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0)
저 새끼가 지금 나 찾아왔다고 한 거 맞나?
푸른 혈맥 소리에 안색이 창백해진 타냐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 찾아온 거 맞아요? 쟤가 아니라?”
“푸른 혈맥의 리안. 여자라는 소리는 없었다.”
“…….”
푸른 혈맥? 누가? 내가? 왜?
애초에 나는 바이론과 접점이 전무하다. 그런데 뜬금없이 푸른 혈맥이라니.
“푸른 혈맥이 뭔지는 알아요?”
“모른다. 하지만 말을 꺼내면 알 거라더군.”
“뭐 다른 말은요?”
“없다.”
“…….”
누가 쩌리 아니랄까 봐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인상을 찌푸린 후 생각에 잠겼다.
바이론의 능력을 생각해 봤을 때, 나에 대해 알아도 이상할 건 없다.
레이튼 암흑가에서 놀고 있을 시기니까 전의 스캐빈져 새끼들 중에 부하가 있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단순히 신체 능력 좋은 걸 푸른 혈맥으로 착각한다는 건, 놈이 푸른 혈맥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뜻이 된다.
푸른 혈맥은 그런 식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니까.
방계의 방계의 방계라서 그런가?
바이론이 푸른 혈맥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에 대한 설정은 넣은 적 없다. 하지만 놈은 황족 취급도 못 받을 정도의 방계 출신. 푸른 혈맥이면서 푸른 혈맥에 대해 모른다 해도 이상하진 않다.
제국에서도 최고위급만 아는 비밀이니까.
내 불찰이다.
있는 설정만 신경 썼지, 채우지 않은 부분은 생각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정보력이 아무리 좋다 한들 바이론이 타냐를 노린다는 사실을 알아챌 리 없다. 아마 스캐빈져들과 나 사이에 있던 일들을 알아채고 다른 정보들을 취합, 추측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 정도로 끝난 게 차라리 다행이다.
타냐를 노릴 거라 생각하고 대비해 둔 상태니까. 설정만 믿고 있다가 거하게 뒤통수 맞을 뻔했네.
이러면 타냐를 지킨 게 아니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셈이 되는 건가?
어이없어서 벙쪄 있는데, 겁먹었다고 생각한 건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얌전히 따라오면 몸 성히 데려가 주지.”
벙찐 와중에도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놈한테 가느니 여기서 목매달고 말죠.”
남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바이론님을 아나?”
“변태 새낀 건 알아요.”
“……모르나 보군. 그분을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테니.”
“촌 동네에서 골목대장 하는 놈이 뭐 그리 무섭다고.”
흉터남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왜, 뭐?
바이론이 나중엔 대륙 단위로 쓰레기 짓 하는 거물이긴 한데, 지금은 레이튼에 짱박힌 골목대장 맞잖아.
“……정신이 나간 놈이었군.”
“댁이 내 정신 걱정해 줄 필요는 없고, 혼자 왔어요?”
“그건 네 놈이 신경 쓸 바 아니다. 혼자든 둘이든 끌려간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을 테니.”
“아가리 긴 거 보니 둘이네.”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자 흉터남의 얼굴이 붉어졌다.
“좋게 데려가려 해도 말을 듣지 않는군. 양팔을 잘라 주지. 다리는 봐주마, 업고 돌아가긴 싫으니까.”
“뭐래 X밥이.”
“……다리도 잘라 주마.”
흉터남이 달려들려고 할 때, 라이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큰 어른이 애 괴롭히는 건 너무하지 않나?”
“……사자검?”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니, 라이놀과 다린이 걸어오고 있었다.
타이밍 한번 예술이네.
걸어오는 둘을 멀뚱히 쳐다보던 흉터남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믿고 있던 게 고작 B등급 둘인가? 송장만 늘린 셈이다. 멍청한 녀석.”
“거, 성격 급하시네. 어련히 준비했겠지.”
재촉하는 흉터남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애초에 둘만으로 A등급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 없다. 라이놀이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체급이 다르지 않은가.
A등급, B등급.
한 등급 차이지만, 헤비급과 라이트급 이상의 격차가 난다. 하지만…….
“내가 괜히 이 멀리까지 왔겠어요?”
“……우리가 노리는 걸 눈치챈 상태였다고 말하려는 건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필요한 정보는 전부 얻었으니까.
‘우리’라고 지껄인 시점에서 최소 둘은 왔다는 소리가 된다. 온 게 누구인지는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대비는 끝냈으니까.
