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9)
“A등급?”
“네, 둘일 수도 있어요.”
“흠…….”
꿀꺽.
속으로 침을 삼켰다.
사실 라이놀과 다린이 이 일에 끼어들 이유는 없다. 최근 라이놀이 빠르게 강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A등급이 된 건 아니니까. 이득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소리다.
심지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워낙 민감한 정보인 데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물으면 둘러댈 말이 너무 궁했으니까.
그나마 라이놀이 상대니 말이라도 꺼내 보지, 다른 사람 상대였으면 얘기도 못 했을 거다.
계획대로라면 문제는 없겠지만, 혹시 두 명이 온다면 라이놀과 다린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
두 명이 아니길 기도하는 수밖에.
약간 긴장한 상태로 라이놀을 바라보는데, 그가 곧 입을 열었다.
“그래. 좋아.”
“……부탁한 입장에서 말하는 것도 뭐하지만, 너무 쉽게 승낙하는 거 아니에요?”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너무 쉽게 돕겠다는 답변이 고맙기도 하고,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얜 왜 이리 대책 없이 성격 좋지?
“별로 쉽게 승낙한 건 아닌데, 리안 너를 믿었을 뿐이야.”
“제 뭘 믿어요? 사람 함부로 믿지 말라니까.”
“일단 대책 없이 도와 달라고 할 것 같지도 않고…….”
라이놀이 나를 직시했다.
“아니면 대책 없어도 해야 할 만큼 세상에 중요한 문제겠지.”
“그건 뭔…….”
순간 손발 오그라들 뻔했네.
갑자기 뭔 거창한 소리지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제국 마지막 황녀의 목숨이면 그 정도로 중요하긴 하지. 그리고 나를 뭐라고 착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거창한 존재로 생각한다는 건 알겠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한데……요.”
“그럼 됐어. 다린한테는 내가 말해 둘게. 아직 시간 있다고 했지?”
“네.”
“그럼 그 전에 검술 좀 익혀 두는 게 좋겠다.”
그러더니 목검을 뽑아 나에게 던졌다.
날아오는 목검을 잡아채자, 라이놀이 이어 말했다.
“거인 살해의 검술이야.”
“……뭔 검술 이름이 그래요?”
이 게임 검술 수백 개는 꿰고 있는데 그런 이름의 검술은 처음 들어 본다.
“딱히 정해진 이름이 없는 검술이거든. 이번에 보물고에서 얻었지.”
“보물고에서요?”
“그래. 안에 있던 검술들을 싹 다 뒤져 봤어. 리안 네가 쓸 만한 검술이 있나 해서.”
“그건 좀 감동인데요.”
안 그래도 몸이 두 개는 되어야 할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으면서 내 검술까지 알아보고 있었단 말인가?
이런 사람한테 다른 일까지 떠넘긴 다린은 대체…….
“사실 검술이라기보단 검 휘두르는 법에 가까워. 마력 없이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검술이거든.”
지구에선 그런 걸 검술이라고 한다.
“사실 이것도 몸을 강화해야 하니 마력이 필요 없는 건 아닌데……, 리안 너는 상관없겠지.”
라이놀이 검을 들고 나를 마주 봤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배워 두자.”
“네.”
어차피 더 준비할 것도 없고, 운동만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 * *
“……왜 훈련을 거기까지 가는데?”
“기분 전환 삼아?”
검술을 수련한 지도 벌써 2주나 지났다.
슬슬 상대의 인내심이 바닥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도시에서 습격당하면 끝이다.
요컨대, 슬슬 움직여야 할 시점이 왔다는 뜻이다.
어차피 싸운다면 우리가 유리한 전장을 고르는 게 당연하잖은가. 저쪽은 분명 타냐를 노릴 테니 녀석을 데려가야 한다는 소린데…….
“…….”
아까부터 오묘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포기한 것 같기도 하고.
잠시 후 타냐가 입을 열었다.
“알겠어.”
그러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
진짜 뭐지? 괜히 찝찝하네.
잠시 생각하다 그만뒀다. 별거 아니겠지, 사춘기 여자애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아? 알면 아는 대로 기분 나쁘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저 녀석 멘탈 관리보다 곧 있을 전투 대비가 우선이다.
계획대로라면 문제없겠지만, 세상에 어디 계획대로만 되는 일이 있던가?
근 2주 동안 검술 훈련하랴, 운동하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랴. 몸이 세 개여도 모자랄 일정을 보내지 않았나.
할 수 있는 건 전부 끝냈다.
남은 건 진인사대천명.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여기서 하늘이란, 주신 키탄을 뜻한다.
하늘을 보고 빌었다.
“잘 좀 하자.”
진짜 뒤지기 싫으면.
