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7)
“허.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소.”
“…….”
수련하러 가는 길에 대장간을 들러 의뢰했던 흑철석 갑옷을 찾으러 온 순간이었다.
투박한 통짜 갑옷.
사실 입는다기보다는 걸친다는 느낌이 어울리는 모양새다. 이쪽은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고, 애초에 수련용이니 별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문제는…….
“흑철석 갑옷을 장식용으로 사용한다 했을 땐 솔직히, 세상에 별 괴짜도 다 있다 했소만…… 나도 흑철석으로 만든 갑옷이 이렇게 멋있을 줄은 대장장이 20년 만에 처음 알았군.”
그래. 문제는 저거다.
그냥 대충 입으려 했던 갑옷이 너무 멋있었다.
갑옷에 관심이 없던 나조차 눈 돌아갈 만큼. 저게 진짜 그 길쭉한 똥 덩어리 같던 원석과 같은 금속이 맞나 싶을 정도.
그러니까, 존X 눈에 띈다는 뜻이다.
“아니, 진짜 이게 흑철석으로 만든 거라고요?”
대장장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렇소. 이렇게 생길 줄 몰랐소? 알고서 의뢰한 줄 알았소만.”
전혀 몰랐다.
그 똥 덩어리 같은 걸 보고 어떻게 이런 걸 떠올려?
과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광택에, 분명 통짜 갑옷인데도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유려함.
……대체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나도 남자다. 멋있는 갑옷에 환상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문제는 여기가 레이튼이란 거다. 저런 거 입고 돌아다니면 어그로 오지게 끌릴 거 같은데…….
골치 아픈 일만 늘어난 느낌이다.
“하아…….”
수련장에 숨겨 놔야 하나?
최근 찾아낸 수련장은 인적 드문 숲속이라 웬만하면 별일 없겠지만, 저 정도로 눈에 띄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매번 땅에 묻어 두기도 번거롭고.
고민해도 딱히 별수가 없다.
대충 갑옷을 들어 올리자 대장장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그걸 어떻게……? 기, 기사님이셨습니까?”
“아뇨. 그냥 태어나길 튼튼하게 태어났어요.”
“그게 무슨…….”
이해하려 들지 마라. 나도 이해시킬 자신 없으니까. 그냥 그런갑다 넘어가 줬으면 좋겠다.
대충 갑옷을 천으로 가리고 수련장으로 향하려는데, 대장장이가 호들갑을 떨며 무릎을 꿇었다.
“아이고, 기사님! 제가 여태 몰라뵙고 무례를…… 제발 용서해 주십쇼.”
“이거 왜 이래요? 나 기사 아니라니까.”
“기사도 아닌데 어떻게 흑철석으로 된 갑옷을 든단 말입니까요? 마력으로 강화한 게 아닌 이상 아무도 못 드는걸!”
“아, 진짜 아니라니까!”
지구 나이로 쳐도 나보다 나이 많은 아저씨가 무릎 꿇고 비는 모습을 보는 건 대단히 곤욕스럽다.
부담스러워서 얼른 일으켜 세우려는데.
‘잠깐…….’
어떤 생각이 떠올렸다.
이 세계의 기사들은 갑옷을 입고 다니지 않는다. 오히려 마력 없는 용병들이나 입고 다니지. 그냥 방어를 마력으로 때우는 거다. 그러다 보니 갑옷은 마력도 없는 쩌리들이나 입고 다닌다는, 다소 언밸런스 한 마초이즘적 문화가 형성돼 있다.
사실, 기사들도 갑옷을 입는 편이 낫다.
마력을 사용하는 상대에게는 쓸모없겠지만, 그 외의 공격은 갑옷으로 때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공격을 막는 데도 마력이 소모되지 않는가.
어차피 싸울 때는 몸 강화하고 싸우는데, 갑옷 입는다고 딱히 마력 더 들어갈 일도 없다.
근데 기사들은 그냥 안 입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왜? 폼이 안 나니까.
‘저기 저 용병 놈 좀 봐라. 마력 하나 없어서 저런 철 덩어리를 걸치고 다니는구나.’
‘쯧쯧, 약해빠진 것들. 미개하기 짝이 없군.’
‘정말 같은 칼잡이라 하기도 민망합니다.’
이러고 있는 것이다.
진짜로 갑옷의 효용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갑옷을 안 입어도 되는 자신에게 빠져든 거다.
그런 기사들에게 가장 안타까운 순간은 언제인가? 바로 도시에 있을 때다.
밖에서는 갑옷 안 입는 게 멋있어 보이는데, 도시에서는 죄다 안 입고 다니지 않는가!
아무도 기사란 걸 알아주지 않는단 소리다.
도시에서도 폼 좀 잡고 싶은데, 또 직접적으로 티 내고 다니기는 쪽팔린다.