천천히 걸음을 옮겨 천으로 덮인 형체에 다가갔다.
가리지 않으면 너무 눈에 띄니까 도착하자마자 준비해 둔 위장. 천을 끌어 내리자 큼직한 동상이 드러났다.
7성급 마법사의 창조물, 보물고의 수호자.
일명 ‘덤덤’.
씨익 웃으며 흉터남을 향해 입을 열었다.
“뒤졌다고 복창해라.”
* * *
콰앙!
동상의 눈에서 뿜어진 광선이 땅을 파헤쳤다.
허겁지겁 피하는 흉터남에게 다린의 마법이 파고들었고, 그 마법마저 방어해 낸 남자에게 라이놀의 검격이 날아든다.
챙!
“젠장! 어째서 이런 곳에 저런 게……!”
라이놀의 검을 막은 흉터남이 소리 질렀다.
과연 명불허전.
X밥이니 뭐니 했지만, A등급은 확실히 무시무시한 전력이다. 저 정도면 사실 인간을 초월한 수준이니까.
“크윽……!”
하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지.
같은 A등급 안에서도 차이가 많이 난다.
흉터남은 그중 최약체.
A등급에 맞먹는 덤덤과 B등급 둘의 협공에는 오래 버틸 수 없을 거다.
이제 문제는 어디 박혀 있는지 모를 놈의 동료인데…….
흉터남이 쓰러지기 전에 협력자가 합류하면 우리의 패배, 먼저 쓰러지면 우리의 승리다.
놈의 동료를 찾기 위해 둘러보던 그때. 숲 한쪽에서 코드가 떠올랐다.
[NPC-2-142-3]
142번. 마녀.
젠장, 사천왕 최약체와 최강이라니, 이건 또 무슨 조합이냐.
새파랗게 질려 있는 타냐에게 소리쳤다.
“타냐, 저쪽으로 가 있어!”
녀석은 쓰러질 것 같이 휘청거리면서도,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코드가 떠오른 숲의 반대편이다.
이번 계획에서 가장 걱정되던 것은 타냐다.
자기보호 능력이 없다시피 한 녀석을 지켜야 하니까. 한데 타냐를 노리고 온 게 아니라니……. 걱정거리가 없어진 셈이다.
흉터남이 소리쳤다.
“마녀 사냥꾼! 언제까지 구경만 할 셈이냐!”
“구경만 하면 된다고 말한 건 너잖아.”
보라 머리의 여자가 기지개를 켜며 나왔다.
정말로 잠이라도 자다 온 듯한 노곤한 목소리. 마녀는 흉터남 쪽을 힐끗 본 다음 내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으음. 바이론 아저씨 취향이긴 하네.”
“왜 초면부터 사람 기분을 잡치세요?”
아무리 적이라도 말은 가려 해야지.
시작 전부터 정신 공격이라니, 페어플레이 모르나?
“음…… 미안! 지금 사과해야 하는 거 맞지?”
“네. 근데 많이 부족하네요. 저쪽 싸움 끝날 때까지 얌전히 있으면 용서해 드릴게요.”
진짜 고민하는 듯 눈을 감았던 마녀가 곧 눈을 떴다.
“생각 좀 해 봤는데, 그건 좀 곤란할 거 같아. 바이론 아저씨 화내면 무섭거든.”
저 녀석이면 통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날로 먹으려는 거였나?
그래도 일단 고민을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좀 더 꼬시면 어찌 될 거 같은데……. 입을 열려는 순간, 흉터남이 소리 질렀다.
“뭐 하는 거냐! 얼른 돕지 않고!”
그 말에 마녀가 흉터남 방향을 쳐다봤다.
“아, 정말 위험해 보이네. 다시 미안! 가 봐야 할 거 같아.”
저 녀석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쉽게 넘어갔을 거 같았는데, 도움 안 되는 새끼.
“그건 제가 안 되겠는데요, 저쪽은 제 보호자 비슷한 거라.”
“보호자 비슷한 건 뭐야?”
“말 그대로죠. 보호자 비슷한 거예요.”
“음……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날 이길 자신은 있는 거야? 나, 생각보다 센데.”
아무렴, 5성급인 동시에 마녀.
전투력만 보면 사실상 6성급 마법사 이상.
괜히 사천왕 최강이 아니다. 지금 내 실력으론 이기기는커녕 시간 끄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하지만 해볼 만했다.
이기는 건 무리지만, 시간을 끄는 정도라면.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마녀인 걸 숨긴 상태라 제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것이고.