* * *
‘죽자.’
타냐는 문에 기댄 채 생각했다.
훈련하러 밖으로 나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유료 훈련장 얘기를 들었으니까. 하지만 집에 훈련장까지 생긴 마당에 하루 꼬박 걸리는 거리를 갈 이유가 뭐가 있나?
그것도 같이.
‘몸밖에 없지.’
레이튼에서는 흔한 일이다.
남자아이들은 위험한 일에 끌려가 목숨을 잃고, 여자아이들은 창관에 끌려가 길러지고.
그걸 피하려고 일부러 더럽게 꾸미고 숨어 살았던 것 아닌가.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어릴 때 쫓겨났어도 신분에 대한 자각은 있다. 다른 누구보다 모습을 숨기는 데 주의해야 한다는 건 알 정도로.
자신도 있었다.
대부가 가르쳐 준 몇 안 되는 기술이었으니까.
실제로 그녀가 여자라는 걸 알아챈 사람은 여태 없었다.
‘내가 여자인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부축을 받은 적도 없으니 몸이 닿았을 때 눈치챘을 리도 없다. 구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러면 그녀를 도운 이유도 설명이 된다.
치료를 해 주고 훈련을 도운 건 호감을 사기 위해서겠지.
성격에 질렸든, 무능함에 질렸든, 이제 몸이면 됐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
차라리 잘됐다.
그동안 이유 모를 호의에 얼마나 불안했던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른 사람을 피해 숨어 다닐 때가 마음이 더 편했다.
어둡고 차가운 뒷골목이 아니라 햇살이 비추는 따스한 침대에서 일어날 때는 이게 꿈이 아닐까 두려웠고, 쓰레기통에서 나온 찌꺼기가 아니라 식탁에 앉아 온전한 음식을 먹을 때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아 불안했다.
그리고…….
다시 혼자 남겨지는 것이, 무서웠다.
‘당하기 전에 죽자.’
지금 당장 도망치거나 죽지 않는 이유는 끝까지 설명하지 못한 채, 타냐는 문에 기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 * *
도시를 나왔을 땐 밤이었다.
아침에 도시를 나가는 건 아예 걸리자고 소문을 내는 꼴 아닌가. 도착하기 전에 습격당하면 위험하니 선택한 것이 바로 밤.
거기에 다 같이 나가는 것도 눈에 띄니, 라이놀과 다린은 따로 출발하기로 했다.
나랑 타냐 둘뿐이란 소리다.
“그래서, 왜 죽을상인데?”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표정이 무슨 도살장 끌려가는 송아지 같은데.
한밤중에 훈련 가자며 밖으로 끌려 나오는 상황이지. 말만 놓고 보면 충분히 이상해 보이긴 하는데, 그것도 뭐 뺏길 거 있는 사람 문제지 저 녀석이 걱정할 건 없지 않나?
가진 것도 없는 게.
“벌써 죽상이면 어쩌려고 그래? 밤새 걸어야 할 텐데.”
“……어디까지 갈 건데?”
“거의 하루는 꼬박 걸어야 할 거야. 힘들면 말해, 업어 줄게.”
“미쳤어?”
이거 말하는 싸가지 보소.
“미치긴 뭘 미쳐? 하루는 걸어야 한다고 출발하기 전부터 얘기했잖아.”
“그쪽 얘기 아니야.”
“그럼 뭔데? 업히는 게 쪽팔려서 그래?”
“그건…… 그것도 그렇지만. 아니야.”
그러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얜 또 왜 이런 다냐. 독심술이라도 습득해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된다. 조금 생각해 봤는데, 거기까지 투자할 여유가 없다.
그냥 물어보고 말지.
“뭐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바로 얘기해. 말 안 하면 모르니까. 한밤중에 끌고 나와서 짜증 났냐?”
“…….”
타냐는 한참을 바닥만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덮칠 거면 여기서 하지 그래?”
“뭐?”
“굳이 그렇게 멀리까지 갈 필요 없다고.”
“……뭐?”
나를 노려보며 하는 소리에 순간 멍해졌다.
덮친다는 게 뭔 소리지? 내가 상상하는 게 맞나? 이 꼬맹이가 돌아 버린 건가?
“아니, 무슨 미친 소리야?”
“다가오지 마.”
어이없어서 목소리가 올라갔는데, 타냐가 뒷걸음질 치며 칼을 꺼내 본인 목에 갖다 댔다.
이건 또 무슨 미친 전개냐.
혹시라도 흥분하지 않게 거리를 벌리고, 차분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진정하고 얘기해 봐. 왜 그렇게 생각한 건데?”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타냐가 손에 힘을 빼고 엉거주춤했다.
‘빈틈!’
