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8)
“너는 왜 여기 있니, 멍멍아?”
보라색 머리의 여성이 입을 열었다.
듣는 사람의 긴장까지 다 풀어 버리는 사근사근한 목소리. 문제는 상대방이 개가 아닌, 사람이었다는 거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무심하게 답했다.
“바이론 님이 불렀다.”
“이상하네, 나도 바이론 아저씨가 불렀는데.”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야 바이론 아저씨가 짖으라면 짖는 개니까 그렇다 쳐도, 나까지 부를 만한 일이 지금 레이튼에 있나?”
웬만한 실력자들은 죄다 죽거나 레이튼을 떠났기 때문에, 그 둘이 같이 나설 만한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아니, 사실상 처음이었다.
단 한 번 둘이 모인 적 있었는데, 그들이 뭔가를 하기도 전에 바이론 혼자 일을 끝내 버렸기 때문이다.
“바이론 님이 오시면 설명해 줄 거다.”
“그야 그러시겠지. 바이론 아저씨 말이면 뭐든지 할 텐데 뭔 일인지 관심이나 있겠어?”
남자가 시큰둥하게 말하는 여자를 쳐다봤다.
“나야말로 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
“뭐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여자가 답했다.
“2년 전, 그분이 단지 입을 여는 것만으로 A등급 용병 다섯을 순식간에 해치울 때, 너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나.”
“그게 왜?”
줄곧 무심함을 유지하던 남자의 표정에 금이 갔다.
“지금 왜, 라고 한 건가?”
남자의 어이없는듯한 물음에도 여자는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천진하게 대답했다.
“응.”
“……A등급 용병 다섯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건 3급 기사도 가능하지. 하지만 단지 입을 여는 것만으로 해치우는 건, 1급 기사도 불가능해.”
“그렇다고 바이론 아저씨가 1급 기사는 아니잖아.”
“그렇지. 그래서 무섭다는 거다.”
남자가 웃는 얼굴의 여자를 바라봤다.
“그런 사람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너는 이해 불능이고.”
“아하.”
여자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꼬았다.
“그런 거였으면 얘기를 하지. 나는 어떻게 하는 건지 알 거 같은데.”
“방법을 안다고?”
“응. 그때 바이론 아저씨가 죽이려던 사람 중엔 나도 분명 포함돼 있었거든.”
“무슨 뜻이냐?”
남자의 목소리가 조급해졌다. 여자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어투로 말을 이었다.
“으음. 그렇게 물어도 말 그대론데. 그때 바이론 아저씨가 살려 두려던 건 너, 멍멍이랑 여우 아줌마, 참새 아저씨까지 세 명이었어.”
“……그걸 어떻게 알지?”
“다섯 명이 쓰러지고 바이론 아저씨가 한참을 나만 쳐다봤거든.”
여자가 꼬았던 머리를 풀며 말을 이었다.
“시체가 서 있는 걸 보는, 그런 표정이었지.”
“…….”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말이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진짜라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상대를 두려워하긴커녕 아저씨라 부르며 태연히 지내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정말이지…… 양쪽 다 이해를 할 수가 없군.’
솔직히 별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바이론이 사람을 해치는 방법이다. 남자가 그걸 묻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
끼이익.
문이 열리며 바이론이 들어왔다.
* * *
“꼬맹이 하나만 잡아 오면 된다는 말입니까?”
구겨지려는 표정을 숨기며 남자가 물었다.
‘지금 A등급 용병 둘을 모아 놓고 꼬맹이 하나를 납치하라는 건가? 정말?’
일이 너무 쉬워 보여서 불만인 게 아니다.
그의 경험상 이런 일은 꼭 구린 구석이 있다는 게 문제다. 단순한 납치라면 A급 용병을, 그것도 둘이나 모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남자가 보라색 머리의 여자를 흘깃 쳐다봤다.
‘방법에 대해 들어야 하는데.’
그 방법이 진짜일지 혹은 단순히 여자의 추측일 뿐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주 사소한 단서라도 된다면 들어 둘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평생 바이론의 개로 살 수밖에 없으니까.
아쉬운 눈빛으로 여자를 쳐다보던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이론이 그를 응시하고 있던 탓이다.
바이론이 싱긋 웃었다.
“뭔가 생각할 게 많은가 봐? 내가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하는 걸 보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남자가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사소한 것으로라도 바이론에게 찍히고 싶지 않았다. A등급 용병이라고 해 봐야 언제든 갈아 버릴 수 있는 인간이니까.
그 모습을 본 바이론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댁이 참 마음에 들어. 주제를 알거든. 짖으라고 할 때 짖고, 아닐 때는 조용하잖아.”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인 채로 남자가 얼굴을 구겼다.
A등급 정도 되면 어딜 가도 무시당하진 않는다. 그에게 이런 모욕을 할 수 있는 자는 바이론 뿐이었다.
“근데 왜 이번에는 선을 넘으려 하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가 허리를 펴고 바이론을 살폈다.
웃는 표정이었지만, 남자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바이론은 매우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남자가 허겁지겁 다시 허리를 숙였다.
그런 남자의 위로 바이론의 목소리가 울렸다.
“궁금해하지 마.”
“…….”
남자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또다. 저……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한 반응.
바이론이 무심한 표정으로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도 마찬가지다, 마녀 사냥꾼.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으음. 아저씨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입이 더 근질거리는데.”
바이론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여자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음……. 그치만 내가 다른 사람 비밀을 떠벌리는 취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걱정 마, 걱정 마. 얘기 안 할 테니까.”