안에서도 기사인 걸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는 인정 욕구! 관종이라고도 한다.
이런 상황에 기사들만 입을 수 있는 갑옷이 나온다면 어떨까?
워낙 무거워서 마력 없이는 도저히 입을 수 없고, 다른 금속의 갑옷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심지어 멋있기까지 하다.
……이건 팔린다.
여태 무릎 꿇고 있던 대장장이를 일으켜 세우고 입을 열었다.
“아저씨, 나랑 사업하나 안 할래요?”
* * *
사업 얘기를 대강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초인 특성 달고 있으면 근 손실도 없다. 지구의 모든 헬스인이 꿈에 그릴 특성.
그러니까 하루 정돈 쉬어도 괜찮겠지.
글러 먹은 생각을 하며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다린의 싱글벙글한 얼굴이 보였다.
“…….”
요즘 왜 다린이 행복해 보이면 기분이 나쁘지? 이 망할 놈의 도시가 순수한 나를 오염시킨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뭐 좋은 일 있었어요?”
“앗, 리안! 왔어?”
싱글벙글 웃는 채로 다린이 내게 다가오더니 나를 툭툭 쳤다.
“요 녀석, 요 녀석! 한 건 했구나!”
“떨어져요.”
“앗…… 네…….”
다린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너무 행복해 보이니까 나도 모르게 순간 정색했네. 진짜 레이튼이 내 인성을 물들이고 있는 건가? 아니, 다린한테만 그러는 걸 보면 그냥 다린 문제인 것 같다. 그런 걸로 하자.
“죄송해요, 순간 저도 모르게.”
“아니에요. 제가 주제도 모르고…….”
“……진짜 미안해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민 반응 아닌가?
말 한마디 한 거 가지고. 전부터 계속 저러는데, 알아서 조심해야겠다.
한참을 달래고 나서야 다린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아, 맞다! 물건! 노블레스에서 가문의 물건을 돌려줬어!”
“벌써요?”
돌려줄 건 예상했지만, 일 처리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 상대 쪽에서 호의적인 제스처를 보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역시 뭔가 있어 보이는 척이 통했나?
앞으로도 그 아저씨 상대로는 무게 좀 잡고 있어야지.
“그래서 물건들은요?”
“오빠가 영초만 빼고 전부 돈으로 교환하러 갔어.”
“라이놀이요?”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을 왜 그렇게 부려먹지?
황당한 눈으로 다린을 쳐다보자 지레 찔렸는지 알아서 입을 열었다.
“나, 나도 바쁜데?”
“누가 뭐래요?”
“그런 눈으로 쳐다봤잖아!”
진짜 눈썰미는 좋다. 근데 왜 눈치는 못 챙길까.
“매일 집에 있으면서 뭐가 바쁜데요?”
“노는 거 아니야! 뭐 만들고 있단 말이야.”
“뭐 만드는데요?”
“그건 비밀!”
“…….”
한 대 때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라이놀은 언제쯤 돌아오는데요?”
“아침에 나갔으니 슬슬 돌아오지 않을까? 아! 그리고 내일은 이사 갈 거야!”
“네?”
이게 무슨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소리야.
“내 실험실도 만들고, 리안 너, 항상 숲까지 가서 수련하는 것도 불쌍하다고 오빠가 훈련장 딸린 저택 산다고 했어. 내 실험실도 만들고.”
“두 번 얘기할 필요 없어요.”
뜬금없긴 했지만, 마침 갑옷을 어떻게 숨겨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다. 훈련장 딸린 집이 생기면 동선 낭비도 사라지고 갑옷 숨길 필요도 없겠지. 나한테도 좋은 얘기다.
그런데…….
“어떻게 내일 바로 이사를 가요?”
아무리 레이튼이 개 막장 상태라지만, 그런 저택을 하루 만에 구한단 말인가?
“그것도 노블레스 쪽에서 소개해 줬어.”
“노블레스에서요?”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사람 좀 좋게 봤다고 그렇게 퍼 주는 스타일은 아닌데, 빚이라도 만들어 둘 셈인가?
다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응, 그 뭐라더라? 윌포드? 그런 이름의 사람이 쓰던 저택이라던데. 마침 어제 레이튼을 떠났대. 급하게 망명이라도 했나 봐. 되게 싸게 줬어.”
“…….”
이런 젠장.
* * *
“와 집 진짜 좋다!”
다린이 신나서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미국 가 버린 윌포드 셰링턴에겐 미안하지만, 집이 좋긴 했다. 3층짜리 저택인데, 무려 별채까지 있는 데다 마당엔 분수도 있다. 집에 귀신만 안 붙어 있으면 좋겠는데, 괜히 찝찝하네.