그 틈을 노려 달려가 칼을 빼앗은 다음 바닥에 눕혀 제압했다.
털썩!
“이거 놔!”
놓아 달라며 발버둥 치는 타냐를 무시한 채 몸을 뒤졌다.
“마, 만지지 마!”
“좀만 기다려 봐.”
숨겨 둔 무기가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녀석 위에서 내려왔다. 내가 비키자마자 타냐가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야, 야, 야. 일단 진정해.”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지만, 진정은커녕 몸만 부들부들 떨어대고 있었다.
요즘 정신 상태가 불안해 보이긴 했는데, 이 정도였나?
“일단 이건 확실히 하자. 덮칠 생각이었으면 지금도 가능했다는 거, 인정하지?”
“…….”
몸을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천천히 다가섰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움찔거리면서도 다행히 도망가지는 않았다.
근처까지 도달하고, 빼앗은 검을 조심스레 돌려놨다. 녀석이 당혹스런 얼굴로 올려다보길래 주저앉아 시선을 맞췄다.
“또 목에 가져다 대진 말고. 이 정도면 널 해칠 생각 없다는 것도 알겠지?”
“…….”
다시 조그맣게 고개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일단 급하니까 체력 아끼고, 도착한 다음 얘기하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자, 녀석이 주저하면서도 따라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하아…….
대체 어쩌다 내가 만든 게임에 들어와서 성범죄자로 의심까지 받는 거지?
날 여기로 보낸 놈이 있다면 죽여 버린다 진짜.
* * *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하루가 지난, 밤이 되기 직전이었다.
올 때까지 서로 말 한마디 안 나눴는데, 도착한 다음에야 타냐가 기진맥진한 상태로 사정을 설명했다.
체력도 바닥난 데다 훌쩍거리며 말을 해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정리하자면 이랬다.
남장한 자신을 한눈에 여자란 걸 알아채고, 다짜고짜 같이 붙어 다니자고 한 데다, 이유 모를 호의를 베풀고는 한밤중에 숲으로 유인…….
“음…….”
시X. 오해할 만했다.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자 타냐가 쓰러진 상태로 움찔거렸다. 오해한 것이 미안한지 눈을 피하는데, 저 녀석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다.
따지자면 내 배려심 부족에서 나온 문제지.
사실, 제작자로서 캐릭터들에게 친근감을 느끼지 않을 리 없다.
라이놀과 다린도 그렇고, 심지어 자이어 테르베로츠에게도 그랬다.
당연한 일이다.
전부 내가 만든 캐릭터니까.
그게 단지 게임 캐릭터라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장점이지. 그만큼 제작자가 게임에 책임감을 가질 수 있으니까.
문제는 내 경우다.
지금 나는 게임이 아니라 현실 아닌가.
‘저 녀석이랑 만난 지 열흘밖에 안 됐지.’
친근감은 익숙함이 된다.
내가 느끼기로는 만난 지 1년은 넘은 기분인데, 저쪽에서 보기에 나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정체 모를 꼬맹이.
속 나이야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본인과 나이 차도 안 나니 자기한테 욕정을 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레이튼에서 봐 온 게 그런 거밖에 더 있겠나?
이래서 조기교육이 중요한 거구나.
쓰러져 있는 녀석에게 꾸벅. 고개 숙였다.
“미안. 내 배려심이 부족했다.”
“어, 어?”
타냐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말 안 하면 모른다고, 얘기하라고 한 건 난데 정작 내 설명이 부족했어. 처음 널 도운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여기 온 건 널 노리는 녀석들이 있다는 정보를 받아서야.”
“……나를?”
“그래. 말해 줘도 무섭기만 할 거 같아서 얘기 안 하려 했는데, 잘못 생각했나 봐.”
“…….”
타냐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믿기 힘들겠지. 만약 그녀가 노려진다면 황녀라는 게 들통났다는 소리인데, 증거는 대부인 ‘미친개 아이언’이 전부 처리한 데다, 남장까지 하면서 모습을 숨겼으니까.
나도 바이론의 능력을 몰랐다면 대체 어떻게 알아냈나 싶을 거다.
문제는 내가 바이론의 능력을 안다는 거고, 놈이라면 타냐가 푸른 혈맥을 타고난 황녀란 걸 눈치챌 수 있다는 거다.
그건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멀리까지 오다니, 귀찮게 하는군.”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남자.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바이론 부하 중 하나일 거다. 아마 사천왕 최약체 그런 포지션이었던 거 같은데, 마침 잘됐다.
이러면 설명할 필요도 없어지지.
표정이 밝아지려는데, 남자가 말을 이었다.
“푸른 혈맥의 리안. 바이론님의 명으로 널 데려가야겠다.”
“뭐?”
누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