”
“그건 또 어떻게 들었대.”
“말 돌리지 말고!”
“네, 맞아요.”
“악!”
갑자기 소리는 왜 지르고 난리야.
업혀 있는 타냐의 얼굴을 확인했다. 창백하긴 한데, 이 정도면 무난하다. 녀석은 싸움이 끝나자마자 기절해 버렸다.
애초에 얘 체력으로 거기까지 혼자 걸어간 게 더 신기하긴 하다.
대충 고쳐 업는데, 다린이 다시 소리 질렀다.
“마법사 다 굶어 죽게 하려고!”
“저만 가능한 거라 다른 사람 못 가르쳐 줘요.”
“그래도 발현 전에 마법 위치 아는 게 마법사 입장에서 얼마나 불리한데!”
마법 종류까지 알 수 있다고 하면 기절하겠네.
“그냥 일직선으로 향하는 마법이 절반은 되는데, 쓸 수 있는 마법을 강제당하는 꼴이잖아.”
“어차피 이제 현장 안 나온다면서요? 저랑 싸울 것도 아니고. 그럼 별 상관 없네.”
“어! 그렇네?”
그렇긴 뭘 그래. 마법사 취약점이 하나 더 생긴 꼴인데. 업계 종사자 입장에서 걱정 좀 해라.
“하아…….”
어찌 됐든 빚을 지게 된 셈이라, 다린에게 꾸벅. 고개 숙였다.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도와줘서 고마워요.”
“으, 응? 에이, 별거 아니었는데 뭐.”
“반응이 왜 그래요?”
“뭐, 뭐가?”
분명 온갖 자뻑은 다 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예전 라이놀이 후원자가 된다고 할 때도 같은 반응이었던 거 같다.
“또 뭐 받았어요?”
“억…….”
다린이 입을 열다 침음을 삼켰다.
뭔가 받았구나.
“저한테 받은 것도 아닌데 왜 제 눈치를 봐요? 그리고, 뭐 받았다 해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죠.”
“그, 그게…….”
말하기를 한참 망설이다 다린이 말을 이었다.
“그…… 사실 실험 도구를 받기로 하긴 했는데…….”
“근데요.”
“그, 오빠가 리안 네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제 허락이요?”
자기들 돈 쓰는데 왜 내 허락을 받아?
“보물고 물건 되찾은 건 전부 리안, 네 덕분이니까 지분도 너한테 있다고……. 그런 의미로 나 실험 도구 좀 사 주면 안 될까……?”
“네?”
이건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뭐 안 준다 해도 당연히 도왔을 거지만! 오가는 게 있으면 다음에도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잠깐 기다려 봐요. 처음 듣는 소리라.”
“누구 말씀인데 당연히 기다려야지!”
“오버하진 말고요.”
“아, 알겠어……요”
또 이상한 말투로 돌아온 다린을 무시하고 라이놀에게 다가갔다. 가끔 저러는데, 금방 촐싹거리는 통에 요즘은 내버려 두는 편이다.
“라이놀, 검술 가르쳐 준 거 잘 써먹었어요.”
“잘 써먹었다니 다행이긴 한데……. 그걸 검술이라 할 수 있나?”
“검 들고 휘두르면 검술이죠.”
“뭔가 아닌 거 같은데…….”
라이놀은 찜찜한 듯 침음을 흘렸지만, 마력 없는 처지에 이 정도면 훌륭한 검술이다.
땅을 부수는 건 초인의 몸과 장갑의 능력, 그리고 거인 살해의 검술. 셋 중 하나만 빠져도 불가능했으니까.
그냥 내려찍는다고 그 위력은 안 나온다.
“정말로 도움 됐어요. 가르쳐 줘서 고마워요. 이번 일 도와준 것도 고맙고요.”
꾸벅.
고개 숙이자 라이놀이 무안한 듯 코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근데 보물고 얘기는 어떻게 된 거예요?”
“안 그래도 얘기하려 했는데. 다린한테 들었어?”
“저한테 실험 도구 사 달라며 달라붙던데요.”
라이놀이 쓰게 웃었다.
“말 그대로야. 가문의 물건이긴 했지만, 우린 가문에서 쫓겨난 처지인 데다 표면적인 쪽이든, 숨겨진 쪽이든 물건을 되찾은 건 전부 리안, 너잖아.”
“음…….”
맞는 말이기도 했고, 틀린 말이기도 했다. 적어도 숨겨진 보물고 쪽은 라이놀이 없었으면 출입할 수 없었을 테니까.
표면적인 쪽은……. 확실히 내가 없으면 되찾기 힘들었을 거 같긴 한데, 나라고 딱히 뭐 한 건 없다.
어차피 테이어 테르베로츠는 살릴 생각이기도 했고.
“그래도 그걸 제가 다 갖는 건 좀 양심에 찔리는데.”
“다 갖기는. 벌써 허락 없이 집도 사고, 검술도 익혔는데. 그거면 충분해.”
“집엔 저도 살고 검술은 저도 가르쳐 줬잖아요.”
“집 명의는 나랑 다린으로 돼 있어.”
“허울뿐인 명의잖아요. 보장해 줄 국가도 없는.”