이렇게 될지 예상 못 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집에서 살게 될 줄도 몰랐지만.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문제는 그것보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이 집을 소개한 이유다.
내가 고발을 해서 죽은 상대의 집을 넘긴다는 건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포상 혹은 경고.
그리고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 이건 경고로 보는 게 맞겠지. 나를 적대하면 너도 골로 갈 수 있다, 뭐 그런 거.
딱히 적대할 생각은 없지만, 일단 그쪽에서 경계하고 있다는 건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주변을 둘러보니 신난 건 다린뿐이다.
나는 사정을 알다 보니 심란했고, 라이놀은 애초에 물욕이 없는 데다, 타냐는…… 하긴 쟤가 이런 집이 눈에 차겠냐. 황궁에서 살던 앤데.
게다가 요즘 하는 거 보면 집 구경할 정신이라도 남아 있는지 의문이다.
“실험실은 며칠 더 있어야 할 거야. 마침 전 주인이 쓰던 실험실이 있는데, 청소가 덜 끝났다고 하더라.”
청소하는 게 피나 시체가 아니길 빌 뿐이다.
“십 년 동안 실험실 꿈도 못 꾸고 살았는데 며칠은 껌이지! 드디어 나도 연구직이다!”
좋아라하는 다린을 바라봤다.
게임에서 다린이 실험실로 빠지는 루트는 없다. 현장직 탈출이 목표라는 설정은 있지만, 죽을 때까지 못 이루니까. 그러니 저렇게 좋아하는 만큼의 재능을 보일지는 모르겠다.
뭐, 어차피 본편대로 가면 6성급 정도.
없다고 문제 생길 만한 전력은 아니다. 하고 싶은 거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좋겠지.
나는 딱히 짐 정리할 것도 없다. 훈련이나 해야지. 라이놀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훈련장은 어디에 있어요?”
“저택 뒤쪽에 가면 있긴 한데…… 이사 온 날부터 훈련할 생각은 아니지?”
“저는 짐이랄 것도 없는데 놀아서 뭐 하겠어요. 운동이나 해야지.”
황당해하는 표정의 라이놀을 뒤로하고 타냐에게 말을 걸었다.
“야, 운동하러 가자.”
“……나?”
“너 말고 또 있냐?”
타냐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왜?”
“어차피 너도 짐 없잖아. 아무것도 안 하게?”
“……그냥 나 좀 내버려 둬.”
나도 마주 인상을 찌푸렸다.
탱탱볼처럼 튕기는 녀석이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면 결국 듣기는 한다.
지금의 타냐 같은 상태는 억지로라도 계속 뭔가 시키는 게 낫다. 아무것도 안 하고 계속 혼자 침울해져 있으면 자존감만 바닥까지 떨어질 뿐이니까.
“너 그러다 진짜 잉여 인간 되는 거야. 잉여 인간. 잔말 말고 따라와 봐.”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는데, 주춤거리면서도 결국 따라오는 게 보였다.
역시 저 녀석 다룰 땐 다소 강압적으로 나가는 게 낫겠다. 자존심은 강한데, 자존감은 낮아서 밀어붙이면 얼추 말을 듣는다.
훈련장에 도착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타냐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서 앉았다 일어났다 20번만 해 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타냐가 다시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저거 툭하면 인상 찌푸리는 버릇도 고쳐야 하는데, 레이튼에서 딱 처맞기 좋을 상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일단 체력 단련부터 시키자.
“일단 해 봐. 대충 체력이 어느 정돈지 보게.”
타냐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시키는 대로 스쿼트를 시작했다. 애가 말을 잘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애매하네.
녀석이 스쿼트 하는 걸 지켜봤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어?
털썩.
엉덩이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
“…….”
운동에 조예가 깊진 않지만, 살면서 스쿼트 10번도 못 하고 쓰러지는 건 처음 본다.
“자, 잠깐 쥐가 나서 그런 거야.”
녀석도 무안한지 재빨리 일어나려고 하는데 계속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안 그래도 바닥인 상태의 자존감이 지하실 뚫고 들어갈까 봐 최대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힘들지? 처음엔 다 그래. 충분히 쉬었다 일어나.”
“…….”
창피한지 벌게진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는 걸 보며 속으로 한숨 쉬었다.
다마고치라도 키우는 것 같네.
녀석이 쉬고 있는 틈에 나도 운동해야겠다.
내가 유일하게 들고 온 흑철석 갑옷을 걸치려는데, 다린이 멀리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물건 돌려주러 온 사람이 리안한테 전해 달라고 한 말이 있었는데 실험실 생각하다가 깜빡했어.”
“뭔데요?”
그 아저씨가 전해 달라고 한 말이면 나쁜 생각밖에 안 드는데.
다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더라? 베이론? 바이론? 어쨌든 그런 사람을 조심하라던데.”
* * *