“처신 잘하는 게 좋을 거다. 널 죽일 방법이 없어서 살려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이지, 아저씨. 잘 알고 있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바이론이 고개를 돌렸다.
“꼬마 하나를 납치하는 건 맞지만 일이 조금 틀어졌어.”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원래는 도시 안에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테이어 테르베로츠와 연이 생긴 것 같더군.”
“노블레스 수장 말입니까?”
깜짝 놀란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테이어 테르베로츠라면 돈과 권력에 한했을 때, 현재 레이튼에서 가장 높은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사람과 연이 있는 꼬마라?
‘역시 구린 구석이 있는 일이었군.’
남자는 차라리 안심했다.
그 정도는 감당할 만하다. 언제나 가장 무서운 건, 알 수 없는 위험이니까.
바이론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별로 상관은 없지만, 조금 귀찮아지지. 그러니까 이왕이면 도시 밖에서 처리해.”
“도시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경우는 어떡합니까?”
“그때는 도시 안에서 해야지. 어디까지나 귀찮은 게 싫을 뿐이니까.”
바이론이 등을 기대며 덧붙였다.
“입만 멀쩡하면 다른 데는 어찌 돼도 괜찮아.”
“사자검과 바람의 마도사는 어떻게 할까요.”
남자가 그 둘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물었다.
B급 용병 둘.
유명하긴 하지만, 실력 때문은 아니다.
보기 드문 남매 용병이라는 것과 호구 같은 성격, 그리고 라이언 가문의 생존자일지도 모른다는 소문 탓이지.
B급 둘이라면 그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그런 떨거지들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어. 거치적거리면 치우고, 아니면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남자는 공손하게 대답은 했지만, 속이 영 불편한 것을 느꼈다.
‘대체 그 꼬마 정체가 뭐기에 그 둘을 떨거지 취급하지?’
그런 생각을 하던 남자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바이론을 보고 황급히 생각을 지웠다.
“그래, 네가 생각해야 할 건 어떻게 그 꼬마를 내 앞에 데려올지, 그것뿐이라는 걸 명심해.”
허리를 숙이는 남자를 보며 바이론이 웃었다.
푸른 혈맥의 능력이 몸을 강화하는 것뿐일 리가 없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겠지. 설혹 그렇다 해도 저 둘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다.
‘못 이겨도 상관은 없지만.’
원래 죽이려 했던 년 하나, 말은 잘 듣지만, 능력이 떨어지는 놈 하나.
‘잃어도 큰 손해는 아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숨겨진 능력은 밝힐 수 있을 테니까.
바이론이 웃었다.
다른 푸른 혈맥을 만나는 게 벌써 기대됐다.
그 말고 다른 푸른 혈맥은 본 적이 없으니까.
푸른 혈맥도 찌르면 아프다고 비명 지를까? 불로 지지면 잘못했다고 소리칠까?
죽을 때는? 죽기 직전에는?
바이론이 지금 느낌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기대되는군.’
* * *
“변태 새끼.”
지끈거리는 머리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타냐를 데려왔을 때부터 바이론과의 충돌은 예상했다. 애초에 타냐가 죽는 이유가 바이론 아닌가. 그게 머지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설정상 타냐가 죽는 건 올해다.
“그래도 너무 빠른데…….”
대체 타냐가 푸른 혈맥이란 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아직 몇 개월은 여유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태평하게 생각했나?
“하아…….”
이제 와 후회해도 별수 없다. 문제는 대책이지. 일단 가장 큰 문제는 바이론이 누굴 보내느냐다. 그놈 성격에 처음부터 본인이 직접 나설 리가 없다.
제일 위험한 상대는 ‘마녀’.
바이론의 부하라고 보긴 어렵지만, 지금 시기면 서로 연결점이 있겠지. 하지만 바이론이 ‘마녀’를 보낼 확률은 낮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이론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막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원래대로라면 제일 위험할 상대지만, 생각해 둔 게 있다. 진짜 문제는 상대가 두 명 이상을 보낼 경우인데, 설마 세 명 이상 보내진 않을 거다.
이쪽은 꼬맹이 둘에 B등급 용병 둘.
속된말로 X밥이란 소리다. 타냐가 푸른 혈맥이란 걸 감안해도 둘 정도가 최대겠지.
사실 둘도 과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라이놀을 키워서 상대할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하지만 노블레스와 인연을 맺게 된 지금이라면 경우의 수가 하나 늘어난다. 놈들도 노블레스와 척을 지긴 싫을 테니까. 요컨대 도시에서 공격당할 확률은 낮다는 소리다.
조금은 시간을 번 건가?
사실 테이어 테르베로츠와 내가 그렇게 서로 도와줄 만한 사이는 아니지만, 바이론은 그걸 모르지 않는가. 그쪽에서 보기엔 노블레스 소속이었던 사람의 저택까지 소개해 준 관계. 사정을 모른다면 우리가 노블레스에 소속됐다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운이 좋군.”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이런 경우까지 생각하고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도움은 되었으니 감사하자, 속으로만. 빚으로 달아 둘 생각은 없다.
일단 시간을 벌었으니 할 일은 간단하다.
라이놀과 다린에게 도움을 청하고, 작전을 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운동해야겠다.”
흑철석 갑옷에 중력 장갑을 사용해 무게를 더했다. 초인의 신체에까지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 그 상태로 흑철석으로 만든 아령을 들기 시작했다.
대장장이가 선물로 준 물건이다.
“역시 몸 건강한 게 최고지.”
애들도 아니고 싸움 이기면 뭐 하겠나, 싸우고 난 후가 중요하지. 역시 건강하고 튼튼하게 사는 게 제일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