“도망치면 안 되니까 기절만 시킬게.”
마녀가 주문을 영창…… 아니, 하는 척을 시작했다. 왜냐면 영창도 전에 수많은 숫자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으니까.
[MG-2-12]
물 속성 마법. 워터 붐.
이유 그 두 번째.
마법이 발현되기도 전에 종류와 위치를 알 수 있다면, 피하는 건 쉽다. 나는 모든 마법의 패턴을 꿰고 있으니까.
오른쪽 위에 형성되는 마법, 워터 붐의 운동 방향은 직진. 즉, 단방향. 마녀의 오른쪽 위치만 벗어나면 된다는 소리다.
태연하게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라?”
마녀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뭐지? 저기, 혹시 위치를 바꾼 이유라도 있어?”
“이쪽 경치가 더 좋아서요.”
“아……! 그건 어쩔 수 없지.”
허공을 날아다니던 숫자들이 사라졌다.
영창 취소.
마녀가 뒤이어 다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위치는 왼쪽, 종류는 아까와 같은 워터 붐.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어……?”
마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미안한데 아까 그 자리로 가 주면 안 될까?”
“싫은데요.”
“아까 그 자리가 경치가 더 좋다며?”
“여긴 경관이 좋네요.”
“같은 말 아니야?”
“한 글자나 차이 나는데 어떻게 같은 말이에요?”
“맞네……!”
맞긴 뭘 맞아? 머리라도 맞았나?
대화 수준에 한숨이 나오려는데, 이번에는 흉터남이 도움을 줬다. 소리쳐 마녀를 불렀기 때문이다.
“큭……! 대체 뭐 하는 거냐!”
마녀가 힐끗 그쪽을 바라봤다.
“쟤 진짜 약하네, 시간도 못 끌고. 할 수 없지. 어디 도망치면 안 돼. 귀찮단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마녀가 몸을 돌렸다.
흉터남을 도우러 갈 셈이다.
그건 내가 곤란하지.
적당한 크기의 돌을 주워 장갑의 능력으로 무게를 더했다. 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 100킬로 정도는 되겠다.
이거면 충분하지.
있는 힘껏 팔을 휘둘러 돌을 집어 던졌다.
“흐읍……!”
쉬이이익. 핑.
무서운 기세로 날아간 돌멩이가 마녀의 몸에 닿기 직전,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어? 뭐야?”
마녀가 의아한 듯 뒤쪽을 바라봤다.
“돌멩이……? 돌멩이에 자동요격마법이 발동해?”
자동요격마법.
마법사라면 매일 아침 필수 시전하는 마법으로, 시전자에게 ‘극심한’ 피해를 줄 수 있는 공격을 ‘한 번’ 방어해 준다.
몇 안 되는 마법사의 대인 기술 중 하나지만, 결국 일회용이라 그 후로는 배리어를 펼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영창 생략이 가능한 마녀라면 자동요격마법을 재시전하면 끝이긴 한데…….
“설마 마녀도 아니면서 무영창을 하는 건 아니죠?”
고민하듯 머리를 꼬고 있던 마녀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당연하지, 난 마녀가 아니니까.”
그러시겠지.
태연히 돌멩이를 주워 들자 마녀가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끼고 있는 그 장갑, 마도구인가 봐? 무슨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죠, 뭐.”
“음…… 곤란하네. 그거 또 나한테 던질 거야?”
“가만히 있으면 안 던질게요.”
“그것도 곤란한데……. 멍멍이 더 못 버틸 거 같거든.”
마녀가 한숨 쉬었다.
웃는 얼굴이라 전혀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지만.
“으음. 할 수 없네. 가둬 두는 수밖에.”
그러고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MG-4-23]
땅 속성 마법. 가이아의 속박.
피시전자 근처의 땅을 이용해 가두는 마법.
내 주변 넓은 범위에 숫자들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뛴다면 못 피할 크기는 아니지만, 이왕 배운 검술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허리춤의 검을 뽑는데, 그걸 본 마녀가 입을 열었다.
“검으로 막을 수 있는 마법이 아닌데.”
그거야 대 봐야 아는 거고.
자세를 잡고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흐읍…….”
몸은 편히 늘어뜨리되, 복부에는 힘을.
발은 시원스레 내딛되, 다리에는 힘을.
검은 가볍게 쥐되, 팔에는 힘을.
장갑으로 무게를 더하고, 검을 내리꽂는다.
쉬이이익.
거인 살해의 검술.
존X 세게 내려치기.
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