뭔가 더 얘기하려 하자, 라이놀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뭐라 말해도 바꿀 생각 없어. 애초부터 내가 가질 재산도 아니었고.”
“…….”
그 눈을 마주 보고 깨달았다.
라이놀은 내게 재산을 넘기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죄책감. 뒤늦게 도둑질한 기분이라도 들었나 보다.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이러는 건지.
사라진 가문의 생존자가 유산을 챙긴다고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령 호적 파인 걸 안다 해도 그냥 좀 쑥덕거리다 말겠지. 양심 하나 때문에 그 재산을 포기한다는 소리다.
가문이 저 둘에게 한 대우를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 같으면 쫓겨나는 날 털었다.
저런 놈이니 믿는 거긴 하지만.
“좋아요, 대신 돈 쓸 때 내 허락받을 필요는 없어요.”
“그건…….”
“자기 돈처럼 쓰라는 소리 아니에요. 투자하는 거지. 필요하면 부려 먹을 생각인데 약하면 안 되잖아요.”
라이놀이 쓰게 웃었다.
“……고맙다.”
“부려 먹을 거라니까 뭐가 고마워요?”
“죄책감 덜어 주려 한 소리인 거 알아.”
아닌데. 진짜 부려 먹을 생각인데.
애초에 나는 사람 쉽게 믿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다. 그러니까, 내 잘못 아닌 듯.
“착각은 자유니까요, 뭐.”
말을 마치고 마녀에게 가려는데, 눈치만 보고 있던 다린이 내게 다가왔다.
“저기…… 그럼 나도 써도 되는 거지?”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당연히 다린은 안 되죠.”
“어째서!”
“한 달도 안 돼서 다 써 버릴 거 같거든요.”
“하, 한 달은 아니야…….”
“그러면요?”
“세 달 정도……?”
“라이놀한테 허락 맡고 사요. 도와주셨으니 실험 도구는 사 드릴게요.”
사지 말라는 뜻이잖아! 라며 소리치는 다린을 내버려 두고 마녀에게 다가갔다.
“걸을 만해요?”
“응. 근데 이 정도로 충분해?”
마녀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정도 구속으로 괜찮냐는 뜻이다.
라이놀과 다린은 입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저 녀석은 마녀. 영창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는 인물이다. 뭐 어떻게 구속해도 마법 쓰는 걸 막지 못한다면 차라리 호감 사 두는 게 낫지.
“어차피 이제 바이론이랑 척진 건데, 굳이 우릴 공격할 이유가 없잖아요?”
마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이론 아저씨 알아? 그 아저씨 나름 정체 숨기려고 노력 많이 했는데.”
“대충 들은 건 있어요.”
“하긴, 아저씨 취향이기도 하고. 잡아 오라고 한 거 보면 아는 사이였어?”
“그 말하고 사과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남녀노소 안 가리는 고문광 새끼.
그중에서도 곱게 자란 면상을 좋아하는데, 내가 봐도 지금 상판대기는 놈 취향이 맞는 것 같아 더 기분 나쁘다.
“음…… 미안. 내가 이런 거 자주 까먹어서. 그쪽 목적이었으면 멀쩡하게 데려오라고 시켰겠구나. 아저씬 직접 자르는 걸 좋아하니까.”
“거, 역겨운 소린 그쯤 하고,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뭐가?”
알면서 모르는 척하긴. 인중에 딱밤 날리고 싶네.
“댁도 이제 레이튼에 살기 힘들 텐데 우리 쪽에 붙는 건 어때요?”
“으음……. 거절할게.”
“그래요, 그럼.”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태연히 고개를 돌리자, 마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끝이야?”
“싫다는 사람 뭘 굳이 잡아요?”
“나 잡혀 있는데. 협박할 수도 있잖아.”
지랄을 하네. 수틀리면 전부 죽일 생각이면서.
“어차피 이길 자신 있으니까요.”
“와, 자신이 과하네.”
마녀가 싱글벙글 웃었다.
“바이론 아저씨 능력도 모르면서.”
“감정 관련 능력.”
마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러게 왜 사람을 무시해?
“내가 그쪽보다 많이 알걸요.”
“…….”
마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한참 바라봤다.
놀랐겠지.
바이론 능력을 짐작이라도 하는 건 본인뿐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두려울 거다. 자신의 비밀과도 연관된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래야만 할 거다.
바이론의 능력도, 마녀의 설정도 전부 내가 만든 거니까. 이 세상에서 둘에 대해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소리다.
심지어 본인들을 포함해도.
“얼굴. 굳어 있어요.”
얼굴을 가리키며 말하자, 마녀가 손을 들어 본인 얼굴을 매만지고 다시 웃는 표정을 지었다.
“으음…… 거기까지 아는 줄은 몰랐는데. 나에 대해 아는 것도 있어?”
마녀의 빨간 눈동자가 위험스레 빛났다.
그 눈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마녀 재판의 유일한 생존자, 마녀인 동시에 마녀 사냥꾼, 무감정 증후군, 흑색 탑의 지배자. 유일의 마녀 시르케.
그 외에도 수많은 설정들이 떠올랐지만, 싱겁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